문학평론
불온한 미(美)와 다른 현실
정한아 김성규 서대경의 시
김영희 金伶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라일락과 장미향기처럼 결합하는: 진은영 시의 ‘감성’과 ‘정치’」 「여기 네가 있다: 공감각(共感覺)의 정치학」 등이 있음. yhorizon@naver.com
공감각, 타자의 현실에 머물기
시인이 자신의 삶을 이루는 구체적인 조건들, 즉 현실에 반응하는 것은 마치 봄날의 벚나무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1)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에 반응하고 개입하는 방식일 텐데, 이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바로 ‘시적인 것’이다. “시적인 것이 없는 시인의 발언이란 게 무슨 힘을 갖겠는가.”2) 여기서 시적인 것을 이루는 언어는 단일한 이데올로기적 구호나 정치적 쎈티멘털을 토로하는 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자명해졌다). 시인의 언어는 그야말로 시인의 몸을 통과하고 정신을 포괄하고 무의식을 관통하여 간신히 흘러나오는 말,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해보면) 말의 고갈상태에서 나오는 한계체험으로서의 말(이영광)이며, 삶의 모든 부면을 필요로 하는 언어(이장욱)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현실과 정치를 다루는 시인의 언어는 벚나무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개인의 실존적인 곤경을 다루는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모든 부면에서 시인의 몸, 즉 현실을 경험하는 시인의 몸은 특별해 보인다. 이를테면 나의 일상이 특정한 삶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 나의 몸이 현실자본주의의 야만을 실감하고 있다는 것. 또한 내가 용산이나 강정 같은 우리 사회의 파국의 현장에 참여한다는 것, 나의 몸이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공명한다는 것. 이처럼 언어의 갱신이란 무엇보다 몸의 경험을 통해 이끌리는 것이 아닐까. 나의 현실을 직시하고 타자의 현실에 머무는 것, 이같은 몸의 작용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공감각(co–sensation), 즉 파국의 현실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함께-느낌을 통해, ‘우리’라는 존재를 수행해가는 것이다.3) 이때의 수행이란 우리라는 공동체를 무한히 연습해간다는 의미이며 또한 우리라는 공동체로 무한히 이행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컨대 제주 강정의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시민들을 떠올려보자. 함께-있음의 이유와 근거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해도 그들이 지금 강정의 주민들과 함께 있다는 것, 함께 부르는 노래, 함께 먹는 밥을 통해, 서로의 표정・목소리・눈빛을 통해 어떤 정념을 나눈다는 것. 이같은 함께-있음과 실존의 나눔을 통해 ‘우리’라는 존재는 실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함께-있음의 감각이 비단 특정한 공간성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먼 이국에서 “저 멀리 용산참사의 시체가 떠내려가던 어떤 밤에 아무런 대항할 말을 찾지 못해서 울던”(허수경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 시인의 몸이 그러할 것이다.4) 비록 용산참사의 공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우는 몸’으로의 시 쓰기가 곧 타자와 함께-있음의 근거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시인과 독자와 희생자들은 보이지 않는 눈물을 함께 나눔으로써, 시 텍스트를 통해 모종의 ‘우리’를 실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시를 향한 시인의 기투는 엄밀한 의미에서 언어와 현실과 시인의 삶 전부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시인의 시적 투쟁은 언어와 현실 모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서정성의 옹호를 위하여 시에 도입되는 현실의 폭을 제한하는 것이나, 미적인 것의 옹호를 위하여 언어실험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서정의 의미를 특정한 제도 안에 가두거나, 미의 이름으로 미적인 것 자체를 질식시키는 역설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시적인 것의 본질은 어쩔 수 없이 불온함, 불온한 아름다움 자체이기 때문이다.
불온한 아름다움이란 주류 질서가 고정시킨 사회적 배치에 균열을 가하고 동시에 기존의 문학적 제도와 관습에 위협을 가하는 시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위와 진보, 즉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진보는 필연적으로 한몸이다. 김수영(金洙暎)이 프랑스 작가 뷔또르(M. Butor)의 말을 인용하여 “모든 실험적인 문학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5)다고 썼을 때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이분법은 무의미해진다. 시적인 것을 불온한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했을 때, 시적인 것 안에는 이미 정치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와 현실, 시와 정치라는 이질적인 두 대상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묻는 과정은 ‘시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어려운 가능성을 해명하고 실험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물론 여기에서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하지만 문학에서 정치적인 것의 의미와 범위는 끊임없는 물음과 실험을 요하는 진행형의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수많은 담론적 논의를 거쳐왔으므로 이 자리에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정치적인 것의 핵심을 몸의 공감각을 통해 타자의 현실에 머무는 것, 즉 함께-있음을 통해 우리를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하겠다.
2008년 진은영(陳恩英)의 글6) 이후로 근 사오년간 시와 정치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얼마간의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