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 제3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작

 

2013년 대한민국, 우리가 선거하지 않는 이유

 

이영유

1988년생. 숙명여대 영문과 대학원 재학중. behappy11@hanamil.net

 

 

1. 우리는 선거하지 않음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우리는(도) 선거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피를 흘렸고 달렸으며 외쳤다. 그리하여 비록 혁명이란 이름은 얻지 못했어도 운동이란 이름은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도) 진지하게 선거를 했다. 날씨를 개의치 않았으며 (가령 하필 선거철에 때맞춰 발발한 천안함사건과 같은) 위협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오랜 선거의 역사를 갖지는 못하였어도 우리는(도) ‘민주적으로’ 투표를 한다고 말할 수는 있게 되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90년대 이후 선거철만 되면 언론매체는 연일 투표율 저하 상황을 수치스러운 어조로 보도하기에 바쁘다. 이번 선거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에는 거리가 선거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면, 이제 거리는 선거권을 행사해 달라고 부탁하는 ‘팸플릿’들로 가득하다. 선거일이 언제인지 알리는 일은 공적인 일이 되었고 심지어 복지의 일부가 되었다. 선거장소가 어디인지 알리는 일은 필수적인 일이 되었고 심지어 경찰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되었다. 지난겨울 내가 사는 신도시의 오래된 광장에도 ‘기호 1번, 기호 2번’을 외치는 사람보다 ‘투표하자’고 외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요즘에는 심지어 ‘누구’를 뽑느냐보다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투표율이 저하하는 이러한 상황을, 유권자의 게으름이나 권태로 보거나 후기 자유민주주의사회의 디스토피아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개개인의 자질을 검토하는 것은 냉소의 결과일 뿐이지 대안을 마중하는 일이 되지는 못한다. 개개인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나는 얼마든지 이 긴 글을 투표의 욕구를 끓어오르게 하는 미사여구와 교훈적인 어구들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후기자유민주주의의 부작용이라거나 ‘극도의 복지사회화로 인한 시민의식의 마비상태’라는 식으로 문제를 보는 것 역시 ‘정치적으로 거짓’이라고 말하려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이 일말의 진실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며, 따라서 악용될 소지와 의도가 다분한데다, 모든 정치구조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진실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주장을 단지 뒤집는 식으로 반응하여, 민주주의나 복지사회에 어떠한 결점도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진실은 ‘모든 조직 형식’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모든 곳에, 국가를 형성하는 모든 방식에 문제가 있다. 사실 진정한 문제는,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부인(否認)을 대리보충하기 위하여 끌고 오는 모든 언술들이 혼란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문제가 없는 체제’란 언제나 환상 속에서만 추상적으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유 구조 속에서만 기만적으로 존재한다. 정말로 진지하게 ‘조직 형식’의 문제 자체에 접근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조직 형식 속에서 문제를 경험해나가는 방식 자체를 조명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두가지 접근 방식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도덕성, 게으름, 권태 등의 비난이 후기 자유 민주주의의 논리적인 결말이라는 절망과 정확히 냉소적으로 공존하는 것은 단지 의견이 우연히 두개로 갈린 것이 아니라, 두 의견이 정확히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한쪽은 형식과 구조는 ‘정상’인데 사람들이 ‘부패’했다고 주장하고 나머지 한쪽은 모든 문제를 무작정 ‘민주주의’로 돌림으로써 형식과 구조가 ‘비정상’이며 동시에 ‘부패’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민주주의라는 명사 앞에 붙이는 접두사 ‘후기’와 ‘자유’가 보충하고 있는 뉘앙스다. 단지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여겨지므로 보다 안전하기 위해 ‘후기’와 ‘자유’를 붙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유권자’ 전체를 비난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보다 안전하게 ‘젊은 사람들은 투표를 안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문제를 보충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이것이 정확히 현재 보도국에서 하는 일이다. 특히 지난겨울의 선거 보도는 이전 선거 관련 보도와는 다른 한가지 새로운 생각을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특정 집단(물론 소위 ‘젊은이들’을 지시하는 것이 거의 명확해 보이지만)이 투표하게 된다면 선거 결과가 달라질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아직 후보자였을 시절 얼핏 보인 것이긴 하지만 이처럼 명백하게 드러난 적은 아직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고릿적부터 이어져 온 ‘세대 갈등’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번역하여 덧붙인다. 그러면 이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자연스러운 갈등의 일부가 된다. 이 둘 모두가 사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어쨌든 말을 함으로써 말을 하는 사람들 자신은 정당화되게 하는 기막힌 효과를 낼 수는 있다.

이와 같은 보충은, 둘 모두가 ‘구조와 형식’ 문제 자체를 왜곡하거나 적어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둘은 모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구조와 형식’을 ‘자연’과 혼동하거나 아니면 ‘기계’과 혼동한다. 둘 모두 실질적으로는 개입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세워 놓은 구조와 형식의 ‘본성’으로부터 그 개입하지 않음의 알리바이를 제공받는다. 후기 자유민주주의라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위해서 부도덕성, 게으름, 권태라는 도덕적 비난은 증거가 된다. 한편 이러한 도덕적 비난은 언제라도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상존하는 위험’의 형태로 위협적으로 예시할 수 있다. 이들이 전제한 ‘구조와 형식’이란 너무나도 딱딱한,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는 기계 같아서 인간이 그와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란 기껏 그 논리적 결말을 전망하거나 아니면 거기에 성실하거나 불성실하게 반응하는 양자택일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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