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핵 그림자에 덮인 한국의 정전체제

전쟁도 평화도 아닌 60년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세계적 전문가이며, 2007년 후광김대중학술상을 수상했다. 국내 번역 출간된 저서로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대학과 제국』 『김정일 코드』 『미국 패권의 역사』 등이 있다.

 

 

2013727일 한국전쟁이 휴전한 지 60년이 되었다. 휴전은 단지 교전을 중지한다는 합의에 불과한 것이지 평화조약이 아니므로 전쟁을 최종적으로 끝내지는 못했다. 따라서 휴전의 주된 유산은 평화가 아니라 남북한에 더하여 미국까지 가세한, 엄청난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끊임없는 위협이다. 20134월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B52B2 스텔스 폭격기를 파견해 남한의 섬들에 모형폭탄을 투하했으며, 미 국방부는 이 비행기들이 ‘핵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온 세계에 알렸다. 그 무렵에 서울의 군당국자들은 평양의 어떤 창문에도 명중이 가능한 순항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고 언론에 밝혔는데, 그것은 북한 지도부를 제거하겠다는 암암리의 위협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 위협은 격앙된 언사를 동원한 평양의 거친 공세—특히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미국을 향해 발사하겠다는 위협—에 대한 대응이었다. 물론 북한은 몹시 화가 나 있다. 그들은 적을 비난하고 조롱하며 거칠게 위협한다. 북한은 종종 무례하고 분별없고, 어쩌면 미쳤을지 모른다는 인상을 준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그들이 일부러 보여주려는 이미지이다. 게임이론의 기본에 따르면 양쪽 다 핵무기가 있어서 상호파멸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그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교착상태에서는 이쪽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것을 기꺼이 사용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적의 심중에 심는 것이 핵심이다. 미친 것 같은 태도는 그런 상황에서 매우 유용하다. 이것은 또한 어느정도는 미 언론매체들이 조장하는 이미지이다. 그들은 항상 북한이 던진 미끼를 물고서, 다리를 곧게 뻗은 채 행진하는 병사, 굶주린 아이들, 흥분한 지도자와 전반적으로 과장된 평양의 군사능력 같은 끝없는 이미지들로 북한의 위협을 과대선전한다. 할리우드 역시 이제는 「레드 던」(Red Dawn, 1984)의 리메이크작(2012)에서 시작해 최근의 여러 영화들에 보이듯이 북한을 사납고 미친 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몇몇 경우 초기 씨나리오에서는 원래 중국이 적이었지만 할리우드가 중국에서 영화표를 엄청나게 팔게 되면서부터 북한의 미국 침략이 전혀 터무니없는 발상인데도 북한으로 적이 대체되었다.)

끔찍했던 한국전쟁의 폭력성과 그 여파를 살펴볼 때면 다른 그림이 떠오른다. 2006년에 첫 핵실험을 하기 전까지 북한은 비핵국가들 중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으로부터 핵무기 위협을 끊임없이 받은 나라였다. 그 위협은 전쟁 중인 1951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한 미국 언론의 논의는 사실상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다. 대다수의 미국인은 물론이고 이 분야에 아주 밝은 사람들조차도 사실을 전혀 모른다.1) 하지만 북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지평선에 걸려 있는 비유적이지만 상존하는 붉은 빛, 곧 미국 핵에 의한 순식간의 몰살이라는 주기적으로 되살아나는 유령과 함께 60년이나 살고 있다. 휴전은 미국의 핵위협을 배경으로 맺어졌으며, 그때 이래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1. 핵공갈

 

휴전에 이를 때까지의 몇달 동안 미국은 자신의 병기고에 있는 가장 큰 무기들을 위협적으로 휘둘러댔다. 1953526일 『뉴욕타임즈』는 최초로 대포로 핵포탄을 발사한 이야기를 대서특필했는데, 그 포탄은 네바다 주의 프랜치플랫(French Flat)에서 10킬로톤(혹은 히로시마 핵출력의 절반 이상)의 위력으로 폭발했다. 며칠 후 네바다 실험장에서 그때까지 폭발된 것 중에 ‘가장 강력한 핵폭풍’이 일어났다. 일부는 그것이 수소폭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네바다 실험은 적에게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것이 더 낫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인 핵공갈에 필수적이었다. 예전의 비밀문서들 역시 19535월과 6월에 아이젠하워 정부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망설이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려 했다는 점을 예증한다. 5월 중순에 아이크(아이젠하워의 별칭옮긴이)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재래식 무기보다 싸게 먹히리라고 말했으며, 며칠 후 합동참모본부는 중국에 핵공격을 하도록 권고했다. 실제로 그들은 핵공격을 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시킬 몇가지 씨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씨나리오들은 서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크의 핵위협이 전쟁을 끝내기로 한 공산주의자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결정은 이런 화려한 위협이 있기 전인 3월에 이미 내려졌다.

더욱이 아이젠하워는 핵무기의 실제 사용에 대해서는(단순히 핵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과는 달리)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덜레스(John Dulles) 국무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여러 위원, 외부 조언자들보다는 확실히 더 그랬다.2) 19535월에 아이크는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해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여러차례 논의했지만 결국 으름장을 놓기를, 즉 핵무기를 실제 사용하지는 않고 사용할 수도 있다는 암시와 경고를 하는 편을 택했다.3) 그사이에 미 장성들은 북한의 큰 댐들을 겨눈 비핵 공습을 강화했다. 1953520일에 합동참모본부(JSC)와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북한과 중국에 수백개의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 새로운 전쟁계획을 제출했다.4) 그러나 며칠 후 중국과 북한은 미국이 받아들일 만한 조건들을 합의했는데, 핵공갈이 그들의 결정을 촉진했다는 증거는 없다. 아이크(와 덜레스)는 공식설명 선상에서 여전히 제3국을 통해 전달된 핵위협이 전쟁을 끝냈다는 주장을 견지하려고 애썼지만 그의 회고록 초고를 쓴 아들 존은 추측이었음을 인정했다. 새 책에서 진 에드워드 스미스(Jean Edward Smith)는 아이젠하워가 자신은 덜레스나 국무부의 핵무기 사용에 관한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핵무기 사용에 관한 “이 모든 장난을 그만두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다.5) 1986년에 내가 한국전쟁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위해 딘 러스크(Dean Rusk)를 인터뷰했을 때 그는 나에게 자신이 1961년 국무부 장관 시절 핵외교가 이 전쟁을 끝내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기 위해 직원에게 정보를 조사하도록 시킨 적이 있으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 보겠지만, 아이젠하워 정부는 이후 한반도에 핵무기가 도입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아이크의 위협 이전: 매카서의 광기?

중국이 전쟁에 개입한 후인 1950129일에 매카서(Douglas MacArthur, 맥아더)는 사령관으로서 한국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재량권을 요구했다. 2주 후 그는 26개의 핵폭탄이 필요한 ‘저지 목표물 목록’(a list of retardation targets)을 제출했다. 사후에 발표된 인터뷰에서 그는 열흘 만에 한국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계획이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만주의 남단에 걸쳐 연이어 30~50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려 했다.” 그러고는 50만명의 중국 인민군을 압록강에 끌어들이고 “동해에서 황해까지 우리 배후에 방사능 코발트 띠를 형성하려고 했다. 그 띠는 60년에서 120년 동안 실제적인 효력을 지닌다. 적어도 60년 동안 북한은 지상으로 한국을 침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러시아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의 계획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것이 미친 짓이었다 하더라도 매카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하기 전에 합동참모본부의 한 위원은 원자폭탄이 중국의 한국진출을 막을 ‘결정적인 요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원자폭탄은 “유엔이 만주 경계선 바로 북쪽을 따라 길게 이어진 지역에 설정할지도 모르는 완충지대”에서 유용할 수 있었다. 몇달 후 국회의원 앨버트 고어(Albert Gore, 뒤에 부통령이 된 Al Gore, Jr.의 아버지옮긴이)는 “한국이 미국의 장정을 잡아먹는 고기분쇄기가 되었다”고 불평하며 전쟁을 끝내기 위한 ‘획기적인 무엇인가’를, 즉 한반도를 분할하는 방사능 띠를 제안했다.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코발트 폭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19515월에 매카서의 1224일자 요청을 되풀이하면서 이번에는 38개의 원자폭탄을 요청했다(그 요청은 부결되었다).6)

1951년 가을에 미국은 전장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능력을 확고히 굳히기 위한 프로젝트인 허드슨항 작전(Operation Hudson Harbor)을 수행했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