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저서로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합본개정판) 등이 있음. paiknc@snu.ac.kr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사실, 역사, 그리고 시」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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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원(사회) 이번호부터 문학초점 코너를 여러 필자의 짧은 리뷰 모음이 아닌 한편의 정담(鼎談)으로 개편합니다. 형식을 바꾼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은 촌평 형식의 리뷰가 너무 전문화되는 바람에 독자들의 접근이 쉽지 않다는 진단이 있었습니다. 또 근간의 문학비평이 비평가들 사이에서조차 소통되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었고요. 선배 비평가의 한국문학사적 감각보다는 외국이론가의 논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경향도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개편 첫회의 초대손님을 고민하다 한국문단의 대선배이자 우리 사회의 변동을 현장에서 체험하신 백낙청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백낙청 새로운 문학초점 첫회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오랫동안 한국문단의 일원으로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은 근래에는 작품도 많이 못 읽고 평론도 많이 못 쓰는데, 혹시 작품 안 읽는 늙은 평론가로 구경거리나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웃음)

송종원 귀한 말씀 기대합니다. 앞으로 이 코너는 강경석 평론가와 제가 고정으로 참석하면서 매회 새로운 초대손님을 모시는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사전회의를 통해 지난 계절에 출간된 작품 중에 소설 세권과 시집 세권을 다루기로 했습니다.

 

공지영 장편 『높고 푸른 사다리』

 

163문초-09_fmt강경석 지난해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출간된 작품 중에서 대상작을 선정했는데 먼저 다룰 작품은 공지영(孔枝泳)의 장편 『높고 푸른 사다리』(한겨레출판 2013)입니다. 비평이 너무 문단 중심으로 돌아가다보니 공지영처럼 많은 독자의 지지를 받는 작가들이 제대로 된 평가에서 소외되곤 합니다. 독자가 선호하는 작품과 비평가가 평가하는 작품 사이에는 늘 일정한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그 괴리가 너무 큰 것 같아요. 대중적으로 크게 선호되는 작품이라면 무조건 상업주의적 대중성이라는 딱지를 붙여 평가에서 제외해버리는 방식은 문제가 있습니다. 다수 대중의 선택이 때로는 집합적 각성의 결과물인 경우도 있잖아요? 전작인 『도가니』(창비 2009) 때만 해도 작지 않은 사회적 반향을 가져왔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푸른숲 2005) 같은 작품을 통해 사형제 폐지 문제 등을 다루며 꾸준히 사회적 발언을 해왔던 작가인 만큼 공지영의 작품은 글쓰는 목적부터 일반적인 대중소설과는 어느정도 변별점이 있지요. 독자들을 위해서도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백낙청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 중에는 기본조차 안돼 있는 작품들도 많은데 『높고 푸른 사다리』가 그건 아니란 점에서 우리가 다룸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사회적 발언 문제를 떠나서도 서술기법상으로도 굉장히 능숙한 면이 있고 표현력이라든가 장면 장면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능력은 뛰어나다고 보거든요.

강경석 그도 그렇지만 공지영은 독자들과 함께 ‘낮은 단계의 합의점’ 같은 것을 찾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문체 자체가 읽는 이에게 호소하는 톤인데다 작품의 주인공도 굉장히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지요. 도저히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최저윤리’에 호소한달지. 영화 「변호인」에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마치 ‘이러면 안되는 것’ 같은 적절한 상황을 제시하고 거기에서 출발하는 거죠. 작품 속의 삽화를 예로 들면, 흥남철수 때 위험을 무릅쓰고 피난민을 배에 태우는 선장의 모습이나 북에서 신부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생명의 존엄이라는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광주항쟁 얘기를 끌어들이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최저윤리의 한계선을 그어놓고 그것이 아직 살아 움직이는 상처이자 현재임을 환기시킵니다. 그래서 독자들도 단순히 흥밋거리를 좇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인 태도를 갖게 되고요. 다만 작품이 그 출발선으로부터 결국 어느 높이까지 다다랐느냐는 문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송종원 본격적으로 작품 얘기를 해본다면, 서사축에 놓인 두개의 사랑, 그러니까 소희와 요한의 세속적 사랑과 수사(修士)로서 요한이 지켜야 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대립구도가 너무 구태의연해 보였습니다. 세속적 사랑과 종교적 사랑을 대립구도로 놓고 양자택일하는 갈등이 이 시대에 얼마나 유의미한 질문인지 의심스러울뿐더러, 대립구도 자체가 공평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소희라는 여성인물을 너무 형편없이 그려서 애초부터 하느님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소희가 요한에게 왜 다가왔고 왜 떠나갔는지가 도무지 납득이 안됐습니다.

백낙청 송선생이 지적한 문제점 중에 가령 소희와 요한의 사랑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다는 생각은 나도 했지만, 약점의 성격에 대해서는 조금 해석이 달라요. 두가지 사랑을 매우 이분법적으로 처리했다고 하셨는데 요한은 보통사람이 아니고 수사란 말이죠. 이분법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예요. 오히려 나는 작가가 그 이분법을 얼버무려버린 것 같아요. 어떨 때는 인간의 사랑도 하느님의 명령 아니냐 하며 넘어가려고 하는데, 인간의 사랑이나 수사의 하느님에 대한 헌신이나 크게 보면 다 하느님이 주신 것이지만 실제 작중상황에서 그 둘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 결국 하나를 선택하지만, 뭔가 갈 데까지 가서 선택한 게 아니고 우연이라든가 여러 사건이 개입해서 정면의 선택을 회피하게 만들어주고 그러면서 또 이런저런 발언을 통해 얼버무리는 면이 있지 않나 싶어요. 단적인 예로, 나중에 요한이 미국에 갔을 때 어느정도 마음이 정리된 뒤에 혼자 걷고 있는데 ‘요한, 요한’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죠.(359면) 뒤돌아보니까 아무도 없었는데 그 목소리는 할머니 목소리 같기도 하고 미카엘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안젤로 목소리 같기도 한데 그에 앞서 소희의 목소리 같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소희의 목소리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성격이 달라요. 그렇게 섞어놓으면 안된다는 거지요. 소희라는 인물의 형상화에 대해서도 낮게 평가하셨는데, 작가가 소희를 그냥 미화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형편없는 면을 지녔다는 걸 독자가 충분히 알도록 해준 건 작품의 성과라고 봐요. 다만 매력적이지만 일종의 공주병도 있는 복잡한 인물을 시종 냉정하게 그려놨다기보다는 작가가 좀 왔다 갔다 하지 않았나. 사실 만약에 우연적인 사건들이 개입하지 않아서 요한이 소희를 선택했더라면 상당히 비참해졌을 거예요. 원래의 서원(誓願)을 배반해서 불행해지는 것도 있지만 두사람이 결코 해로할 수 없지 않았을까 해요. 하여간 비극적인 결말로 가든 하늘의 은총으로 비극을 피하게 되든, 문제를 끝까지 파고든 것 같지는 않아요.

 

왼쪽부터 강경석, 송종원, 백낙청

왼쪽부터 강경석, 송종원, 백낙청

 

강경석 소희도 왔다 갔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작품 전체가 우왕좌왕하는 면이 있습니다. 수도원이라는 배경을 구축하는 1부의 장면들은 상당히 실감나서 기대를 갖게 만드는데 미카엘과 안젤로가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부터 멜로드라마 공식으로 빠져버려요. 거기가 변곡점이 되면서 신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사회・역사적인 맥락으로 구체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봅니다. 소희라는 인물은 아마도 작가의 숨은 분신일 텐데 그 인물이 갈팡질팡하니까 작품 전체 구조도 그 길을 따라간 게 아닌지요.

송종원 두가지 정도 더 말할게요. 우선 작품에 놓인 사랑의 구도가 너무 구태의연하다고 지적했던 거는, 중요히 다룰 만한 문제들을 배경으로 둔 채 도식적인 사랑의 대립구도만을 집중해서 다룬 점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가령 미카엘 수사의 형상은 정교분리 담론의 영향하에 정치적인 것을 억압하도록 요구받는 우리 사회의 종교인의 삶을 성찰할 계기가 될 수 있어요. 이 문제의 시의성에는 별 이견이 없으실 거라고 봐요. 그런데 소설은 이 인물의 서사를 돌연한 죽음으로 처리해버리죠. 또한 후반부에 다뤄지는, 해방 이후와 625 때 겪게 되는 종교와 이념 사이의 갈등 역시 우리 사회의 종교가 어떠한 역사적 격변 속에서 이념성을 적대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는지를 되짚어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겠다 싶었는데, 그 부분 역시 깊이있게 다뤄지지 않아요. 소희와 요한 사이의 설득력 없는 사랑의 갈등 대신에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이 왜 대립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는지를 좀더 파고들었다면 훨씬 좋았을 거 같아요.

대중이 이 작품을 선택한 데는 최근 우리 사회에 횡행한 힐링 담론 열풍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