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법치의 길

 

 

김두식 金斗植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로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 『불편해도 괜찮아』 등이 있음.

 
 

백승헌 白承憲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희망과 대안’ 공동운영위원장, ‘새정치비전위원회’ 위원장 역임.

 

전수안 田秀安

사단법인 선 고문.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광주지방법원장, 대법관(2006~2012) 역임.

 

ⓒ 이영균

ⓒ 이영균

 

김두식(사회) 이명박·박근혜정부를 이어오면서 검찰의 무리한 기소와 그에 따른 무죄판결이 반복되고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까지 터지면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번호 대화에서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둘러싼 여러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찾아보려 합니다. 백승헌 변호사와 전수안 전 대법관 두분을 모시고 말씀 나눌 텐데요, 창비 독자들을 위해 제가 잠깐 소개를 드리고 근황을 여쭙겠습니다. 백승헌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을 역임하시고 양심수 변론뿐 아니라 총선시민연대나 연합정치 운동 등 시민운동에 적극 관여해오셨습니다. 전수안 전 대법관은 1978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된 후 2012년 퇴임하기까지 34년간 법관으로 재직하셨고 퇴임 후 자유인을 꿈꾸며 ‘자발적 백수’를 표방하시다가 최근 공익법인에서 사회공헌활동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백변호사님은 근래 새정치비전위원회와 관련해 언론에 종종 나오셨는데 전선생님은 뭐하고 계신지 통 알 수가 없더군요.

 

전수안 요즘은 주로 여행 중입니다. 남편과 다니는 은퇴여행인데, 시작해놓고 보니 이렇게 남편하고 함께하는 것이 난생처음이더라고요. 전에는 집에 같이 있어도 딴생각 하고 남편 말도 건성으로 듣고 그랬는데 이제 비로소 서로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래서 그동안 참 미안했다, 이제라도 잘됐다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김두식 부럽습니다. 백변호사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새정치비전위원회 활동으로 바쁘셨죠.

 

白承憲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 호사모임 회장, ‘희망과 대안’ 공동운영위원장, ‘새정치비전위원회’ 위원장 역임.

白承憲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희망과 대안’ 공동운영위원장, ‘새정치비전위원회’ 위원장 역임.

백승헌 요즈음은 좀 그랬습니다만, 그건 잠시 맡은 일이어서 항상 그 일 때문에 바쁜 것은 아닙니다. 외부에서는 제가 이런저런 사회활동으로 매스컴에 비칠 때는 바쁘게 사는 걸로 알다가, 잘 보이지 않으면 좀 여유로운가보다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제 일상은 변호사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대체로 균질했던 것 같아요. 삼십년 가까운 변호사 생활 동안 길게 쉰 것은 한달씩 두번 쉰 게 전부여서 그런지 전선생님이 퇴임 후 여유로운 생활을 하시는 것이 특히 부럽군요.(웃음)

 

김두식 두분 모시고 말씀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주제를 논하기 위해 우선 현실진단부터 해볼까 합니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하고 1년 반쯤 지났는데,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을 지내고 보수정부 6년 반쯤 지난 이 시점에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고 있는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국정원 대선개입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

 

백승헌 오늘 좌담 주제를 받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현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이 민주주의 안에 법치주의나 법에 의한 지배가 포함되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데, 과연 그럴까요. 민주주의 개념이 등장하기 전의 사회나 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에서도 가령 법가(法家)라든지 하는 법에 의한 통치는 있어오지 않았습니까. 법치주의가 법에 의한 지배만을 말한다면 꼭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붙어 있어야 되는가, 그건 아니라고 봐요. 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법에 의한 지배뿐 아니라 법의 평등,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개념이 법치주의의 필수요소로 인정되면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지금의 법치주의가 가능해진 것 아닌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대화가 우리 사회의 법치주의가 안녕한가를 묻는 거라면 그것은 단지 법치주의가 확립되었는지를 묻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취약성이나 불안전성에 대한 문제도 같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법치주의가 안정되지 않았다면, 민주주의도 착근(着根)되지 못했거나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겠죠. 역으로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金 斗植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로 『헌법의 풍경』 『평화 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 『불편해도 괜찮아』 등이 있음.

金 斗植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로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불편해도 괜찮아』 등이 있음.

김두식 단순히 법치주의의 위기라기보다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는 말씀이군요. 사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얘기하자면 끝도 없겠죠. 법의 지배라는 것은 왕의 지배가 아닌 안정적인 법과 제도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도구로서의 의미도 지니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전 민주정부 아래에서 법치주의가 완전히 자리잡고 있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걸 미리 밝힐 필요가 있겠네요.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개인적으로는 이런 의문이 있습니다. 현재 이 정부의 정통성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되는가 하는 겁니다. 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겠지만 어쨌거나 국정원이 인터넷을 통해서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잖아요. 지금의 민주주의에서 정부의 정당성이란 표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고, 결국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사람이 가장 많은 권력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죠.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에 선거 때만 반짝 공론의 장이 형성됐다가 금방 사라지다시피 하고 다시 다음 선거 때 살아나는 식으로 지금 민주주의가 겨우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나마 유지됐던 민주주의와 공론의 장이 지난 대선에서 근본적으로 훼손됐습니다. 인터넷에 댓글 몇개 단 것이, 사실 몇개는 아니고 엄청나게 많다고 밝혀졌지만, 선거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보다도 공론의 장 자체가 훼손된 게 더 큰 문제잖아요. 저도 지난 선거 때 트위터를 했는데 정말 이상한 글과 계정을 많이 봤거든요. 어느새 잊혀져서 그렇지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나 싶은 글이 계속 올라왔어요. 그러다가 적발되고 문제가 되자 일시에 사라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었죠. 이건 어쩌면 진보적인 분들이 아니라 보수적인 분들이 더 분노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보수적인 의견을 달면 향후 10년쯤은 ‘너 국정원 알바지?’라는 반문에 부딪히게 될 테니까요. 공론의 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대통령도 그렇고 다들 법원의 판결을 기다려보자 하는데, 저는 국가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한 일에 대해 재판을 통해서만 진실을 규명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대통령이 자기 아래에 두고 있는 기관의 잘못에 대해 진실을 밝힐 의지가 있으면 법원의 판결을 기다릴 게 아니라 먼저 나서서 진상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면서 지난 정부에서 행해진 일이니 이 정부는 과거를 씻고 깨끗하게 출발하겠다고 선언해야죠. 그런 시기를 놓친 채 1년 반이 지나간 상황에서 이 정부의 정당성을 어디까지 인정하고 따라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아주 근본적인 민주주의 위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고 그게 밝혀지고 있는데도 시민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죠. 늘 같은 사람들만 모여서 시청 앞 광장에서 소리를 몇번 질러보지만 대통령은 반응하지 않고 시민들도 곧 잊어버립니다. 지방선거가 눈앞에 있는데도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아예 이슈가 안되고 있어요.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이 몇년 사이에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게 민주주의 또는 법치주의의 가장 큰 위기가 아닌가 싶어요.

 

백승헌 1987년에 만들어진 현행 헌법 전후에 무엇이 가장 다른가를 생각해보면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이 도전받느냐 아니냐인 것 같아요. 87년 연말의 대선과정에 많은 문제가 있었고 실제 군사쿠데타의 주역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그 선거를 포함해서 그 이후에도 선거의 정당성은 여간해서는 문제되지 않았죠. 공안정국,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광우병 촛불 등 정부마다 상당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무리 심각해도 선거 자체를 무효화하는 데는 이르지 않았어요. 반면 87년 이전의 권력은 아무리 압도적 다수에 의해 선출됐다 하더라도 독재정권이라는 지적을 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거의 정당성 위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집권자가 모든 책임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죠. 선거 자체도 그렇지만 민주주의가 유동적이고 발전적인 개념이라고 본다면, 선거 외의 시기에도 집권자는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 성찰적이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을 강화할수록 그것이 축적되어 권력의 정당성도 확보되고 우리 사회의 안정적인 발전이 담보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지난 대선과 그후 상황을 보면,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한 것이나 이를 조사해 처리하는 과정 모두에서 정당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법치주의의 관점에서 이번 사태를 보면요, 일단 법치주의란 어떤 세력이 권력을 잡든, 어떤 검찰이 있든, 어떤 사법부 판사가 사건을 담당하든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사건을 놓고 검찰이 현재의 집권자 아래서 수사를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국민에게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이것은 법 앞에서의 평등이 전혀 관철되지 않는 상황이지요. 게다가 수사과정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채동욱(蔡東旭) 검찰총장을 이른바 ‘찍어내기’ 했던 행태를 보면 이 정권이 결과적으로 정당성을 강요할 뿐이지,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설득하는 사회적 과정은 무시한다는 생각이에요. 아직 사건들이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이와 관련해서 유일하게 1심 판결이 난 게 김용판(金用判) 전 경찰청장 건인데, 과연 이 사건에서 검찰이 최선을 다했는가 또는 검찰총장이 사임하고 수사팀장이 강제로 자리를 떠야 되는 상황에서 공소유지를 제대로 한 것인가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용판 재판의 문제점과 대통령의 책임

 

전수안 원론적으로 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나 다수결에 의한 원칙을 요체로 한다고 보면 법치주의와 반드시 조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선진적인 자유민주주의와 실질적 법치주의 사이에는 충돌이 있을 수 없으며 민주주의가 선진적이지 않거나 법치주의가 실질적이지 않을 때만 충돌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대법원의 위헌법률심사를 견제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충돌 내지 민주주의의 우위를 과장했다는 견해도 있고요. 우리도 대통령 탄핵사건과 수도이전법 논란 등을 통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긴장을 체험하지 않았나요. 대의민주주의가 선출된 권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라면 법치주의는 권력이 솟아오르는 순간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밖에요.

자연스럽게 헌법재판 문제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데요. 미국과 달리 헌법에 명문의 규정을 두고 있는 우리 위헌법률심사제도는 대의민주주의가 법치주의 통제 아래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법치주의가 민주주의의 하위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접점에 위치한 헌법재판소의 위상과 역할을 무겁게 보는 이유고요. 자유민주주의가 위축된 시기일수록 헌법재판소는, 재산권 보호에는 적극적이고 자유권 보장에는 소극적이라는 지적과, 정치상황에 민감하기보다는 둔감한 것이 낫다는 우려에 귀 기울이고,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노동권과 정치활동 보장 등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여러 문제에 관해 유엔과 국제인권 기준에 부합하는 보편타당한 결정을 유보하지 않음으로써 시대적 소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로 돌아오면, 국정원 댓글사건은 국가권력의 창출에 민의가 아닌 국가기관이 개입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를 왜곡한 것 아닙니까.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중대한 사안이니까 사실관계를 분명히 하고 책임을 묻는 일은 재발방지를 위해 필수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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