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실패의 기록

최근 장편소설 논의에 부쳐

 

 

차미령 車美怜

문학평론가.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주요 평론으로 「친밀성의 새로운 신화는 어떻게 전복되는가」 「몸뚱이는 말하지 않는다」 등이 있음. kirugi@dreamwiz.com

 

 

두께의 시간

 

우리의 이야기는 묵시록과 함께 시작되었다. 우울에 젖지 않고 비감해하지도 않으며 적는다. 다만, 끝났다는 인식은—이야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완결’된 것이다—종종 비평을 원점으로 회귀하게 하거나, 앞날을 내다보게 했다. 근원을 탐구하는 고고학자와 미래를 개시(開示)하는 예언가의 형상이 비평에서만큼은 드물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특히 후자, 예언으로서의 비평은, 전망과 장래라는 말이 오가기는 해도, 내가 생각하는 비평언어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씌어진 작품이 아니라 씌어질(혹은 씌어져야 할)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인식의 지평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문학 고유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불안을 뒤로 돌리고, 현재의 과잉과 결여에 비추어 미래를 단일한 상으로 투사한다.

그러나 묵시록의 휘장을 걷는다 해도, 최근 몇년의 관찰이 문학적 개념의 재구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 사실을 ‘반응’의 과잉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러한 논란의 배경에는,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향방을 두고 생산된 첨예한 긴장이 잠복되어 있다. 범박하게 말해 초점은 미완의 기획으로 남은 근대와 그것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거니와, 부분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에 대한 재검토까지를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최근 장편소설 논의가 ‘노블’(novel)을 다분히 강박적으로 호출하는 양상에 불만을 품은 독자가 있다면, 그것이 이같은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겠다. 논의의 첫머리에서 장편소설은 ‘근대문학의 챔피언’으로 호명되었으나, 다양한 저항과 부딪히며 곧 개념의 재설정에 대한 요구에 직면했다.

쉽게 짐작되는 것처럼 ‘모던’이나 ‘포스트모던’ 등의 수식어를 붙인다 해도, 시대 및 정신사와 결합한 장편소설의 정의에 대해 정연한 논증을 시도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우리가 새삼 깨닫게 되는 사실은 변신과 해체를 그 자신의 근거이자 동력으로 삼아왔던 한 장르의 두께다. 그것을 규정적으로 포획하려는 시도는 탁월한 반례들에 의해 흔들리거니와, 그러한 반례들은 소설의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세종’이라는 진화론적 어휘—자신을 우세종이게 했던 그 이유로 사라지게 되는 아이러니를 떠올리게 하는—가 출몰하는 것은 내부의 타자를 예외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곤경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최근 장편소설에 대한 논의는 안팎에서 그 장르적 특성을 발견하고 재구축하는 대신 다른 장르, 특히 단편소설과의 거리를 무화하고 그 경계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현재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차이를 묻는 질문들은, 장편소설을 어떤 특권으로 간주하고 그 특권을 타도하고자 하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구성되고 있다. 장르의 해체가 지배적인 현상이라면, 그것이 장단편의 구분에까지 이르지 못할 이유는 물론 없다. 또한 두 장르의 생산과 수용에 절대 넘을 수 없는 기준선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도 무모한 발상이다.

하지만 현재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경계를 없애고자 하는 시도가 과연 우리에게 유익한 쪽으로 심화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해져도 좋을 듯하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유의미한 내적 차이가 ‘길이’밖에 없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렇다. 소설이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시간을 나누고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의 길이는 그것이 품고 있는 시간성(과 공간성)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예컨대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모두, 지구의 역사도, 단 1분의 시간도 다룰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해는 소설의 내적 시간을 오로지 ‘이야기 시간’(storytime)의 차원으로만 제한하고, ‘왜’ 그리고 ‘어떻게’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돌리고 만다. 그 불일치를 갖고 다양한 작업을 진행한 주네뜨(Gérard Genette)의 발상을 환기하면,1) 소설의 길이는 분량이며 그것은 ‘이야기 시간’과 ‘서술 시간’(texttime)이 이루는 함수에 영향을 주게 된다.

소설의 작가는 이야기를 버티는 동시에, 지면의 압력을 버텨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야기를 짓고자 하는 작가에게 서술 시간은 공간적인 차원으로 변형된다. 지금 내 안의 이야기가 요구하는 길이를 가늠하며, 먼저 제시하느냐 나중에 제시하느냐, 몇번 반복하느냐, 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드러내느냐, 얼마나 가속하고 또 얼마나 감속할 것이냐…… 누군가는 이를 테크닉이라 하겠지만, 지금 이 이야기가 과연 무엇인가를 더듬어가는 섬세한 의식이 그 일을 한다. 그것은 소설의 가장 고유한 기능이자 가능성이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양쪽에서 더 심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을 현재의 불만을 이유로 서둘러 닫아버릴 필요가 있을까? 김영하(金英夏) 김연수(金衍洙) 그리고 최근의 황정은(黃貞殷)의 사례를 갖고 짐작하건대, 장편소설의 시간을 통과한 작가에게는 단편소설의 시간도 다른 형태로 다가올 수 있다. 한 작가의 고유한 세계는 길이와 무관하게 오롯하더라도, 독자에게 그 시간의 운동성은 다르게 체험될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지금 두 장르의 차이는 길이밖에 없지 않느냐는 질문들에서, 정작 그 길이의 차이는 무겁게 사유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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