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장욱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2005년 문학수첩작가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소설집 『고백의 제왕』이 있음. oblako@hanmail.net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1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합니까? 정말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을 생각합니까? 목이 참 길고, 키가 껑충하니 크고, 무중력 공간인 듯 천천히 움직이는 그 동물을 제외한, 모든 것을 생각합니까? 가령 샤프펜슬이라든가 부처님 같은 것을? 또는 그 동물이 한가로이 거니는 아프리카의 초원이나 동물원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곳을 생각합니까? 대학 캠퍼스라든가 박물관 같은?
그럴 리가.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내가 말하면,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기린에 대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이죠. 이제부터 기린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라고요.
나는 대체로 정확한 발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귀는 정확하게 내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기린이 아닙니까? 그 기린은 산책 중일지도 모르고, 배가 고파 아카시아의 잎사귀를 베어 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암컷의 등에 올라타고 교미 중일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긴 목을 칼처럼 휘두르며 다른 기린과 싸우고 있는지도.
물론 나는 그 기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건 순수하게 당신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당신의 기린이니까요.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명이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우스운가요? 하지만 믿어주십시오. 나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내 말이 거짓말이라 해도, 그건 진심을 다한 거짓말입니다. 전력을 다한 거짓말입니다. 지금 아름다운 기린 한마리가 당신의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그 기린은 하늘하늘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증거입니다. 그 기린은 지금 어디까지 갔습니까? 멀리 사라지고 있습니까? 긴 목을 돌려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거기 황혼이 지고 있나요?
그래요. 그것이 나의 운명입니다.
2
나는 언제부터 그런 이야기에 탐닉한 것일까요?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에 말입니다. 초등학교 때 파출소에 가서 “저는 담임선생님이 내 짝을 만지고 더듬는 걸 보지 못했어요”라고 말했을 때부터였을까요? 젊은 경찰관 아저씨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날 오후부터……?
그래요. 그건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봄날, 방과 후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란도셀을 멘 채 학교 앞 파출소의 무거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처럼 얼굴이 희멀겋고 의협심이 넘쳐 보이는 경찰관 아저씨가 앉아 있더군요.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보다 한참 어린 의경이었고, 인생의 역경이라는 것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게 틀림없는, 그런 청년이었습니다만.
그는 철제책상에 앉아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학교와 반과 담임선생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학교와 반과 담임선생님의 이름과…… 모든 것을요. 내 짝은 예쁘고 착한데다가 장학사님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경찰관 아저씨가 묻는데 감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이 말입니다.
아저씨가 내 말을 적어가는 동안, 나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 하얀 구름이 떠 있었어요. 다시 보면 전혀 그곳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아무것도 닮지 않은, 그저 구름일 뿐인, 단순한 구름이었습니다. 이상하게 그 흰빛이 기억에 오래 남더군요.
내가 파출소를 찾아간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담임선생님이 교실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장과 싸우고 그만뒀다, 무슨 교내 스캔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자살했다, 그런 소문들이 아이들 사이에서 떠돌았습니다. 하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이들은 사라진 담임을 여전히 ‘반(半)대머리’라고 불렀고(“반대머리 어디 갔냐?”는 식으로), 나는 평소처럼 조용하고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생활기록부에는 언제나 ‘품행이 방정하여 타의 모범이 됨’이라고 쓰여 있었지요. 품행이 방정하다는 건 어딘지 안 좋은 표현 같았습니다. 방정맞은 아이라는 뜻인가?—생각하곤 했으니까요.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말하더군요. 엄마가 일찍 죽고 아버지와 둘이서 살아온 탓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뒷자리 까까머리도, 동네 방앗간 할머니도, 심지어 오락실 아줌마가 기르는 개새끼까지 말입니다. 그래요. 그건 확실히 방정맞은 말입니다. 품행도 언행도 방정맞은 자들의 수군거림입니다. 왜 남의 집 가정사를 시시콜콜 들먹인단 말입니까?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만,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맹목적인 증오심을 가진 아이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달랐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라니, 적의라니, 애들이 아직 어려서 그렇구나. 아버지가 없다면 자기들도 없었을 텐데……
3
그 시절, 아버지는 귀가한 뒤 언제나 구석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녁 먹을 때 외에는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고독한 남자였어요. 인생에 대해 별다른 욕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말이 없고, 여자도 만나지 않고, 고기도 먹을 줄 모르고, 술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식물성 인간이랄까요. 욕망이라든가 의욕 같은 것과는 무관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나에게조차 별 관심이 없었을 정도니까요. 유일한 낙은 담배였습니다. 담배만은 미친 사람처럼 피워댔지요. 세상의 모든 식물들을 다 태워 없앨 것처럼 말이죠. 승려를 그만둔 뒤부터 그랬다고 했습니다.
승려요? 아, 스님, 스님 말입니다. 머리를 빡빡 밀고 회색 두루마기를 걸친, 바로 그 스님이요.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명문대학을 중퇴하고 한때 출가를 했던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저로서는 이해가 잘 안됩니다.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게 내 아버지라니,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니까요.
아버지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찰의 전도유망한 승려였다고 하더군요. 여자를 만나 나를 낳고 환속할 때까지는 말입니다. 세속을 떠났다가 다시 세속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자 때문에 말이죠. 아버지는 해탈보다 사랑을 택한 것일까요? 온 우주를 깨닫고 자신이라는 지옥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보다, 겨우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이 중요했던 것일까요?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물어보지 않았으니까요. 우주니 해탈이니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사실 사랑이란 건 애써서 가보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까? 무지개나 구름 같은 것 말입니다. 너무나 선명하면서도, 선명하기 때문에,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 심장을 쥐어뜯게 만들다가도,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보면 그게 뭔지 도무지 아리송해지는……
그 여자는, 제 어머니 말입니다만, 금방 사라졌습니다. 원래 몸이 약했고, 폐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절에 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봄날처럼 밝고 환한 여자였다고 하더군요. 우울해하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해주기까지 했다니까요. 대체 누가 아픈 사람인지 모를 정도였다고 아버지는 회고했습니다. 그런 건 천성이자 일종의 능력이지. 주위의 공기조차 갓 핀 산수유처럼 신선해졌으니까……라고도 했습니다. 그토록 화사한 사람이 폐에 구멍이 뚫려 있다니, 호흡곤란을 겪어야 하다니,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힘들어 해야 하다니……
그 여자가 나를 낳은 뒤 거짓말처럼 문득 사라지더라는 것은 아버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나는 가슴이 아프지도 않았다. 그 여자는, 네 어머니 말이다만,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으니까.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것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건, 어린 나 역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조용히 저잣거리로 돌아왔습니다. 늙은 어미의 집에, 내 할머니 말입니다만, 나를 맡겨둔 채 일을 나갔습니다. 공사장을 쫓아다니기도 했고, 도배 시다바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들이었죠. 아버지는 언젠가 말했습니다. 이 일들이 좋다. 이 일들은 단지 그것 자체일 뿐이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고 진실도 필요 없다. 사랑이니 열정이니 하는 것도 불필요하다. 그것이 좋다……
아버지는 점점 외로운 사내가 되어갔습니다. 친구도 없었고 취미도 없었습니다. 단지 담배만을 피울 뿐이라는 듯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듯이, 그렇게 담배를 피워댈 뿐이었습니다. 나를 구석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도 방안에 가득 배어 있는 그 냄새 때문이었죠.
하지만 또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의아했습니다. 담배연기로 가득한 방에서 밤마다 틱틱, 소리가 났으니까요. 뭔가 기계를 두드리는 소리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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