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천운영 千雲寧
1971년 서울 출생.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바늘』 『명랑』 『그녀의 눈물 사용법』 『엄마도 아시다시피』,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 『생강』이 있음. hangomm@hanmail.net
다른 얼굴
줄이 길었다. 그녀 앞으로 여섯명.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이후 일정에 대해 생각했다. 계피와 생강을 어느 상점에서 살지. 어느 화원에서 달리아 구근(球根)을 더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을지. 아리랑을 지우자 은행에서 집까지 동선이 깔끔해졌다. 시급한 것은 수정과가 아니라 달리아였다. 구근을 심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지만 색의 조화를 생각한다면 울타리 쪽에는 역시나 달리아였다. 새 모이통을 채울 혼합곡식도 사야 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바우하우스가 나았다. 동선 조정을 마쳤을 때, 마침맞게 차례가 왔다.
“좋은 아침. 오늘 날씨, 정말 좋지?”
그녀는 데스크로 한발짝 다가서며 상냥하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 좋은 점심 좋은 저녁. 그 말은 삼십년 전 이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상냥함을 더하면 인사말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삼십년이 지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 지금, 목소리에 숨겨져 있던 초조한 기운이 말끔히 사라지자 상냥함만이 남았다. 저절로 풍겨 나오는 기분 좋은 향기처럼. 방심하고 짓는 표정에도, 가만히 움직이는 발걸음에도. 상냥함은 그녀를 설명하는 거의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저절로 나온 상냥한 인사말에는 힘이 있었다. 적어도 은행원의 은색 넥타이를 느슨하고 만들고, 이 도시 사람들의 전형적인 표정인 근엄한 얼굴을 누그러뜨릴 만큼의 은밀한 힘.
“좋은 아침. 뭘 도와드릴까요?”
데스크의 남자는 사무적이지만 친절한 목소리로 그녀를 맞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갑자기 얼어붙었다. 시간을 거슬러 삼십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는 외국인처럼, 눈만 깜빡이며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아니면 삼십년이 훌쩍 지나 늙은이가 되어버린 것도 같았다. 방향을 잃고 기억을 잃어 어리둥절해하는 치매노인.
“음……”
그녀는 가방에 손을 넣은 채 멍하니 서서 남자와 눈을 맞췄다. 남자의 눈은 따뜻한 회색이었다. 남자의 가슴팍에 달린 아크릴 명찰로 시선을 옮겼다. 글자가 작아 이름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불새 모양의 은행심벌은 선명했다.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 줄을 선 것을 그녀가 잊을 리는 없었다. 그녀는 치매환자가 아니었다. 닷새치 매상을 모아온 탓에 평소보다 많은 돈이 지갑에 들어 있었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지갑은 가방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손을 넣으면 바로 닿는 주머니 안에. 언제나 어김이 없는 그 위치에.
“음…… 그러니까 내가……”
그녀는 가방을 데스크에 올려놓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들여다보고 뒤져봐도 반드시 있어야 할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지갑이 없네요?”
남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한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여태 이런 일은 없었다. 그녀는 뭔가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지품이 손을 타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손을 빼내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빈손이 공손하게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내 상황파악을 끝낸 듯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해한다고, 더러 그런 실수들을 한다고, 안됐지만 자신이 도와줄 것은 없다고. 너그럽지만 조소 섞인 미소였다.
“그럼 준비가 되면 다시 오시겠습니까?”
준비가 되면……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지갑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혹시 집에 두고 온 것은 아닐까. 아니다. 스시집 열쇠를 찾느라 가방을 뒤질 때만 해도 분명히 있었다. 지갑 자석에 열쇠고리가 붙어 있는 걸 떼어냈으니까. 스시집을 나와서는 피트니스센터에 들러 한시간가량 운동을 했고, 내친김에 시간을 조정해서 마사지를 받았다. 그사이 지갑을 꺼낸 적은 없었다. 지갑은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게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었다.
“부인? 다시 오시겠습니까?”
남자가 재차 물었다. 그녀는 줄서서 기다린 자신의 순번을 남자가 끝내려 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황급히 말했다.
“아니요, 다시 올 게 아니라, 잃어버렸어요. 지갑을요. 어쩌지요?”
“분실신고를 해드릴까요? 신분증 가지고 계세요?”
“지갑에 같이 들어 있을 텐데.”
“그럼 사회보장번호를 불러주세요.”
그녀는 일단 번호를 불러준 다음 생각했다. 오는 길에 누군가 그녀의 몸이나 가방을 스치고 지나간 적이 있었는지. 그녀가 기억하는 한은 없었다. 마사지샵이나 피트니스센터 탈의실에서 손을 탈 수도 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곳은 흘린 머리핀 하나라도 잘 보관했다가 주인을 찾아주던 곳이었다. 회원카드를 꺼내지 않아도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회원관리 시스템이 철저한 곳. 그럼 어디였을까.
“일단 분실신고 먼저 한 다음에 사용내역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저희 은행에 한장의 신용카드와 네개의 계좌가 있는데, 모두 정지시킬까요?”
그렇지. 지갑 안에 현금만 있었던 게 아니지. 신용카드가 석장에 현금카드가 석장…… 은행 두군데를 더 들러야 했다. 그밖에 백화점카드가 있고, 각종 회원카드를 일일이 다시 발급받으려면…… 그녀는 무엇보다 교통카드가 아쉬웠다. 이제 겨우 닷새를 썼을 뿐이었다. 재발급도 안되고, 달이 바뀌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동전을 준비해 다녀야 했다. 꽤 번거로울 것이었다. 동전 없이 기차를 탔다가 낭패를 겪었던 때가 떠올랐다. 하필이면 기차 내 동전교환기는 고장이 나 있었고, 다른 칸으로 가보려는데 검표원이 나타났다. 서른배에 달하는 벌금을 내지는 않았지만, 의도된 무임승차가 아님을 설명해야만 했다.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표정관리를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일단 정지시켰고요. 신용카드 최종사용일은 2일 14시 38분. 에서 75.40유로. 본인이 사용한 것 맞습니까?”
사흘전 오후 두시면, 성훈네와 점심을 먹었고, 그녀가 계산을 했다.
“맞아요.”
“351로 시작되는 계좌는 한시간 전에 마지막 인출이 있었네요. 2천유로. 본인이 사용한 것 맞습니까?”
“언제요?”
“11시 40분. 한시간 전에요.”
“아닌데…… 그때 난 마사지샵에…… 나 아니에요.”
새 계좌. 비밀번호. 그녀는 오늘 새 현금카드를 등록할 예정이었다. 지갑에는 은행에서 발급받은 비밀번호 안내장과 새로 받은 카드가 함께 들어 있었다. 개인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비로소 카드를 쓸 수 있었는데. 그녀가 아니라 지갑을 가져간 사람이 등록과 개시를 대신한 셈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피해의 심각함을 깨달았다. 현금은 물론이고 통장에 든 돈까지. 동전의 번거로움과는 비할 바 아닌 것이었다.
“지갑을 언제 잃어버리셨는데요?”
“글쎄요…… 그게……”
“오늘 총 3회에 걸쳐 출금이 있어요. 모두 6천유로. 모두 이 지점 현금인출기에서 인출됐네요?”
도대체 누가, 언제 어디서. 그래, 그 남자. ‘토토스시’에 왔던 그 아랍남자. 입구 카운터 옆에 서 있었지. 그녀는 가게에 들어가면 항상 가방부터 카운터에 올려놓은 다음 주방으로 들어간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그 위치에 바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아랍남자가 지갑을 훔쳐갔다. 지갑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도난당한 것이었다. 분실이 아니라 절도.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아마…… 세시간 전일 거예요. 맞아요. 세시간.”
토토스시에 도착한 것이 9시 무렵. 머문 시간은 채 이십분이 넘지 않았다. 그때 스시집을 나와 곧장 은행으로 왔더라면. 피트니스센터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예약시간을 바꿔가면서까지 마사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했더라면. 그래서 남자가 나간 다음 곧바로 가방을 확인해봤더라면. 그런데 정말 그 남자가 지갑을 훔쳐갔을까?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인사까지 하고 나갔다. 그렇게 선량한 눈을 가진 남자가 정말 지갑을 훔쳐 갔을까? 하지만 그 남자가 아니고서는,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
“CCTV, 그거, 확인해볼 수 있어요?”
“개인에게는 공개가 안되고, 경찰이 요청하면 보여줄 수 있어요. 일단 경찰서에 가서 도난신고를 하십시오. 그래야 보험이나 다른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그런데 이상하네요. 어떻게 비밀번호를 알았을까요? 세번 만에 비밀번호를 알아내기는 어려울 텐데. 세번 오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