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생태담론과 사회변혁

생태사회주의의 현주소

데이비드 페퍼 David Pepper

영국 옥스퍼드브룩스대학 지리학과 교수. 저서로 Modern Environmentalism: An Introduction, Eco-Socialism: From Deep Ecology to Social Justice, The Roots of Modern Environmentalism 등이 있음.

* 이 글의 원제는 “On Contemporary Ecosocialism”으로, Qingzhi Huan ed., Ecosocialism as Politics: Rebuilding the Basis of Our Modern Civilisation (Springer Netherlands 2010)의 2부 3장을 옮긴 것이다. 원문의 이탤릭체는 고딕체로 바꾸었다. ⓒ David Pepper 2010 / 한국어판 ⓒ 창비 2013

 

 

생태사회주의 원리

서구의 많은 사람들, 가령 영국사회당(SPGB)은 대체로 사회주의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즉 사회주의는 부를 생산하고 분배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체제를 구축하는 것인바, 부의 생산과 분배는 공동체 전체에 의해 결정되고 그 이익에 부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1)

생태사회주의는 사회주의적 분석과 처방을 환경주의에 생태중심적(ecocentric)이 아니라 인간중심적(homocentric)으로, 또한 급진적으로 적용한 산물이다. 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와 관점을 다루기 위해 전통 사회주의를 수정하기도 한다. 역사와 사회 변화,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생태사회주의의 틀은 역사적으로는 19세기의 맑스 저작에—부분적으로는 윌리엄 모리스의 해석을 거쳐—대체로 의존한다.2) 생태사회주의에서 제시하는 처방은 지방분권, 직접적 경제민주화,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처럼,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전통을 되살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생태사회주의에서 나타나는 사회주의의 유형은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에 가깝다. 생태아나키즘과 생태사회주의는 분석과 전략의 측면에서 중요한 차이점이 있지만 말이다. 생태사회주의의 역사유물론적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양식과 그런 생산양식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제도 및 세계관은 현재의 환경파괴를 초래했다. 생태사회주의는 환경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발전이 자본주의의 내재적 속성이며 따라서 지속 불가능한 발전을 중단하려면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가 도래하면 환경 파괴에 일조하는 (자연으로부터의 또한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를 끝장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계몽의 기획’을 추구하는 생산과 산업은 계속해도 괜찮다고 한다. (생태사회주의가 심층생태주의 같은 생태중심적 환경주의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과 갈라서는 것은 이 지점이다.) 생태사회주의는 생산과 분배를 (이를테면 유능한 국가가) 합리적으로 계획할 수 있다고 간주하지만, 대체로 국가를 불신하며 지역공동체와 지방의 연합 같은 한층 아나키즘적인 비전을 갖고 있다.

생태사회주의적 사회는 인간이 자연과 맺는 진정한 관계를 재발견하고 표현하려고 하며 현대자본주의가 전제하는 분리와 우월성, 생태중심주의가 신봉하는 단순한 평등을 모두 거부한다. 그러면서 사회와 자연은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있기에 사회는 자연을 통해, 자연은 사회를 통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자연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인간이 하는 행위는 자연적인 것이다. 생태사회주의 공동체는 ‘심층생태주의’ 원리에 반대하여 인간이 다른 종()과 달리 자연의 한계에 본질적으로 구속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럼에도 모든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관리하고 보호하며 자연과의 관계를 현명하게 꾸려가고자 한다.

생태사회주의가 환경주의자의 이익이 자본의 이익과 본질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태맑스주의자들, 이를테면 미국과 서유럽의 『자본주의자연사회주의』(Capitalism, Nature, Socialism) 그룹은 자본주의에 생태적 모순이라는 제2의 모순이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3) 자본주의의 주요 모순이 노동력과 노동력이 생산하는 상황을 훼손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성향—결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봉기하여 체제를 무너뜨린 뒤에 무계급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을 뜻하는 데 비해 제2의 모순은 다음과 같다.

1. 자본은 생산품을 구매할 수 있는 시장의 구매력을 초과하려 생산하려는 내재적인 성향이 있다.

2. 이와 더불어 이익률을 나날이 증대함으로써 투자를 유치하려는 경쟁은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거느린 채 전세계에 전파되고 강화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3. 게다가 생산이 이뤄지는 극도로 치열한 경쟁과 단기간에 승부를 보려는 자본가 투자자들로 인해 생산력은 계속 증가하지만 기업은 이같은 상황에서 환경보호에 드는 비용을 줄이려는 본질적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오염을 예방하기보다는 사후에 제거하는 생산기법을 쓰며, 오염예방 기술을 활용하거나 폐기물 발생을 아예 차단하여 애초에 환경을 파괴하지 않기보다는 환경 파괴에 대처하는 비용을 사회 전체로 돌리는 것이다.

4. 자본은 끊임없이 팽창하고 순환해야 하기 때문에 소비문화를 조장하고 확산시켜 대중소비시장을 지탱한다. 이 때문에 기본 자원이 고갈되고 오염이 가중된다. 이를테면 온실가스가 그렇다. 제한적인 자원 재활용만 가지고는 비재생 에너지원을 비롯한 원자재의 고갈과 폐기물 발생을 상쇄하기에 역부족이다.

5. 결국 최종적인 씨나리오는 위험사회가 만들어내는 환경적사회적 위협, 가령 지구온난화나 원자력에 직면하여 자본주의가 의존하는 생산기반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생태사회주의는 어디에 와 있나

이론의 전개과정에서 서구의 생태사회주의는 맑스주의의 ‘프로메테우스적 경향’을 탈피하려고 했다. 자연을 ‘정복’하는 과정이 역사라고 간주하는 맑스주의적 역사관은 결국 자연을 착취하고 자원을 낭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생태사회주의자들은 또다른, 어쩌면 간과된 맑스주의의 전통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자연이 총체적이고 변증법적으로 더 섬세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결합되어야 한다는 인식의 전통 말이다.4) 그런 결합을 위해 생태사회주의자들은 지구 수용능력의 한계로 인해 경제성장과 인구성장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일부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의 생태중심적 논리를 대체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생태사회주의는 극단적인 사회적 건설주의에서 벗어나 비판적 현실주의 쪽으로 이동했으며, 사회가 자연을 분별없이 착취하여 정복하는 데 한계와 제약이 있음을 인정했다. 게다가 이 제약은 상대적으로 역사를 넘어서는 양태로 작용하기에 시간과 공간에 두루 적용되지만, 이와 동시에 제약의 정확한 발현 양태는 지배적 생산양식, 즉 사회의 물적 토대에 의해 규정된다.

이 마지막 논점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생태사회주의자들은 조야한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토대–상부구조 모형’의 단순한 해석을 배격하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 ‘문화적 요인’의 역할을 인정한다. 따라서 생태사회주의 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문화적 해석과 구성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리고 자연과 환경 문제가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경제적 요인이 만들어내는 각각의 다른 언어적 ‘담론’에 속한다고 간주한다.5)

더 나아간 맑스주의 이론의 재구성 작업에서는 여성주의와 생태여성주의 논쟁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의 공헌은 여성과 자연의 관계를 보편적이고 ‘근본적’이라고 가정하면서 그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본질주의’의 함정에서—보호하고 양육하는 여자들이 삶의 물질적 현실과 더 가깝게 접촉하고 있다는 등의 주장에서—생태여성주의를 구해냈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생태여성주의자들은 맑스주의자들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변형하고 형성하는 과정을 논의할 때 ‘생산양식’의 중요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데서 벗어나 ‘사회적 재생산’ 양식에도—여기에서는 서구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동등하게 관심을 두는 방향으로 맑스주의 이론을 수정하고자 했다. (1960년대 이후로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의 고용기회 확대라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여성들은 맑스주의가 과거에 과소평가한, 가정의 삶을 중심으로 한 재생산 영역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종합하면, 세계화된 현대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며, 과거에 숱한 자칭 맑스주의 이론가운동가들을 좌절시키고 특히 급진적 환경주의자를 소외시킨 조야한 경제주의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이런 추세는 모두 생태사회주의 이론을 ‘건강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세계적인 사건을 형성하고 변형하며 특히 환경의 보전 및 보호를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서 ‘문화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열광과, 그에 상응하여 경제적 토대의 중요성에 대한 부당한 무시는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는 모두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의 문제인데, 우리는 지구적 근대화와 지구적 생태적 근대화의 과정을 형성하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물질적경제적기득권적 이해관계의 중요성을 온당히 평가하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1970년대에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일어난 이래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생태적 영역에서 이러한 이해관계가 중심적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해졌다.

따라서 지난 10년간 유럽에서는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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