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생태담론과 사회변혁
진보정치와 녹색운동의 결합은 가능한가
장석준 張碩峻
노동당(전 진보신당) 부대표. 저서로 『혁명을 꿈꾼 시대』 『신자유주의의 탄생』 『장석준의 적록서재』 등이 있음. gramsci@empal.com
1. 적색과 녹색이 서로 만나야 할 이유
좌파정치와 생태운동의 결합은 가능한가? 상징색으로 표현한다면, 적색과 녹색의 만남은 과연 가능한가? 적색과 녹색, 둘 다 현 상태를 비판하며 그것을 바꾸겠다고 나선 정치사조다. 적색, 즉 좌파정치는 자본주의체제 변혁을 외치며 19세기말에 대중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녹색, 즉 생태운동은 산업문명의 생태계 파괴를 고발하며 20세기말에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둘은 사회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통하는 데가 있다.
그러나 이런 공통점을 상쇄할 만한 차이와 대립도 존재한다. 사회주의운동은 경제성장을 지고(至高)의 목표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 극명한 사례는 20세기 사회주의의 교과서 역할을 한 1930년대 소련의 5개년계획이다. 당시 소련의 중앙집권형 계획경제는 오직 한가지 목표를 향해 내달렸다. 그것은 자본주의보다 더 빠른 속도의 양적 성장이었다. 인간 노동뿐 아니라 자연 역시 이 과정에 투입되어야 할 여러 요소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결국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현실사회주의에서도 심각한 환경문제가 대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은 핵발전이 주요 쟁점이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그렇다. 현재 프랑스 정부는 사회당과 녹색당의 연립정부다. 어찌 보면 좌파정치와 녹색정치의 결합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 같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녹색당은 핵발전소를 단계적으로 철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사회당의 다수는 핵발전을 열렬히 지지한다. 이들은 핵발전을 프랑스가 앞으로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할 첨단산업으로 바라본다. 사회당 안에서도 아르노 몽뜨부르(Arnaud Montebourg) 산업부장관 같은 당내 좌파가 앞장서서 이런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편 녹색 쪽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모호한 입장이 문제다. 녹색정치의 선두주자인 독일 녹색당을 보자. 독일 녹색당은 본래 서독 신좌파 정치세력화의 산물이었다. 초기에 이 당은 사회민주당 ‘왼쪽’의 정치세력으로 지지를 모았다. 그러나 창당 주역들 중 ‘현실파’가 ‘근본파’를 압도하게 되고 2세대가 진출하면서 당의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 녹색 ‘현실주의’ 이야기가 나오더니 이제는 아예 녹색 ‘자유주의’를 말한다. 여러 주에서 사회민주당, 좌파당이 아닌 기독교민주당, 자유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도 하고(흑-황-록의 이른바 ‘자메이카’ 연정), 부유세와 법인세 감축, 복지 축소, 비정규직 확대, 독일군 해외파병 등에 앞장서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생태 자유민주당’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1)
적색과 녹색 사이에는 이러한 첨예한 긴장이 있다. 그럼에도 정말 둘의 만남이 필요한 것일까? 그렇다. 필요하다. 반드시 필요하다. 녹색도 적색과의 만남이 필수적이고, 적색도 녹색과의 결합이 긴요하다. 왜 그러한가?
우선 녹색 입장에서는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좌파의 오래된 이상이 점점 더 절실한 과제가 되고 있다. 물론 생태계 파괴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세기에 생태주의가 처음 부각될 때부터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자본주의의 부분적 교정을 통해 환경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더 강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녹색 자본주의’의 전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분위기가 급변한 것은 석유 정점(peak oil, 석유생산량이 확대되다가 최고점 이후 갑자기 줄어들게 되는 시점)과 기후 변화가 불거지면서였다.
특히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는데도 1992년 리우 정상회담 이후 줄곧 탄소배출 감축 합의에 실패한 강대국들의 현실이 각성의 나팔소리가 되었다. 탄소배출 감축은 경제성장에 한계를 설정하든가 아니면 적어도 그 속도를 줄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지속적 성장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더구나 금융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하에서 성장의 감속은 천문학적 규모의 금융투자를 거품으로 만들 위험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구 자본주의 질서를 용인하는 한, 인류는 기후변화가 임계치에 도달하는 것을 눈 뜨고 바라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사실 자본주의 중심부는 이미 성장 자체가 쉽지 않은 상태에 도달해 있다. 자본축적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이후에 자본주의의 성장 속도에 감속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맑스주의자들만의 통찰은 아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성장이 정체되는 ‘정지 상태’(stationary state)에 도달하게 된다고 내다봤다. 한 사회가 일단 ‘정지 상태’에 도달하면 이제는 사회의 중심 목표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끝없는 부의 확대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신적 교양, 도덕과 사회의 진보”를 추구해야 한다. 경제활동은 더이상 사회의 다른 영역들보다 우위에 놓일 수 없게 된다.2) 이런 선각자들의 통찰에도 불구하고, 북반구의 과잉축적된 자본은 지금도 자기팽창의 욕구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급기야 이들 자본은 금융 부문의 과잉팽창을 통해 성장의 정체를 돌파하려 한다. 이 때문에 정작 더 많은 발전을 필요로 하는 남반구 국가들에는 자본이 공급되지 못하고 반대로 북반구에서는 천문학적 규모의 거품이 형성된 것이다. 이 ‘성장’ 강박을 떨치지 않고서는 인류 문명과 지구 생태계 모두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독일 녹색당이 신자유주의에 적응하는 길을 택할 때, 또다른 녹색운동가들은 반자본주의-탈자본주의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미국의 제임스 구스타브 스페스(James Gustave Speth)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본래 주류 환경운동에 속한 인물이었다. 카터, 클린턴 행정부에서 환경 자문역을 맡았고,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태운동의 목표를 자본주의 극복과 연결시키는 급진적 입장의 대변자다. 스페스의 경우에도 주된 고민은 성장 문제였다. 성장 숭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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