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우리 비평담론의 사회성을 찾아서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최근 소설을 통해 본 87년체제의 감정구조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1. 결여의 감정교착불안과 죄의식

 

미학적으로 평범하지만 사회적 반향만큼은 특별했던 영화 「변호인」(2013)1)1987년 봄의 법정 장면에서 끝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모델로 한 가공의 인물 송우석이다. 부림사건(1981)에 뛰어들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6년 뒤 박종철(朴鍾哲) 고문치사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하다 수인(囚人)의 몸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 결말은 주인공의 패배를 뜻하지 않는다. 81년의 그는 혼자였지만 87년의 그는 무려 99명의 변호인과 함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판사의 호명에 따라 차례로 기립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함께’라는 감각은 최고조에 이른다. 그날의 법정으로 천만 관객을 불러모으고 전율하게 만든 힘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함께’인 우리의 궁극적 승리를 뜻하는 걸까? 이 역시 그렇지 않다. 서서히 클로즈업되는 송우석의 얼굴엔 시대의 소명에 온전히 귀의한 자의 비장한 평온이 어려 있지만 관객들은 그가 모델로 삼고 있는 실존인물이 훗날 어떤 영광과 모욕 속에서 살다 갔는지를 오롯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의를 입은 그의 모습에 좌절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승리의 희열에 안주할 수도 없게 된다. 이 감정의 교착상태 가운데서 정작 마주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과 대면하는 괴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가 한시바삐 떨쳐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거리는 어수선했다. 저물어 오는 거리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광화문 쪽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이 오늘 낮에 광화문에서 있었던 것이다. 대한문 앞에 설치했던 시민분향소를 경찰이 해체하려 한다는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슬픔은 일종의 무서움인지도 몰랐다. 경위야 어떻든 간에, 전직 대통령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게 한 지금 이곳의 현실이 무서워서 사람들은 지금 저렇듯 황막한 눈빛으로 광화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리라.” 공선옥(孔善玉)의 장편 『영란』(뿔 2010)의 전반부 한 대목(45면)이다. 불의의 사고로 아이와 남편을 연달아 잃은 주인공, 불륜으로 가족과 이별한 운동권 출신 소설가 정섭, 외환위기 시절을 버텨내고도 결국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되어 죽음을 맞은 호영 등 저마다의 상실감으로 번민하는 인물들이 그날의 광화문을 배경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왜 이런 배경이 필요했던 걸까.

주인공은 말한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고 싶었다. 혼자 있다는 것은 춥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추워서, 그날 그곳에 나갔다.” 여기서 말하는 “그날 그곳”이 대한문의 시민분향소였든 「변호인」이 걸린 영화관이었든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이런 무정하고도 매정한 세상”에서 추웠던 게 아닐까. “그날 그곳”에서 사람들이 “하염없는 줄을 만들고” 있었던 이유는 그곳이 정작 분향소나 영화관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18~19면 참조) “이런 무정하고도 매정한 세상”에서라면 아무도 함께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불안)과 “무정하고도 매정한 세상”이기 때문에 끝까지 함께해주지 못했고 못할 것이라는 미안함(죄의식)을 공유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더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감정의 교착상태가 그것만으로 완전히 해소될 리 없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무력함을 책망하는 동시에 속수무책의 세상을 원망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그날 그곳”에서 우리가 함께였음을 확인함으로써 불안과 죄의식으로부터 서둘러 빠져나오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변호인」의 결말이자 이 모든 복합감정의 출처이고 심지어 “이런 무정하고도 매정한 세상”의 기원인지도 모를 저 1987년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1987년은 “우리 사회의 궤적을 해명하고 현재에서 새롭게 출발하려 할 때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을 정돈하는” 유력한 “인식론적 관제고지(管制高地)”다.2) 87년체제라는 개념으로 6월항쟁 이후 우리 사회의 구조변동을 이론화한 김종엽(金鍾曄)은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박정희식 발전국가체제의 해체로 그 의미를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의 경우 그것은(제도적 민주화는인용자)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체제 이후를 어떻게 설계할지가 정치적 과정에 맡겨졌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치적 과정이라는 테이블 위에 모든 카드가 올라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세력의 포진상태와 확립된 가치정향에 따라 어떤 카드가 올라올지는 미리 규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87년체제는 이런 선택범위를 좁히지 못했다. 타협적 민주화였기 때문에 사회세력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