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염상섭의 중도적 민족노선

그의 50주기를 기념하여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 영남대 명예교수. 저서로 『한국문학의 반성』 『민중시대의 문학』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문학과 시대현실』 『자유의 역설』 등이 있음. mwyom@ynu.ac.kr

 

*이 글은 경향신문사・한국작가회의・국제어문학회가 공동주최한 ‘2013 염상섭 문학제’ (2013.6.21)에서 기조발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임.

 

 

 

1. 들어가는 말

 

다들 알고 있듯이 염상섭(廉想涉, 1897~1963)은 남긴 작품의 분량이 워낙 방대해서, 소수의 연구자 아니면 통독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동안 염상섭 논의가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 『만세전』(1924) 『삼대』(1931) 등 몇몇 이름난 작품에 집중되거나 특정 시기에 국한되었던 것은 그런 점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다가 전집의 발간(민음사 1987)과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행사를 계기로 『사랑과 죄』(1928) 『무화과』(1932) 『효풍』(1948) 『취우』(1953) 등의 장편과 단편소설로 논의가 확장되었으나, 그럼에도 대중적으로 널리 읽힌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순히 분량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일반 독자에게만이 아니라 전문 연구자에게도 염상섭의 문학세계는 다니기 편치 않은 자갈밭이다. 아마 오늘의 독자에게는 이 현상이 더 심할 것이다.

유감스럽게 나 자신도 염상섭의 작품을 일부밖에 읽지 못한 부실한 독자의 한 사람이다. 그의 문학을 논하는 글도 조금밖에 쓰지 않았다. 『만세전』의 뛰어난 성과를 염두에 두면서 장편소설 『삼대』에 다루어진 시대적 변화의 의미를 등장인물의 갈등구조를 통해 분석해본 평론이 「식민지적 변모와 그 한계」(『한국문학』 3호, 현암사 1966)인데, 실로 오래전의 일이다. 이 글은 후일 「식민지적 근대인」으로 개제하여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작과비평사 1979)에 실었다.

어찌 보면 『만세전』과 『삼대』는 염상섭 소설 가운데 예외적인 위치에 있다. 그의 대다수 작품들이 독자에게 경원되어온 것과 달리 이 작품들은 국민적 교양소설이라 할 만큼 많이 읽히고 있을뿐더러 평론가들에게도 집중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내가 글을 쓸 무렵은 그런 붐이 일기 전이었다. 당시 나는 식민지사관의 극복이라는 지식인사회 일각의 새로운 흐름에 공감하고 그 방면 독서를 시작하면서, 그런 과제가 일제강점기 문학 속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찾아보려고 하였다. 『삼대』는 그런 문제를 점검하기에 아주 적합한 텍스트라고 여겨졌다. 다들 알다시피 ‘식민지 근대화론’은 오늘날까지 매우 논쟁적인 화두로 남아 있는데, 당시 내가 받아들인 ‘식민지적 근대’는 근년에 일부에서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반대로 일제의 강압적 식민통치에 의해 부분적으로는 봉건적 퇴행조차 수반되었던 반동적 근대화, 말하자면 근대화의 ‘왜곡’을 강조하는 개념이었다. 내가 보기에 『삼대』는 구한말부터 식민지 초기까지를 살았던 전환기의 인간적 전형들이 어떻게 ‘식민지적 왜곡’의 도정을 밟았고, 또 그것을 극복하고자 애썼는지 하는 문제를 드물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이었다.

유신독재 시대의 한복판에서 맞은 해방 30주년의 의미를 음미하기 위해 쓴 글이 「815 직후의 한국문학」(『창작과비평』 1975년 가을호)이다. 역시 오래전이다. 이 글에서 나는 김동인 채만식 이태준 김동리 계용묵 황순원 이선희 등 여러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검토했다. 그 주안점은 우리 민중이 일제 식민통치에 의해 어떤 고난을 겪었고 815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며 815가 우리 민중에게 실제로 가져다준 것은 무엇인지, 대상 작품들에 그려진 바를 통해 따져보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815가 우리 민중의 삶에 가져온 것은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또다른 고통일 뿐이라는 것이 다수 작가들의 문학적 증언이었고, 그런 점에서 815는 미완의 해방이라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위의 여러 작가들 작품과 함께 다룬 것이 염상섭의 연작단편 「이합(離合)」과 「재회」(1948) 및 「그 초기」(1948)이다. 이 작품들을 통해 나는 염상섭이 분단시대 초기의 정치사회 현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그리고 분단상황에서의 그의 정치적 입장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검토하고자 했다. 그 작품들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외세에 의해 분단된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진정한 자기실현의 공간을 발견하지 못하는 ‘실존적 방황’의 정서가 염상섭 문학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런 점이 그를 비관적인—나아가 염세적인—회의주의자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2. ‘만연체’ 문장의 사회적 기원

 

염상섭의 문체가 만연체라는 점은 두루 지적된 바로서, 거의 같은 시기에 문단에 등장하여 여러 면에서 대척적인 위치에 있었던 김동인(金東仁, 1900~51)과 비교해보면 그 점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알다시피 김동인의 문장은 대체로 단문이어서 짧고 속도감이 있으며, 대상의 특징을 간명하게 포착하는 데 능란하다. 장면의 전환도 빠르고 명쾌하며 인물의 묘사도 예리하고 직접적이다. 김동인의 소설이 잘 읽히는 것은 주로 그런 기술적인 면과 연관될 것이다.

반면에 염상섭의 문장은 이와 아주 다르다. 그의 길게 늘어진 복문들은 대상을 곧바로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맴돌면서 여기저기 건드림으로써, 독자가 소설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작가의 붓끝은 인물 행동을 서술할 때나 심리 추이를 묘사할 때나 결정적 포인트를 단숨에 타격하지 않고, 주변의 다양한 국면들과 연관된 복잡한 실타래를 끈질기게 추적할 뿐이다. 등장인물 간에 길게 이어지는 대화들 역시 독자의 편안한 집입을 가로막는다. 상황의 다면성을 남김없이 포획하려는 작가의 거의 신경증적 집착은 독자의 선명한 이해를 방해하고 대상에 대한 통일적 영상을 해체하는 미학적 딜레마를 낳는 것이다.

 

동지 추위에 영하 173부 타던 것이 이틀지간에 내일이 크리스마스라는데 오늘은 아침결부터 고드름이 녹아내리더니 한나절 절쩌거리던 진고개 어구는 석양판이 되니까 벌써 먼지가 날릴 듯이 뽀송뽀송하고 날씨는 여전히 푸근하다.

 

이것은 장편소설 『효풍』의 첫 문장이다. ‘엊그제까지 심하게 동지 추위를 하더니,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오늘은 날씨가 확 풀렸다’는 내용인데, 위에 보이는 바와 같은 늘어진 문장 때문에 독자로서는 묘사의 목표 자체가 몽롱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몽롱 효과의 발생에 관여하는 것이 묘사의 상세함은 아니다. 위의 문장을 몇개의 단위로 분해해보면: ‘이틀 전 동지 때는 영하 173부까지 추웠다’ ‘내일은 크리스마스란다’ ‘오늘은 날씨가 풀려 아침엔 고드름도 녹아내렸다’ ‘진고개 어구는 한나절 질척거리더니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