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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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형 尹異形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 『큰 늑대 파랑』이 있음. janejones@naver.com

 

 

 

윈, 캠프 루비

 

 

플레이리스트가 또 한바퀴 돌았다. 홀을 채운 사내들의 왁자한 목소리 사이로 귀에 익은 전주가 작은 사탕처럼 구르며 퍼져나갔다. 저 노래. 위스키를 다섯잔이나 들이켠 건 아마도 저것 때문일 거라고 진우는 생각했다.

그 곡은 한세기 전쯤 지구에서 히트한 팝을 마구잡이식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뒤섞어놓은 선곡 한가운데 끼어 있었다. 진우의 부모의 부모가 태어나기도 전, 아직 나노봇이 여배우들의 얼굴에 얼어붙은 아름다움을 무차별 폭격하기도 전에 고전적인 방식으로 촬영된 할리우드 청춘영화에 삽입된 곡이었다. 고등학교 이야기였던 것 말고는 스토리도 기억나지 않고, 눈부시게 젊은 한쌍의 남녀가 파티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주위 청춘들의 코가 납작해질 정도로 근사한 댄스를 선보이던 장면만 어제 본 것처럼 선명했다. 이제는 천국에서 춤추고 있을 여배우의 이름은 엠마 왓슨, 함께 스텝을 밟던 남자 배우의 이름은 이즈라 밀러. 그 장면에 흐르던 노래였다. 분명히 찾아 기억했던 곡목과 밴드 이름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 밴드의 오리지널 앨범을 찾아 듣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젊은 시절에 해보려던 숱한 일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 계획은 수첩 한귀퉁이 낙서로만 짧게 남았고 진우는 결국 그들의 앨범을 들어보지 못한 채 지구를 떠났다.

진우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린이 앉아 있던 자리에 선뜻 와 앉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갈게요. 샐러드를 몇입 먹은 린이 그렇게 말하고는 언제나 쓰고 다니는 낡고 검은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숙소로 올라가버린 게 몇시간 전이었다. 요리 담당인 재니스와 메이메이를 제외하면 죄 남자뿐인 회식자리였으니 쏟아지는 시선과 질문을 받아내는 일도 부담이었겠으나 그게 전부였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오후에 있었던 보고회의에서 J&L재단 이사장이 던진 질문이 진우의 머릿속을 빙빙 돌며 두통을 자아냈다. 그런데, 다른가? 저들에게 사지가, 머리처럼 생긴 게 달려 있다는 사실이 일을 어렵게 만드나?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는 거요. 외형상 우리와 조금이라도 가까우면 연민이나 측은함이 커지는지, 난 그냥 그게 궁금해서 말이지.

그 질문은 린을 향한 것이었다. ‘외계생명학개론’ 첫 수업시간에 토의 주제로 나올 법한 그 가치중립적인 질문 자체엔 문제가 없었다. 사실 린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 진우 역시 이사장이 묻기 한참 전, 캠프 루비에 도착해 첫 브리핑을 받던 순간부터 그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들이 맞닥뜨려온 생명체들은 물론 진우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어떤 종족은 가장자리를 따라 못처럼 생긴 촉수가 달렸다는 점이 다를 뿐 아이들 장난감인 프리스비를 꼭 닮은 생김새였는데(진우로서는 도저히 다른 비유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들은 날면서 셋씩 겹쳐 짝을 짓고 후대를 생산했다. 반투명한 정육면체 몸 안에 검은 젤리 모양의 뇌수를 지닌 수륙양생 종족도 있었다. 그들은 일생 동안 물속을 자유롭게 떠다니며 살다가 때가 되면 육지와 바다의 경계로 올라와 자신들의 몸을 벽돌처럼 쌓음으로써 후손들이 살아갈 도시의 일부를 이루고 생을 마감했다. 어떤 종족은 그저 허공을 부유하는 가느다랗고 시커먼 그을음처럼 보였다. 어떻게도 인간과 연결짓기는 어려워 보이는 그 존재들을 접하자마자 그들의 터전을 무너뜨리는 작업이 반복되는 동안 진우는 드레이크 방정식을 처음 배웠던 초등학교 때부터 알게 모르게 마음속에서 자라난 기대와 희망, 경이로운 것에 대한 존중이 가슴속에서 재로 변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마침내 기대의 마지막 부스러기 하나가 까맣게 사그라들어 낯선 대기에 실려갔을 때 진우는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우주의 모든 비밀을 창조한 신의 존재가 실은 주유소 앞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싸구려 비닐인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춰줄 어떤 차폐물도 없는 넓고 낯설고 황량한 땅이었다.

진우는 신의 그 처연한 마지막 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인류에게 먼저 접촉해올 외계 생명체가 인류보다 우월한 문명을 지녔으리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우주로 뻗어나간 인류가 먼저 발견한 그들이 지구보다 낮은 문명 단계를 지나고 있으리라는 가정에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벌을 받고 싶었다. 자신을 포함한 개발현장의 모든 인간이 그들이 성배처럼 내뿜는 빛에 의해 곤죽이 되는 장면을 상상했다. 어쩌면 그러기 위해 지구를 떠나왔는지도 몰랐다. 허나 그토록 쉽고 간단하게 지구산 쇳덩이에 밀려 무력하게 쫓겨나는 생명들이라니. 별들 사이를 순회하며 혹여나 어떤 생명체가 부당한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지, 무례한 침입자가 행성 주인의 땅을 허가 없이 갈아엎지는 않는지 감시하고 징계하는 인도적인 지성체는 우주 적응 프로그램 이틀째, 무중력 적응실 허공에 방금 먹은 점심과 함께 진우가 방울방울 토해내버린 유년기의 예쁘장한 동화로만 남았다.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진우의 상상 속에 살던 그런 지성체는 없거나, 너무 멀리 있거나, 그도 아니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너무 고매하고 형이상학적이어서 지구가 벌이는 방대한 토건사업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튀는 흙과 부서지는 바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냥 화염방사기로 둥지를 밀어버리는 게 어떻소. 그 편이 훨씬 간단할 텐데? 진우는 그렇게 묻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러나 자신과 비슷하게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그 사내, 멱살을 잡아올리면 허공에서 몇번 허우적거리다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을 듯한 왜소한 체구의 이사장 앞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압도되었다. 여러 행성을 다녀봤으나 행성의 소유주를 직접 대면한 건 처음이었다. 옛 인류와는 별로 상관없는 삶을 살며 우주를 부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자신과 같았으나 그 사내에겐 마치 단단하게 뭉쳐진 광석처럼 주위의 모든 산만함을 제압하는 눈빛이 있었다. 윈프레드 멘데스는 겨우 스물네살의 나이에 주얼 앤 라이프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고, 회사 재정이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서 당시만 해도 비웃는 사람이 많았던 초광속추진기 개발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하여 몇몇 주요 기술을 독점계약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뒤집혔다. 그는 이제 지구의 보석 재벌을 넘어 자신의 이름을 딴 윈, 프레드, 멘데스를 비롯해 총 여섯개 행성에서 진행 중인 개발작업에 절반 이상의 돈을 대는 걸어다니는 거대 자본이었다. 정작 질문을 받은 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대답했을 뿐이다. 아뇨, 어떻게 생겼든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연민이 뭐죠?

평소라면 곧바로 그녀를 따라가 잠드는 것까지 확인했을 테지만 그날 진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안심해서도 자포자기해서도 아니었다. 해묵은 자기모순을 확인했다는 자각 속에서 그는 그저 조금 흐트러지고 싶었다. 그야말로 비효율적인 밤이었다.

라인 3팀인가 4팀의 팀장을 맡고 있다는 아이슬란드 출신 남자는 알고 보니 타고난 술꾼이었다. 두툼한 손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집게로 얼음을 잔에 담고 꿀 빛깔의 술을 따를 때마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는 잔을 살짝 흔들어 진우에게 내밀었다. 뭐라고 한 거죠? 진우가 묻자 불콰해진 얼굴의 그는 느린 영어로 대답했다. 꿈 없이 깊은 잠에 들기를. 우리 어머니가 잠자기 전에 늘 해주시던 기도예요. 그는 부스럼이 올라온 팔을 습관적으로 긁었다. 이곳의 많은 사람처럼 그도 포자 알러지로 고생하고 있었다. 작업복 허리띠를 조금 늦춘 그가 스테이크를 썰어 포크에 찍어서는 마치 아이에게 하듯 진우의 입에 가져다 댔다. 먹어요. 마셔요. 푹 자요. 꿈 없이. 그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해서 수염이 듬성듬성 난 그의 턱이 움직이며 빚어내는 짧은 명령문이 시키는 대로 진우는 술을 받아마시고 고기를 씹어 삼켰다. 술에서는 평생 위스키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결국 그러지 못한 방향제 같은 맛이 났고 돼지고기 안심 맛이 나게 할 목적으로 소스를 과도하게 쏟아부은 합성육 스테이크는 너무 질겼다. 모두가 억지스럽게 옛날을 상기시키는 조잡하고 얕은 맛이었다. 그러나 홀을 가득 채운 수백명의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진우 또한 어느새 그 음식들이 빚어내는 싸구려 향기에 휘감겨 팔과 다리가 나른해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테이블 끝에 앉은 남자가 잔에 고개를 거의 처박다시피 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보였다. 옆 테이블에서는 하키와 축구 얘기가 한창이었고 한쪽 뺨이 알러지로 붉게 부어오른 남자는 대화의 흐름에는 아랑곳없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내가 옛날에 길에 버려진 고양이를 세마리나 주워다 길렀단 말이야. 이름? 맞춰봐. 돈, 권력, 명성. 마지막 놈은 여자라고 붙이려다 관뒀지.

유령들이로군. 우린 모두 유령들이야. 마치 바로 어제 지구에서 건너온 듯, 이제 그곳에 돌아가도 자신들이 알던 것들은 이미 죽어 사라진 지 오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힘을 얻는 사람들을 보면서 진우는 ‘근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섬뜩함에 현기증을 느꼈다.

아이슬란드 사내가 술을 한잔 더 따르더니 몸을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파트너. 그녀, 괜찮나요? 신나게 떠들어대던 옆자리 남자들이 일순 조용해지며 그들의 눈길이 진우에게로 향했다. 당신이 그녀의 친척이라던데 정말이에요? 이번에는 옆 테이블 사람들까지 고개를 돌렸다. 그럴 만도 했다.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인 철거작업이었다. 몇달간 지루하게 이어지던 작업의 끝에 긴장을 풀라고 마련된 오랜만의, 그리고 진우와 린이 도착한 뒤로는 처음 있는 회식자리였다. 사람도 됩니까? 그러니까, 그녀가 당신 마음도 읽어요? 아이슬란드는 정상적인 호기심과 성욕을 지닌 홀 안의 모든 사내를 대변해 묻고 있었다. 피부색과 나이와 출신국과 살아온 배경은 제각각이나 궁금한 것은 비슷할 캠프 루비 소속 피고용자들의 얼굴을 진우는 흐릿한 눈으로 훑었다. 그들이 악몽을 꾸지 않도록 최후의 궂은일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은 손톱만큼의 우월감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실상은 그들과 그리 다를 것도 없는 처지, 행성에서 또다른 행성으로 두마리 나방처럼 날아다니며 주어진 일을 할 뿐인 계약직 노동자에 불과했음에도 린은 어디서나 신비에 휩싸인 여신이었고 진우는 어린 여신을 모시는 수수께끼의 그림자였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녀는…… 대답하려다 진우는 멈칫했다. 일어나야 할 타이밍이 한참 지나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일어서는 진우의 뒤통수에 여기저기서 불만과 탄식, 야유가 섞인 웃음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청결한 침대시트를 마주하고서야 취기가 조금 가셨다. 샤워를 하려다 정신이 들어 진우는 린의 방문을 두드렸다. 몇번을 노크했으나 대답이 없어 비상용 카드로 문을 열었다. 책상 위에 놓인 린의 PDA에는 진우의 호출기록이 몇시간 전부터 미확인상태로 남아 있었다. 진우는 자신을 타이르며 린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외부로 통하는 출입문은 모두 꼼꼼히 통제되었고 린의 카드에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코드가 없었다. 연락 없이 멀리, 말하자면 뛰쳐나가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린은 그럴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 정말 그럴까? 몇벌의 옷가지와 들춰보지 않은 채 여기저기 흩어진 캠프 루비의 공식 홍보용 팸플릿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린의 방은 진우의 방과 똑같았다. 실용만을 의도해 최소한으로 꾸려진 그 순백색 방에 앉아 있자니 자신과 린이 함께 보낸 시간 또한 방과 함께 사용하라고 받은 일회용품처럼 느껴졌다.

진우는 문득 어떤 단어를 떠올렸다. 모든 공식 문서에 그는 린의 보호자로 표시되었다. 보호하는 사람. 그녀의 정신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얘기를 들어주고 등을 두드려주는 사람. 그러나 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그녀의 마음을 지켜줄 수 있나. 린은 기계가 만들어준 부모가 실은 가상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충격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 대해 일종의 존경심을 품었는데, 그것은 선정을 펼치다 명예롭게 퇴임한 전직 대통령에게 성실한 시민이 품는 일반적인 호의와 비슷했다. 진짜 부모로 말하자면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조차 린은 알지 못했다. 진우는 괴로워하는 그녀의 어깨를 안으며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넌 혼자였고 너무 어렸어, 따위의 흔해빠진 대사를 중얼거릴 기회도 없었는데, 우선 그녀는 좀처럼 괴로움을 토로하지 않았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잘못과 잘못이 아닌 일에 대한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일반적인 상식과 크게 달랐다. 이를테면 행성 클라리스의 캠프 토파즈에서 아침식사 시간인 아침 여덟시보다 한시간 일찍 텅 빈 식당으로 내려갔을 때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훌쩍훌쩍 울었으나, 파도 위에 합성 콜라를 쏟아부으며 죽어 떠오른 울머버그 유충 한떼가 이끼처럼 흔들리는 광경을 보면서는 재미 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식이었다. 그녀는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거나 유추하지 못했고 그것을 요구받는 순간이 오면 모자를 눌러쓰고 침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어쩌면 린의 정신에 있어 무너져내린다는 표현은 보통 사람의 경우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며 사람이면 누구나 필요로 하는 감정의 교류나 대화가 그녀에게는 외려 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에 보통 열다섯살 소녀 같은 부분이 조금도 없으리라는 가정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우는 다만 그녀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을 뿐이었다.

방문이 조용히 열린 건 그대로 한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괜찮아요? 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렇게 물은 건 린이었다. 잠이 안 와서 운동 좀 하고, 샤워하고 왔어요. 물기 어린 긴 머리카락이 린의 새하얀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손에는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합성우유가 담긴 플라스틱 컵이 들려 있었다. 운동?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안 왔니? 응. 린이 짧게 대답하고는 배고픈 사람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썸바디 좀 줄래요?

그게, 필요해? 진우는 바보처럼 물었다.

응. 두알, 아니 세알만 줘요.

세알?

응.

왜?

린이 대답 대신 웃음 비슷한 것을 지었다.

한알 이상은 안돼.

진우가 약을 건네자 린은 뾰로통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우유 한모금과 함께 삼켰다. 자신의 방을 낯선 듯 잠시 둘러보던 린은 우유를 불어가며 끝까지 마신 다음 트레이닝복을 벗기 시작했다. 한순간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는 것 외에 진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진우가 겨우 내뱉었다. 새하얀 속옷 차림이 된 린이 그의 무릎에 올라앉았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난…… 나, 피곤해요. 너무 열심히 달렸나봐.

괜찮은 거야?

좀 안아주지 않을래요?

린이 웃고는 진우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뜨거웠고, 차갑게 젖은 머리카락은 도자기로 만든 풍경처럼 흔들리고 있어 진우가 안은 팔에 조금만 힘을 넣으면 찰그랑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린의 손이 무방비하게 드러난 진우의 쇄골을 쓰다듬고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갔다. 휘감았다. 감싸 쥐었다. 랩 댄스. 음악 없이. 클럽 루신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미처 거절할 겨를도 없이 진우에게 다가와 안겨들며 추었던 그 춤이었다. 어린 짐승처럼 파고드는 그녀에게 반응해 자신의 몸 일부도 하릴없이 뜨거워지는 것을 깨닫자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보호한다는 꿈. 다치지 않게 해주겠다는 꿈. 돕는다는 꿈. 누군가를, 구한다는 꿈. 그런 것들은 말 그대로 그저 꿈이었다. 깨끗이 부서지는 대신 잊힌 채 천천히 숨이 멎어버린 꿈들.

난 하지 않았어. 그 아이는 가끔씩 내게, 요구했어. 그랬지만, 그래도, 난 하지 않았어. 그 아이는 내 환자였고, 내게 어떤 의미에서는…… 가족이었으니까. 실패한 과거 말고는 먹을 것도 말할 것도 없는 자들이 둘러앉아 그럼에도 자신 역시 한때는 순수했노라는 열변을 토해내며 이어가는 자위의 향연. 그 비린내 나는 후일담의 환영 속에서 유치한 대사를 중얼거리는 진우 자신의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옆에 있던 환영 속 누군가가 그를 툭 치며 웃었다. 에이, 형씨, 웃기지 마쇼. 어떤 상담사가 열다섯살 여자애한테 날마다 그런 약을 주는데? 가족? 어떤 아버지가 딸한테 그런 일을 시키냐고?

푹 자요. 꿈 없이. 그러나 신경안정제에 취해 이완되기 시작한 린의 몸을 필사적으로 밀어내는 동안 진우의 정신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 또렷함은 점점 좁고 가늘어지더니 하나의 멜로디가 되어 머릿속을 떠돌았다. 또다시 그 노래였다.

어떤 오후. 젖은 붓으로 칠한 것처럼 이리저리 번져 디테일이 지워진 얼굴들. 남자와 여자. 옛 동료들. 오랜만의 휴일이었다. 거실에서 엠마 왓슨이 나오는 그 오래된 영화를 함께 본 후 그들은 가볍게 저녁을 먹고 차와 술을 마셨다. 많이 웃었고 많이 떠들어댔다. 영화 속 장면을 흉내 내 우스꽝스러운 춤도 추었다. 그들이 도우려 했으나 그전에 목숨을 끊고 만 사람들 얘기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위도, 얼어붙은 수도도, 끊긴 전기도, 부서진 집의 잔해도, 이리저리 기워붙인 이불과 함성과 기도와 울음과 움켜쥔 주먹과 계속되던 노래도, 아늑한 거실 식탁의 화제 근처에도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대화의 끝에 누군가가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정말, 왜 안 오지? 올 때가 한참 지났잖아. 우리가 이렇게 기다리는데. 누구? 누가 또 오기로 했었어? 멍한 얼굴로 그렇게 물은 건 진우였다.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기억 속 누군가가 중성적인 음성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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