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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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成碩濟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인간적이다』,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위풍당당』 『단 한 번의 연애』 등이 있음. songsokze@hanmail.net

 

 

 

장편연재 2

투명인간

 

 

만수는 나보다 두살 위니까 형은 형이다. 이십대 중반까지도 나는 만수를 부를 때 이름 뒤에 ‘형’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았다. 어릴 때는 덩치가 나보다 작았고 머리가 나빴다. 나와 만수 둘 중 하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것처럼 생김새가 달랐고(물론 내 눈에는 만수가 우리집 육남매 누구와도 닮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습관이나 태도, 학습능력 등 여러 면에서 대조를 보였다. 수준이 낮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이 형 같지 않았으니까 형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그러느라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다.

언젠가 우리 둘이 산에서 나물을 캐서 가져왔을 때 할아버지가 그랬다. “우얘 두 형제 년석이 뜯어온 나물이 저희 하나하나를 닮아 뺐구나.” 그때 만수가 들고 있던 건 참당귀였고 내가 들고 있던 건 개당귀였다. 만수가 가져온 참당귀는 맛있는 나물이지만 아주 구하기 힘들고 내가 들고 온 개당귀는 흔하지만 독이 있어서 잘못 먹었다가는 죽을 수도 있는 것이라 했다. 결론적으로 할아버지는 나에게 개당귀 같은 독종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 중 한 사람에게는 참당귀가, 또 한 사람에게는 독초인 개당귀가 손에 들리게 된 건 사실 우연이었다. 우리에게는 참당귀와 개당귀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전에 내가 참당귀를 가지고 오고 형이 개당귀를 들고 온 적도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형이 형답지 않아서 형 대접 안한다는 이유 말고는 할아버지에게서 그런 차별을 당할 만한 일이 없었다. 아니다, 형이 워낙 착하고 순진하기 때문에 평범한 내가 독종으로 보인 것이다. 형이 돌대가리고 멍청하니 나는 똑똑하고 영악해 보이는 것이다. 떨어져 있으면 모를 일인데 형제라고 묶여 있으니 남들은 형에게서 선량함을 보고 내게서는 악랄함을 보았다. 그러니 내가 만수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조건 내가 만수를 싫어하고 우습게 본 건 아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 둘 말고는 누구도 모르는 계기가 있다.

내가 학교 들어가기 직전 겨울, 동네 형들이 겨울방학 때 계곡의 큰 소()에 스케이트장, 아니 썰매장을 만들었다(당시에는 썰매를 스케이트의 일본식 발음인 ‘수게또’라고 불렀고 실제로 썰매장은 ‘수게또장’으로 불렸다). 읍내 가까운 데는 넓은 논에 물을 대 얼린 뒤에 새끼줄을 둘러쳐 만든 썰매장이 생겨나 있었다. 만국기를 달고 스피커로 팝송, 유행가까지 틀어주면서 스케이트와 썰매 타는 어른,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고등학교 때 보니 그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한 노래 가사에 이런 것도 있었다.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영화/선녀처럼 스케이트 타던 영화와/부딪치고 나서 미안하다 말하자/무표정했던 영화/그후 우리는 즐거운 일이나 슬픈 일이나 같이 얘기했죠/우리의 사랑이 움틀 때면 삼월이 오겠죠/그리고 오월이/라라라라라라라’—사월과 오월 「영화를 만나」). 물론 입장료를 받았고 군고구마와 오뎅 같은 것까지 만들어 팔았다. 겨울에는 별 볼 일 없이 놀고먹던 솜사탕, 뻥튀기, 번데기 파는 장수에 야바위꾼까지 몰려들어 장터나 운동회를 연상케 했다.

썰매장이 인기가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스케이트를 타러 여학생이 오기 때문이었다. 그 여학생을 따라 스케이트가 없는 친구들까지 오고 여학생과 그 친구들을 보러 남학생들이 몰려왔다. 결국 스케이트를 타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건전한 이성 교제’에는 목을 맨 청춘 남녀들이 몰려들어 썰매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개운리 계곡의 썰매장은 그걸 모방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개운리 깊은 산골짝의 썰매장까지 찾아올, 찾아온 여학생은 단 한명도 없었다. 아무리 눈 쌓인 아름다운 풍경의 숲 속에 여학생 입장료 면제인 스케이트장이 있다 한들 오가는 길이 너무 멀었고 차편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읍내 사는 여학생 중에 개운리 골짜기에 썰매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개운리에 사는 읍내 여학생 또래의 처녀들은 집안일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남자애들이 득시글대는 썰매장에 가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다. 그러니까 여학생, 혹은 여학생 친구들과의 건전한 이성 교제를 염두에 두고 썰매장을 만들자고 최초로 제안한 동네 형이나 그에 동조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나가 계곡을 때려막은 뒤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친 형들이나 제정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게 당시 개운리에 거주하는 청춘들의 지적 수준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사정을 전혀 몰랐다.

여학생커녕 여자애 하나 볼 수 없는 계곡 썰매장이 개장한 이후 나는 아침이면 무조건 썰매장으로 갔다. 동네 안에는 같이 놀 아이들의 씨가 말랐으므로 남자애들은 걸음마만 할 수 있으면 썰매장으로 향했다. 썰매가 있든 없든 간에. 가서는 미끄럼을 타고 얼음판 위에서 서로를 자빠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썰매도 타고 팽이를 치고 연을 날렸다. 그냥 잔치마당 같은 그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혼자 썰매를 타기엔 너무 어렸고 전용 썰매도 없어서 누가 태워주거나 해야만 탈 수 있었다. 만수는 썰매를 타며 노느라 바빠 내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 역시 만수가 거기 있는지 없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때 나는 불장난이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장난에도 난이도와 나이에 따르는 등급이 있다. 깡통에 못으로 구멍을 뚫고 끈을 매단 뒤 안에 불을 넣어서 빙빙 돌리며 자유롭게 이동하는 불깡통 놀이가 가장 고난도의 고급 불장난이었다. 그건 그런 깡통을 만들 수 있는 나이의 형들만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불깡통을 공중에 던져올리는데 그 때문에 제 머리칼과 옷 속에 불똥이 쏟아져들어가는 불상사를 예방할 수 있어야 했다. 나뭇가지, 풀에 불을 붙여서 들고 다니며 썰매장 주변의 풀이나 억새 같은 데 불을 지르는 것도 있었지만 그건 가장 하급의 불장난에 속했다. 이미 남들이 다 태워먹고 난 뒤여서 재미가 없었다.

보통은 돌을 둥그렇게 쌓아 아궁이를 만들고 그 속에 불을 피우는 방식으로 불장난을 했다. 돌을 얼마나 정교하게 쌓는지, 어떤 나무로 연료를 만들고 오래도록 꺼트리지 않고 불을 지피는지에 따라 각자의 기술과 재능과 성격이 드러났다. 불이 타고 난 뒤에 나오는 숯까지 있으면 최고로 쳤다. 어른들이 진짜로 숯가마에 나무를 넣고 태워서 숯을 만드는 것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여자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면서 살림살이를 흉내 내는 것처럼. 그날도 나는 작은 돌로 나만의 아궁이를 만들고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썰매장에서 얼음을 지칠 수 있는 도구는 썰매와 스케이트였다. 개운리 같은 산골에 스케이트가 생겼던 것은 군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파병된 청년들이 받은 목숨 수당을 집으로 송금하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부모들은 그 돈을 일단 장롱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다. 그런데 평소에 스케이트 타는 여학생을 사모하던 어떤 철없는 작은 아들이 그 돈을 훔쳐가지고 읍내로 가서 스케이트를 샀다. 무슨 자랑이라고 읍내에서부터 개운리까지 스테인리스 날을 번쩍거리며 스케이트를 목에 걸고 걸어왔다. 그러자 동계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따고 온 스케이트 선수가 공항에서 시내까지 카퍼레이드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효과가 개운리의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나타났다. 스케이트가 최신식 낫 같은 유용한 농기구가 아니라 한겨울에 제한된 장소에서나 탈 수 있는 놀이기구라는 것을 부모들이 깨닫기 전까지 그와 비슷한 일이 네댓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어쨌든 썰매장에는 부모의 몽둥이세례에도 몸을 부지하고 그 스케이트를 타는 형들이 몇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합이 벌어질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시합은 수십대의 썰매 주자 사이에 벌어졌다.

썰매 시합에 참가한 썰매는 쇠날이 달린 것과 철사로 된 것으로 나눌 수 있었다. 만수가 타고 있는 썰매는 백수형이 일부러 대장간까지 가서 사온, 스케이트 날과 비슷한 모양을 한 무쇠날을 장착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단단하고 가벼운 소나무에 대못을 박아 만든 송곳 한 쌍까지 갖추었다. 동네 어느 누구도 아닌 백수형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썰매는 굵은 철사를 바닥에 대고 못을 박아 고정했고 철사조차 없이 나무로만 된 것도 있었다. 개운리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타고 놀 썰매를 만드는 데에 돈을 들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썰매 수십대가 출발하는 곳의 반대편 둔덕에서 불장난에 열중해 있었을 뿐이었다.

썰매에 탄 스무명가량의 선수들은 동네 어귀에 살며 맨 처음 썰매장을 만들자고 제안한 정재호의 출발신호에 따라서 시합을 개시했다. 우승자는 군고구마 세개를 상으로 받게 돼 있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승자라는 영예였다. 만수는 저학년이었고 힘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개운리 최고의 공학자이자 과학자인 백수형이 제작해준 썰매와 송곳이 가장 좋았기 때문에 속도는 빨랐다. 썰매날이 투트트트특 하는 소리를 내며 얼음 위를 지나가고 난 다음 철사줄을 댄 썰매들이 낑낑거리는 신음을 내며 뒤를 따랐다. 송곳에 찍혀 얼음이 하얗게 가루 져 공중에 날렸다.

오학년 최경재와 이학년 만수가 선두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경재는 외발 썰매를 타고 있었다. 학교의 교사 신축현장에서 철근을 훔쳐서 대장간에 가져다주면 도둑에게 썰매날을 한쌍 만들어주고 남는 쇠는 공임으로 제했는데 경재는 날을 하나씩 달아 두대의 썰매를 만들고 하나는 동생 덕재에게 주었다. 외발 썰매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해 만수 동갑인 덕재는 아직 제대로 타지를 못하고 있었다. 경재는 역시 학교 공사판에서 훔쳐온 각목으로 송곳을 만들기도 했다. 각목 송곳은 손에 쥐기에 너무 두껍고 무거웠다. 그 썰매, 그 송곳을 가지고 경재는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이던 중에 한번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경재가 여유있게 우승했을 것이었다. 나는 물론 불장난에 빠져 있었을 뿐 이런 사정을 몰랐다.

만수는 무릎을 꿇고 썰매를 타던 평소의 자세가 아니라 속도를 내기 위해 일어서서 기마자세를 취했다. 썰매는 천리마처럼 힘차게 달렸고 송곳은 채찍처럼 공중을 가르며 얼음을 찍어 속력을 가했다. 오합지졸 같은 다른 썰매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나는 불길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피하려다 썰매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제야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만수가 나를 향해 송곳을 들고 춤을 추듯 하며 뭐라고 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뭐? 뭐?

나는 귀에다 손을 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하지만 만수의 말은 들리지 않고 썰매는 철기병 군단처럼 무섭게 다가들었다. 경재는 입을 꾹 다물고 사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는데 선두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만수 혼자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왜?

—뭐라고?

얼음이 썰매에 갈리고 눌리고 송곳에 부서지며 차차착 하고 숨가쁜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이들의 입에서는 김이 솟아올랐다. 구경을 하던 아이들이 응원하는 소리가 커졌고 썰매들은 점점 가까이 왔다.

—왜? 왜?

말하는 순간 만수가 나를 덮쳤다. 눈밑이 따끔하더니 순식간에 불로 달군 송곳으로 지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까부터 비키라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만수의 송곳 끝에 달린 대못이 내 오른쪽 눈 아래를 정통으로 찔렀다. 조금만 옆으로 갔어도 눈알이 찔렸을 거다, 눈알 속에 뇌가 있는데 거기까지 찔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넌 죽었을 거다, 살아도 애꾸눈을 면치 못했을 거다, 하고 나를 둘러싼 형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했다. 피가 펑펑 솟아나왔다. 나는 불붙은 막대기를 든 채 우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비키라니까, 그렇게 말해도 모르고 서 있냐……

만수는 내 얼굴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눌렀다가 제 눈물을 닦다가 하면서 중얼중얼 말했다. 나는 계속 울고 또 울었다.

—너 있잖아, 집에 가서는 그냥 나뭇가지에 찔렸다고 해. 안 그러면 알지?

상처에서 피가 멎고 나서 만수는 시커먼 주먹을 내 눈에 들이대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수는 상으로 탄 군고구마를 내게 전부 다 주고 보는 앞에서 먹게 했다. 그걸 먹으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이었다. 먹지 않으면 나를 죽일 것 같았다. 나는 군고구마를 꾸역꾸역 먹었다. 볼이 맹꽁이처럼 부풀고 목이 미어지고 배가 터지도록 부풀어오르게 먹고 또 먹었다. 내가 만수를 무서워한 것은 그때 한번뿐이었다. 그때의 두려움과 수치심은 만수와 단 둘이 있을 때의 어느 순간에 우연히 되살아나곤 했다. 만에 하나, 그러니까 0.01퍼센트의 확률로. 그외의 시간에 내가 만수를 괴롭힐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단에 서기 시작한 지 십년 만에 나는 고향인 MM읍 남쪽에 있는 국민학교로 전근을 갔다.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어렵게 살았다. 교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선생’이라는 존칭으로 부르는 교사라면 국가가 신분을 보장하는 교육공무원이고 중산층인데 실상은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수준이었다. 치맛바람이며 촌지라는 것을 보기 힘든 시골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모아 집 장만하고 살림하고 애 키우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그나마 고향에는 도움을 받을 집안 어른들과 친척이 있고 쌀이며 채소 같은 농산물을 거저 가져다 먹을 수 있어서 살 것 같았다. 그와 함께 교육자로서 제대로 아이들을 가르쳐보자는 의욕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의욕을 꺾는 게 교사에게 부과된 잡무였다. 학업과 관련 없이 시키는 일이 끝없이 이어졌다. 근면저축운동이며 혼분식운동, 독서생활화운동처럼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것도 있었고 송충이 잡아오기, 곡식 이삭 주워오기, 잔디씨 훑어오기, 코스모스 모종 마을길에 심기처럼 지역 특성에 따라 학교장 재량으로 벌어지는 일도 있었다. 하필 위생관념이 유난스러운 교장이 부임해서 일주일에 한번 교사(校舍)전체 물청소, 사흘에 한번 유리 청소를 하도록 했고 운동장 청소와 공동변소 청소는 각 반이 돌아가면서 매일 하도록 했다.

‘용의검사’라는 것도 수시로 실시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손이 트거나 갈라져 있었고 콧물 묻은 소매는 때로 반질반질했다. 손톱은 시커멓고 옷 또한 빨래를 자주 하지 않아 더러웠다. 머리는 기계충으로 허연 분칠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으니 용의검사를 하면 안 걸리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다른 교사들과 의논해서 날이 따뜻해진 날 아이들을 데리고 인근의 냇가나 도랑으로 가서 옷을 벗게 한 뒤 물속으로 밀어넣었다. 때를 벗기기 위해서였다. 평생 처음 온몸을 물에 적신다는 아이들도 여럿이었다.

그런 중에도 반백년 교사생활에 잊지 못할 일이 하나 있다. 혼분식운동이 한창이던 때였다. 학교에서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을 흰쌀밥으로 싸오지 못하게 했고 음식점에서도 흰쌀밥을 파는 것이 금지됐다. ‘무미일(無米日)’이라 해서 일주일에 이틀 오전 열한시에서 오후 다섯시까지 쌀이 아닌 밀가루 같은 것으로 만든 음식만 먹도록 법으로 강제하기도 했다. 교장은 읍내 네개 초등학교에서 맨 먼저 혼분식운동 참여율 백 퍼센트에 도달해야 한다고 아침마다 교사들을 닦달해댔다.

점심시간마다 담임교사가 교실로 가서 아이들의 도시락을 일일이 검사했다. 일제히 도시락 뚜껑을 열게 하고 밥에 적절하게 보리와 콩 같은 잡곡이 섞여 있는지 보는데 밥 맨 위만 보리밥으로 살짝 덮어서 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도시락을 뒤집어보라고 하기도 하고 숟가락으로 파보기도 했다. 나는 검사 결과 기준에 미달된 아이들의 손바닥을 회초리로 따끔하게 세대씩 때렸다. 아이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경각심을 돋우는 의미에서 약간의 매질은 교육적 효과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손바닥을 맞은 아이들은 다시는 쌀밥을 싸오지 않았다. 나는 남들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어떤 분야에서도 내가 담임하는 반이 가장 높은 성적을 기록하기를 바랐고 그건 혼분식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반 아이들의 삼분의 일가량이 아예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단순히 도시락 싸오는 아이들을 기준으로 혼분식운동 참여율을 따지면 우리 4학년 6반이 제일 먼저 백 퍼센트에 도달했으나 절대적인 수치로는 칠십 퍼센트를 넘을 수가 없었다. 왜 우리 반만 도시락을 못 싸오도록 집이 가난한 아이가 다른 반보다 많은지 알 수 없었다.

신문을 보니 전국에서 서울의 초중고등학교가 제일 먼저 혼분식운동 참여율 백 퍼센트에 도달했다. 서울에서 쌀이 나는 것도, 밀 보리가 생산되는 것도 아니고 서울의 부모들이 가난하지 않거나 바쁘지 않거나 한 것도 아닌데. 교감은 교무실에서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게시판을 세워놓고 학년별 반별로 그래프를 그려서 매일 혼분식운동 참여율을 체크했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4학년 전체에서 우리 반만 빼고 참여율 구십 퍼센트를 넘던 날, 동료 교사들이 사환을 시켜 학교 앞 식당에 냄비우동을 제대로 팔팔 끓여 가져다달라고 주문을 하고 있을 때 나는 회초리가 아닌 몽둥이와 도시락을 들고 교실로 갔다. 머리가 팔팔 끓는 기분이었다. 도시락을 싸온 아이든 못 싸온 아이든 한명도 밖에 나갈 수 없다고 선포하고 앞뒤 문을 잠갔다. 유리창까지 닫게 했다.

—혼분식운동은 단순히 쌀에 다른 곡식을 섞어서 먹자는 운동이 아니다. 나라에서 범국민적으로 시행하는 국민성 개조 운동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칠십 퍼센트가 산이다. 벼농사를 지을 논이 부족하지만 이모작을 하면 보리나 쌀보리, 밀을 재배할 수 있다. 어차피 쌀만 먹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라는 취지를 가지고 있는 게 혼분식운동이란 말이다. 너희나 너희의 부모가 혼분식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은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농사를 짓는 너희 부모가 이모작을 하지 않는 것은 게을러서이다. 그런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가지고서는 단군 이래 반만년을 물려온 가난을 면할 수 없다. 보리밥도 못 싸오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고구마, 감자를 싸와도 좋다. 보리개떡이라도 싸오라는 말이다. 성의를 보여라, 성의를.

고구마, 감자가 혼식에 속하는지 분식에 속하는지 혼분식운동을 만들어낸 높은 분들이며 교장, 교감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때는 오월 중순이었고 보리도 밀도 나지 않고 고구마, 감자 역시 수확 전이었다. 읍내서 나고 자란 나는 그런저런 사정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아니 알 것까지 없었다. 쌀도 지난가을에 생산한 게 아닌가. 묵은 밀, 보리, 고구마, 감자라고 없겠는가.

도시락을 혼분식운동의 취지에 맞춰 제대로 싸오지 않은 아이들은 전과 같이 손바닥 세대, 도시락을 싸오지 않은 아이들은 손등을 세대씩 때렸다. 회초리가 아닌 몽둥이로였다.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이 뚜껑을 열자 교실 안은 반찬 냄새로 가득찼다. 도시락을 못 싸온 아이들은 평소처럼 밖에 나가서 공을 차거나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시거나 플라타너스 그늘에 앉아 꼬박꼬박 조는 짓을 할 수 없었다. 배에서 아무리 꼬르륵꼬르륵 무서운 소리가 나도 도시락을 싸온 친구가 밥을 먹는 것을 보며 앉아 있어야 했다. 혼분식운동의 취지에 맞는 도시락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봐두어야 했다. 나도 인간일진대 감정이 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가 흰쌀밥 위에 보리밥을 최대한 얇게 덮어 쌀알은 하나도 보이지 않게 하고 만일에 대비해 달걀 프라이까지 맨 위에 얹어 모범적인 보리밥으로 위장한 내 도시락은 정말 맛이 없었다. 하얀 쌀밥에 기름이 둥둥 뜨는 고깃국을 찾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교실은 밥 먹는 소리 외에는 떠드는 아이들 하나 없이 조용했다. 도시락을 못 싸온 아이들은 숙제를 해오지 못한 아이들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장마철에 바람과 홍수로 쓰러진 모를 보는 것 같았다. 한심하고 갑갑했다.

효과는 다음날 즉각 나타났다. 도시락을 못 싸오던 아이들 가운데 절반이 도시락을 가져왔다. 몇명만 더하면 구십 퍼센트를 넘을 수 있었다. 그러면 아예 백 퍼센트 달성이라고 교장에게 보고할 생각이었다. 그걸 가지고 누가 뭐라고 하면 멱살잡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은 아이들에 대한 몽둥이질은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아이가 구운 옥수수를 도시락이라며 가져왔다. 학교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동네인 산촌 개운리에 사는 김만수라는 아이였다. 수건도 아닌 책보 속에 책과 공책, 몽당연필과 함께 구운 옥수수를 그냥 넣어왔다. 양은도시락도 없느냐고 물으니 제 집에는 도시락이 하나밖에 없는데 학생은 셋이나 되어서 자신이 도시락을 가지고 오면 다른 형제가 도시락을 못 싸간다고 대답했다. 옥수수는 찐 것도 아니고 불에 넣어서 구웠는데 바싹 타서 시커멨다. 비쩍 마르고 길쭉한 만수처럼 옥수수도 마르고 비틀어질 듯했다. 그건 지난가을에 수확해 처마 밑에서 말리던 씨옥수수였다. 부모 몰래 가져온 게 틀림없었다. 내가 아무리 농사에 무지해도 농부는 종자가 든 자루를 끌어안고 굶어죽을지언정 먹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것을 훔쳐간 사람이 자식이라 해도 때려죽이려 들 것이다. 만수는 내가 기가 막혀 웃는 것을 노란 눈동자로 보면서 마주 웃었다.

내가 우리 반의 혼분식운동 참여율이 백 퍼센트라고 보고한 그날, 미국에서 수입한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을 학교에서 배급하게 되었다고 교장이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무상으로, 좀 사는 집 아이들은 유상으로 빵을 먹게 되었다. 나는 만수의 이름을 무상배급 대상자의 맨 앞자리에 써넣었다.

학교에선 미국에서 왔다는 신품종 옥수수 종자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라고도 했다. 달나라로 유인우주선을 보낼 수 있는 미국의 첨단과학기술로 새로 개량한 품종이었다. 심기만 하면 단시간에 엄청난 양의 옥수수가 달리고 알도 쓰잘데기 없는 우리 토종 옥수수의 두배는 되게 굵을 것이라 했다. 나는 교장이 침을 튀기면서 한 말 그대로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읍내 사는 아이들 중에는 기적을 일으키는 옥수수가 필요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만수를 따로 불러 남는 옥수수 종자 스무알을 모두 주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만수가 어둑할 무렵 집으로 찾아왔다. 저녁상을 잠시 물려놓고 밖으로 나오자 만수는 내게 짚으로 싼 뭔가를 두 손으로 쳐들어 공손히 내밀었다.

—그게 뭐냐?

—달걀입니다.

—달걀을 왜?

—집에서 키우는 암탉이 낳았습니다. 그걸 모아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선생님께 갖다드리라고 하셔서요.

—달걀은 사 먹으면 된다. 너희 집에서 먹을 것도 없을 텐데, 이걸 왜 여기까지 가져온 거냐.

그러니까 만수는 하교를 하고 집에 갔다가 제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다시 왔다는 것이었다. 엎어지면 깨질까 짚으로 달걀 열개를 꽁꽁 싸가지고 이십리 길을 달려왔다.

—할아버지가 사람이 은혜를 알아야 한다, 염치가 있어야 한다고 선생님께 갖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됐다, 너나 먹어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내가 달걀꾸러미를 도로 내밀자 만수는 손을 감추며 잽싸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닭을 드리고 싶지만 암탉은 알을 낳아야 해서요, 선생님. 장닭이 없으면 병아리를 못 깝니다. 아침에 일어날 시간도 모르고요. 그래서 달걀만 가지고 왔습니다. 그거 도로 가지고 가면 저는 할아버지한테 맞아 죽습니다.

내가 어이가 없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만수가 고개를 꾸벅하고는 말했다.

—맞아 죽지 않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만수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짚신보다 약간 더 길쭉한 달걀꾸러미를 들고 한동안 어둠을 향해 서 있었다. 고향의 학부형으로부터 생전 처음 받아보는 진심 어린 촌지였다. 들고 있는 손을 끝없이 부끄럽게 하는.

—아빠, 뭐 해?

아이가 불렀다. 하얀 형광등 불빛 아래로 날파리가 어지럽게 날아들던 그 저녁을 잊을 수 없었다.

 

—석수야, 미안하다. 형아가 잘못했다. 형아가 다시는 안 그럴게. 용서해다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신작로 길가에 플라타너스 한그루를 거느린 벽돌건물이 서 있었다. 아이들이 ‘수도’라고 부르는 상수도 가압장으로 우웅우웅 하고 사시사철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수도 뒤에서는 읍에 사는 힘 센 아이가 촌에 사는 아이들의 돈을 뺏기도 하고 거지가 잠을 자기도 했으며 아이들이 똥을 누기도 했다. 만수는 바로 그곳에서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파리처럼 싹싹 비비며 나한테 빌었다.

—싫어. 용서 못해. 너는 형아 아니야. 빨리 내 빵 내놔, 내놓으라고.

만수가 처음으로 급식빵을 받는 날이었다. 만수는 한달 전부터 내가 배고프다고 할 때마다 급식빵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달래는 척했다. 사실은 자랑이었다. 급식은 점심시간 전에 수업이 끝나 집에 가는 1, 2학년한테는 안 나왔으니까.

—이제 다섯 밤만 지나면 학교에서 급식빵 나눠주거든. 내가 우리 선생님한테 잘 보여서 일등으로 무상급식 대상자가 됐단 말이다. 급식빵은 노오랗고 부들부들하고 따뜻한 속살이 있어. 바깥은 고소한 갈색 껍데기가 싸고 있고 옥수수가루가 잔뜩 묻어 있다고. 그거 받거든 조금도 안 건드리고 그대로 너한테 가지고 올게. 급식빵이 이따만하니까 우리 둘이서 나눠 먹어도 배 터질 거야. 우리 먹고 남으면 옥희도 주자.

나는 도리질을 했다. 옥희는 빵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만수는 빵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나는 오전수업이 끝나자마자 우리가 만나기로 한 수도까지 가서 바람이 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