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오늘, 세계문학을 다시 읽다

 

‘세계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백년의 고독』을 중심으로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저서로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공역서로 『한 여인의 초상』(근간) 등이 있음. yoohuisok@yahoo.com

 

 

1. 말문을 열면서

 

근년 영미의 인문학계에서 ‘세계문학’ 담론이 부쩍 활발해진 데는 아스뚜리아스(Miguel Ángel Asturias, 1899~1974)의 『옥수수인간』(Hombres de maís, 1949)이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라틴아메리카의 ‘붐(Boom)소설’1) 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서사의 혁신을 이룬 붐소설을 서구의 고전과 견주면서 문학을 바라보는 시야가 그만큼 넓어진 결과다. 하지만 세계문학 담론의 실상에 관한 한, 각국의 문학을 탐구하는 방법론으로 ‘디스턴트 리딩’을 제창한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의 연구방식이 말해주듯이 엄밀한 비평적 판단보다는 지식의 전지구적 축적에 골몰하는 풍토가 학계의 대세를 이룬 느낌이다.2) 각국의 문학전문가들을 동원하여 문학형식의 ‘표준해설모델’을 만들어내려는 모레띠 식의 실증적 연구는 그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지역을 간과한 채 세계문학의 영토 확장에 치중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3)

그런 위험성을 다각도로 성찰하는 작업에 가르시아 마르께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27~)의 『백년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 1967)만큼 맞춤한 작품도 찾기 어려울 듯하다. ‘붐’의 숱한 문제작 가운데서 이 장편서사처럼 확실하게 지역 특유의 토속성을 세계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사례도 드물다는 뜻에서다. 이 글은 그러한 『백년의 고독』과 대면하려는 시도이다. 논의는 먼저 붐소설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나서 『백년의 고독』으로 들어가겠다.4)결론은 이 장편이 도달한 소설적 성취의 성격과 그 현재성을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일원으로서 한국문학이 안고 있는 과제와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2. 라틴아메리카와 ‘경이로운 현실’

 

모든 위대한 작가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이 전체를 이루는 양상은 작가마다 제각각인 법인데, 가르시아 마르께스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는 그의 방대한 작품세계에서 시기별로 몇몇 텍스트를 선별해서 읽어봤을 뿐이지만 비판적 사실주의에서 출발한 서사의 여정이 ‘아메리카의 경이로운 현실(내지는 실재)’(lo real maravilloso americano)로 향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술적 사실주의와 짝을 이루는 ‘아메리카의 경이로운 현실’은 꾸바의 작가 알레호 까르띠에르(Alejo Carpentier, 1904~80)가 『이 지상의 왕국』(El Reino de Este Mundo, 1949)에 부친 서문 형식의 평문5)에서 처음 썼다. 1930년대 빠리를 근거지로 삼은 초현실주의(운동)에 가담한 바 있는 까르띠에르는 중국아랍권쏘비에뜨 연방을 차례로 둘러본 소감을 배경으로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역사 및 미()와 추()로 가득한 토착현실을 환기하면서 서구 전위주의와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문학의 원료들과 그 창조적 가능성을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의 자연과 역사는 서구에서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상상력의—그가 보기에 다분히 관념적인—실험 같은 것이 전혀 필요치 않은, 마르지 않은 “신화들의 보고(寶庫)”이다. 작가의 사명은 서구의 ‘전위’로 눈을 돌리는 대신 아메리카의 바로 그 살아 있는 현실을 천착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초현실주의를 상아탑주의와 다를 바 없는 인위적인공적 실험으로 규정하면서6) 그에 맞서는 개념으로 ‘바로끄’를 제시한 그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말을 지어낸 1920년대 독일의 미술비평가 프란츠 로(Franz Roh)와도 거리를 둔다. 그는 “마술적 사실주의와 경이로운 현실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조작된 신비”에 불과한 전자가 사실상 정치적 뇌관이 제거된 예술임을 비판하는 한편,7)후자와 관련해서는 15세기에 에스빠냐 식민주의자들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맞닥뜨린, 온전히 이해할 수도 해명할 수도 없는—적어도 그런 의미에서는 식민화가 불가능한—“그 장대함과 기이함”을 부각시켰다.8)

하지만 여기서 마술적 사실주의 담론을 둘러싼 숱한 갈래의 이론들을 다룰 여유는 없다. 다만 마술적 사실주의에 대해 서구 제국주의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한 이성주의과학주의를 전복하는 진보적 서사로 규정하는 통념에 일정한 교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다. ‘마술적’이라는 형용사가—중국의 작가 모옌(莫言, 1955~)에게 따라붙는 허환(虛幻)적 또는 마환(魔幻)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겠지만—사실주의의 확대고양을 가리키는 건지 아니면 사실주의와의 결별 내지는 단절을 뜻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짚어둠직하다. 전자라면 한국의 평단에서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요구한 작품의 경지에 당연히 부합하는 것이며 또한 후자라 할지라도, 재현주의로서의 사실주의를 지양할 것을 고집한 민족문학의 리얼리즘론과 본질적으로 구분된다고 보기 어렵다.

‘마술적’이든 뭐든 그 한정사는 리얼리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리얼리즘의 어떤 속성이 이렇게 저렇게 발현되는 하나의 양태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파악도 리얼리즘을 본질화하거나 해체에만 골몰하는 일체의 언설들과의 싸움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리얼리즘의 또다른 형이상학을 만들어내기 십상이다.9) 이 땅의 리얼리즘론은 그 나름의 이론적 전진과 축적을 이룩해왔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의 실행에 근거를 둠으로써만 리얼리즘론도 이론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꿈’이나 ‘비현실적’ 요소가 나오면 무조건 ‘마술적 사실주의’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 평단을 신랄하게 꼬집은 라틴아메리카문학 전공자의 발언10)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이름으로 너무 쉽게 작품을 긍정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음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그 점에 대한 하나의 방증으로는, 붐소설의 진정한 계승자 가운데 한명인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이 마술적 사실주의를 형식주의적 설명틀에 불과하다고 일축한 대목을 제시할 수도 있다.11) 물론 마술적 사실주의의 예로 거론되는—전지구적으로 분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20세기 후반—작품들의 존재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아메리카의 경이로운 현실」로 돌아가보자.

일종의 선언으로 제출된 까르띠에르 평문의 의의는 두 (연관된) 차원에서 좀더 엄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선언의 진정한 의의가 선언 그 자체보다는 『이 지상의 왕국』이라는 작품으로 구현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까르띠에르가 역설하고 예견한 ‘경이로운 현실’도 구전(口傳)예술의 영역과 분리될 수 없으며, 라틴아메리카문학의 ‘붐’에서 그런 영역의 소설화가 종합적인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그 붐의 정점에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있었다.

꾸바혁명의 기운이 주변지역으로 퍼져가는 데서 더욱 기운을 얻은 붐소설은 서구 리얼리즘 및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으로부터의 탈피를 상당부분 이뤄냈다. 그리고 그런 탈피는 서구의 서사 유산을 국지적 현실에 맞춰 실험적으로 변용하고 새롭게 창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 점은 가르시아 마르께스 문학의 궤적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가령 초기작인 「죽음의 저편」(“La otra costilla de la muerte,” 1948)을 비롯해 다인칭 관점이 동원된 중편 「낙엽」(“La Hojarasca,” 1955)이나 비판적 사실주의의 정수를 보여주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 1958)만 봐도 그가 전통적인 사실주의 양식에 짙은 토속성을 얼마나 능숙하게 담아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실험의 양상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백년의 고독』도 선행한 작품들에서 나온—돌연변이에 가까운 진화를 수반한—소설적 성과임을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