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 신경림 시집 『사진관집 이층』

 

막힌 혈을 뚫는 신명의 촉

 
 

강정 姜正

시인. 시집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이, 산문집 『나쁜 취향』 『콤마, 씨』 등이 있음.

 

신경림 申庚林

시인. 시집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이, 장시집 『남한강』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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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보라.

그리고 그것을 누구든 볼 수 있게 하라.

—쿠로사와 아끼라(黒澤明)

1

 

얼마 전부터 길을 다니며 사람들 얼굴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늘 다니던 길이더라도 생면부지의 얼굴이 익숙한 이보다 더 많다는 건 새삼 놀라운 일. 거리라는 게 그렇다. 내가 그 길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의식조차 망각한 어느 순간, 돌연 모든 게 최초의 체험처럼 여겨지게 된다. 지금 바로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재빠르게 곁눈질해본다.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상관없다. 목표(?)가 포착되는 데 별다른 작위요소는 없다. 단지 하나의 우발 상황이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모종의 심리상태나 동기에 대해선 스스로에게도 답하지 못한다. 다만, 동공의 조리개가 불에 덴 듯 파다닥 움직이면서 뇌하수체에 기묘한 가역반응이 일어나는 걸 육체적으로 깨달을 뿐이다.

같은 시간 같은 거리를 거닌다는 수천만분의 일 이상의 우연. 이런 건 왠지 불가항력이란 느낌이다. 공기마저 짐짓 수상해진다. 나는 당연히 저 사람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알지 못하는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삶에 대해서 내 멋대로 크로키하기 시작한다. 무관한 이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이 없던 충동은 무슨 병증의 작란인가. 제아무리 그럴듯한 가설을 만들어 그(녀)를 그려낸다 한들 그 사람이 그 자신일 리 만무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없던 공간이 생긴 듯해 마음의 밑자리가 점강법으로 밝아진다. 나 자신에게 묶여 있던 누군가가 오래 갇혀 있던 문을 열고 탈출하는 기분이랄까. 아니, 완전히 모든 걸 내려놓고 나가진(어디서?) 못하더라도 슬며시 바깥을 내다보려 창문이라도 하나 열어놓은 느낌이랄까. 낯선 사람의 얼굴을 보는 일이 왠지 나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내 뒷모습을 확인하는 일 같아진다. 내 걸음걸이가 저러했던가. 내 목소리의 반향이 이토록 먹먹할 정도로 스스로에게 낯선 물성을 지녔던가. 일순, 모든 게 수수께끼가 된다. 답이 풀린다고 속 시원해지는 게 아니라, 끝까지 질문해대는 것으로 더 큰 도전영역이 생기는 무슨 게임판 안에 들어온 것 같다. 그리고 그 시발이 그저 어느 평범해 보일 뿐인, 낯선 사람이다. 문득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 잃어버린 그림자가 별안간 형체와 모양의 디테일들을 갖춘 채 내 앞에 나타나 내 이름을 묻게 될 것만 같은 나날의 연속. 그럴 무렵, 한 시인을 ‘실물’로 만났다.

 

 

2

 

시인 신경림. 처음 마주한 그는 범부의 얼굴이었다,라고 일단 쓴다. 이 허두는 아무런 작의도 없다. 그저 그랬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걸 쓰는 게 왠지 버겁다. 뭐라 써도 ‘그’를 ‘그’인 그대로 지칭하지 못할 것 같은 까닭이다. 어쩌면 그게 진짜 ‘범부’의 힘이고 면모인지 모른다. 그에 대해 지난 수십년의 한국문학사가 뭐라고 써댔는지는 내가 참조할 바 아니다. 솔직히 말해 그의 시를 이토록 통시적으로, 꼼꼼하게 읽은 것도 처음이다. 나는 다만 내 아버지보다도 연장인, 어느 살아 있는 사람을 대면한 것뿐이다. 그의 시를 읽고, 스스로도 시를 쓰는 입장에서.

‘어떤 허위나 겉멋 따위 일체 배제된 밋밋함과 순연함’이라 수식할까. 허나 그 말 자체가 외려 ‘겉멋’이고 ‘허위’로 치장된 것 같아 문득 머릿속 단어를 다시 헤아리게 만드는 얼굴을 그는 지니고 있다. 쓰고 보니 이 문장 자체가 굉장히 작위적이다. 그러니 동시에, 내가 그동안 숱하게 남발했던 문장들이 이런 배배 꼬인 체계 안에서 반복 운용된 허위의 부메랑은 아니었을까 하는 자괴가 뒤따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게임판1)은 발가벗으려 할수록 그 안에 더 많은 옷이 드러나는 걸 기본원리 삼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고로, 긴장감이 고조될수록 피부가 겹으로 두터워지면서 본래 없던 옷을 하나 더 껴입게 되는 것 같다. 하여 명명하자면, 이건 이른바 ‘전면 무장해제 놀이.’ 턱없이 진지해지거나 비감해지거나 우울해지는 쪽이 진다. 아니, 이 게임은 애초에 승부를 가리기 위한 게 아니다. 어느 한쪽에서 이기려 들거나 초조해지거나 하면 게임 자체가 성립 안된다. 여긴 흑백도 좌우도 없다. 삶 자체의 본래적 고뇌마저 퇴색게 하는 지엽적 편가름으로서의 분투 따윈 게임을 즐길 줄 모르는 바보들의 헛수작에 불과하다. 굳이 솔직해지려고 노력할 필요도, 뭔가 격식과 예의를 갖춰 스스로를 위장(정격화된 예의란 타인에 대한 예우보다 자신을 보위하려는 테크닉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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