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우리 비평담론의 사회성을 찾아서

 

‘다른 세상’에 대한 물음

‘창비적 독법’과 리얼리즘론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창비적 독법’과 리얼리즘론

 

‘창비적 독법’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물어놓고 보니 우문 같다. 1966년 창간되어 50년 가까운 세월을 이어온 계간 『창작과비평』의 존재감이나 지속적 영향력을 ‘창비’가 일구고 지켜온 문학론이나 현실에 대한 태도와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테다. 위기의 민족현실에 대한 온당한 인식과 실천적 관심을 촉구하며 출발한 창비의 ‘민족문학론’이 한국문학의 주체적 시야를 정립하는 간단치 않은 과제를 감당하는 가운데 한국문학의 내적 긴장과 민중적 활력을 파수하고 북돋았음은 두루 아는 이야기다. 그것은 문학의 이름으로 수행된,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가로막는 세력과의 역사적 싸움의 도정이었다. 창비의 문학관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간에, 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창비의 민족문학론은 문학 내적으로는 ‘리얼리즘론’으로 구체화되고, 현실인식의 차원에서는 ‘분단체제론’으로 깊이와 폭을 넓히면서 비단 문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실천이론으로 한국사회의 진로 모색에 중요한 방향타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아마도 문학의 사회성을 ‘근원적 진리’의 자리에서 사유하고 점검해온 가장 뜨겁고 치밀한 비평담론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인간해방’이나 ‘역사발전’ 같은 대의에 대한 회의가 유행처럼 번진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사회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창작 현실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그 변화가 집단/개인, 이념/탈이념, 해방적 정치/욕망 등등의 손쉬운 이항구도의 일방적 진행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런 변화에 맞선 민족문학론의 이론적, 실천적 대응력에 의문이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근자에 와선 창비 내부의 문학담론에서조차 ‘민족문학’이란 단어를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민족문학론을 제기하고 그것을 여전한 문학적 역사적 실천의 과제로 삼는 문제의식에 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처음부터 민족문학론의 핵심적 관심사이던 한반도 분단의 현실을 ‘분단체제’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노력이 성숙해감에 따라, ‘민족문학’이라는 틀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실행하는 데 제약이 많다는 인식이 커지게 되었다. 분단체제의 극복이 ‘민족문제’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세계체제 변혁작업의 일환이요, 또한 남한사회 내부의 딱히 ‘민족적’이랄 수만은 없는 여러 모순들을 해결하는 개혁과 직결된 사업이니만큼, 민족문학론의 일정한 상대화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애초 민족문학론을 제기할 때의 초심을 견지한 데 불과하며, 민족문학의 깃발이 전면에 나부끼지 않는다고 비통해할 이유도 없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더불어 “역사를 묻고 역사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동시에 묻고자 하는 민족문학론의 초심마저 버리라고 다그치는 것도 우스운 짓이다.1)

 

사실 민족문학론이 하나의 이론이기에 앞서 문학과 역사를 대하는 실천적 자세와 태도의 문제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민족문학의 깃발’이 전면에서 나부끼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을 테다. 인용문에서 ‘민족문학론의 초심’으로 표현된 물음(“‘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더불어 “역사를 묻고 역사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동시에 묻고자 하는”)은 ‘동시에’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하나의 물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적어도 1966년 『창비』 창간호 권두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이래로 창비 문학론의 실질적 대표자인 백낙청(白樂晴)의 비평에서 이 두 물음을 하나의 물음으로 ‘동시에’ 묻는 일은 중단된 적이 없는 듯하다. 그리고 이미 여러 평자들이 지적했지만, 여기에 ‘민족문학론’조차 방편으로 만드는 창비(정확히는 백낙청) 문학론의 핵심이 있는 것 같다. 그 문학론은 인간해방으로 나아가는 역사 창조의 도정과 문학의 길이 다르지 않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그 하나의 길을 표현하고 드러내고 창조하는 ‘진리’의 자리를 참된 문학예술의 몫으로 생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 만큼 ‘역사적 인간’과 ‘시적 인간’의 근원적인 동질성이 천명되고, “진정한 시의 새로움은 곧 역사의 새로움”2)이 된다. 소외의 표현에서 이룬 나름의 예술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대한 일정한 체념과 퇴각, ‘삶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두려움’을 기초로 하고 있는 모더니즘이 대결과 극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종래 서구의 리얼리즘론이 쉽게 따라야 할 길이 되지도 않는다. 객관현실의 미학적 반영을 강조한 루카치(G. Lukács)의 리얼리즘론은 서구 형이상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관념적 실체론’의 약점을 드러낸 것으로 비판되는데, ‘진리의 구현’이라는 ‘시적 창조’의 과정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이 (…) 독자적 명칭을 요구하는 근거가 바로, 인간의 세계는 ‘현실’로서 인간이 체험하는 그것 이외에 따로 없지만 이 현실의 정확한 인식은 ‘시적’ 창조의 과정에서만 가능하며 따라서 진정한 ‘사실성’에는 이상주의가 가세할 필요도 없이 자동적으로 비이상주의적이며 철저히 현실적인 전투성이 주어진다는 세계인식이 그것이다.3)

 

여기서 “‘시적’ 창조의 과정에서만 가능한” “현실의 정확한 인식”이 곧 ‘진리’의 드러냄(드러남)과 구현일 텐데, 지식(알음알이)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근원적 진리’의 자리를 상정하고 그 진리의 구현에서 ‘시적’ 차원의 계기를 강조한다는 점은 백낙청 문학론의 중핵이라 할 만하다. 후에 ‘시의 경지’로 더 많이 표현되는 이 진리의 자리는, 로런스(D. H. Lawrence)의 소설관을 이야기하면서 소개한 ‘being’의 차원4)과도 맥을 같이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차원에 미달해 있는 한에서는 “사회적·역사적 총체성을 강조하는 루카치의 사상도 삶의 진실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는 셈이 된다.”5) 그런데 그 차원이 “실존의 과정에서 도달하지만 도달하는 그 순간 이미 실존의 차원, 유·무의 차원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동양적 ‘도()’의 깨침이나 종교적 각성의 순간과 방불한 것일 테다. 기실 ‘사람이면 누구나 타고나는 본마음’ ‘양심(良心)과 양지(良)’의 차원에서 역사와 문학의 문제를 사유한 것은 백낙청 문학론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이 점에서 초기 평론의 한 각주6)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