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벤야민의 메시아주의와 희망의 목적론

 

 

김남시 金楠時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철학·문화학. 저서 『본다는 것』, 역서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권력이란 무엇인가』 『문자의 기호들』 등이 있음. namseekim@ewha.ac.kr

 

 

과거와 정의

 

세월호 사고로 어처구니없이 죽어간 아이들의 주검이 수습되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는 이 참사의 책임자들을 찾아내고 처벌하며, 이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제도를 개선하고 더 나은 구조와 관리 체계를 마련하자는 목소리들이 높다. 우리로서는 당연히,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밖에는 달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하게 되는 이 생각에는, 하지만 어딘가 부끄럽고 염치없음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어간 아이들을 우리 살아갈 사람들이 좀더 ‘나아진’ 세계에서 살게 되는 계기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을 앞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의 시간과 삶을 위해 전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자를 ‘엄벌’에 처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를 개선한다는 것,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시간에 영향을 끼치고 세상을 조금은 개선할지도 모를 이런 행위들은, 고작해야 미래를 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도달한 미래는 정의로울까?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고통스럽고 부당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그때마다 개선된 제도와 환경, 더 나은 미래를 다짐했음에도 우리의 현재가 여전히 그만큼 나아지거나 정의롭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죽어간 자들이 우리를 향해 제기한 요구에 우리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과거에 이루어진 부당하고 무고한 죽음, 고통과 분노, 눈물이 지닌 무거운 요구로부터 눈을 돌린 채, 앞으로 살아갈 우리만을 위해 미래의 행복이라는 꿈에 매달려온 탓이 아닐까?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주겠다는 정치가들의 허튼 약속을 믿고, 불행한 과거를 잊고 현재를 참으며 미래의 성공으로 보상받으라는 이데올로기에 매달려 죽은 자들의 요구를, 과거의 요구를 외면해온 탓은 아닐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씌어진 이 글에서, 나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을 빌려 오늘날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희망의 목적론’을 비판적으로 숙고해보고자 하였다. 그런 이유로 이 글의 초점은 벤야민의 메시아주의적 개념을 정치적으로 활성화하려는 이론들, 결국에는 희망의 목적론과 공모하게 되는 종말론적 정치론에 대한 비판에 맞추어져 있다. 지금도 진행 중인 세월호 희생자 수습과 그 와중에 드러난 국가기관의 치명적인 무능함은 이후 오랫동안 우리 사유와 실천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화적 질서1)

 

일반적으로 신화에 대한 이론은 신화를 부정적인 의미로, 가상이나 이데올로기, 허구적 의미 연관 등을 지칭하는 메타포로 사용한다. ‘신화에서 로고스(logos)로의 이행’으로 특징지어지는 이성의 발현을 긍정하는 계몽주의적 전통에서 신화란 이성적 검토를 거치지 않은 상상적 연관들이다. 그것은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에 의해 극복되었거나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그러한 점에서 ‘진리’ ‘실제’ ‘현실’과 대립한다. 그런데 벤야민에게서 ‘신화’(Mythos) 또는 ‘신화적’(mythisch)이라는 단어에 대립하는 것은 놀랍게도, ‘신적’(göttlich)이라는 형용사다. 그의 글에서 ‘신화적 폭력’에는 ‘신적 폭력’이, ‘신화적 질서’에는 ‘신적 질서’가 대립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벤야민에게서 ‘신화’ 또는 ‘신화적인 것’이 계몽주의 전통의 이론과는 다른 관점에서 파악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벤야민은 ‘신화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지향하지만, 그것은 계몽이나 혁명 등의 세계 내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이 말하는 ‘신화적 질서’는 특정한 역사 또는 정신 단계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메시아적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와 인간, 그들이 연루되어 있는 사회적 삶의 상태를 지칭하는 탈()역사화된 개념이다. 벤야민은 ‘신화적 질서’를 ‘빚/죄의 연관’(Schuldzusammenhang)이 지배하는 질서라고 특징짓는다. 신화적 질서의 특징인 “빚/죄의 연관”이라는 개념은 빚과 부채의 계보학적 관계에 대한 니체(F. Nietzsche)의 논의2)에 근거하고 있다. 신화적 질서는 인간의 생명을 신화의 신들에게 ‘빚지게’ 만듦으로써 인간에게 ‘죄’의 의식을 갖게 하며, 신화적 질서를 대리하는 법은 빚으로서의 죄에 대한 판정과 처벌의 개념과 함께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통치자의 자의(恣意) 대신 법질서에 의거하는 정치를 역사의 진보로 보았던 계몽주의적 사유와는 달리, 벤야민은 법적 질서가 지배되는 상태를 결코 정의로운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벤야민에게 “법의 질서는 인간의 데몬적(dämonische) 실존단계, 사람들의 관계만이 아니라 신에 대한 그들의 관계까지도 법적 규정(Rechtssatzungen)에 의해 규정되던 실존 단계의 잔재가 시대를 지나 남아 있게 된”3)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법적 질서는 파라다이스 상태의 근원적 행복, 무구함의 상실과 더불어 등장한 것이다. 벤야민에게 법적 질서는 창조 상태의 순수한 이름언어가 타락한 결과 생겨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판단하고(urteilend), 판결을 내리는(richtend) 언어4)와 더불어 등장한다. “그 언어가 최초의 인간들을 파라다이스에서 추방했고, 아니 그들 자신이, 유일하고도 깊은 빚짐(Schuld)으로 처벌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영원한 법에 따라 그 언어를 부추겼다.”5) 대상을 ‘옳은 것’과 ‘그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판정하고 판결을 내리는 언어는 그 언어 외부에 존재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의 기준과 규범을 유지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에 따라 법적 질서는 그를 어기고 훼손하는 행위를 죄로 선언하고 처벌하는 구조6)를 만들어낸 것이다.

신화적 질서의 가장 큰 부정성은, 인간의 삶을 ‘결단’ 대신에 ‘운명’에, ‘빚 없음’(Unschuld) 대신에 ‘빚짐’(Schuld)의 연관 속에 짜넣음으로써 불행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신화적 질서는 “그것의 유일하게 구성적인 개념이 불행과 운명이며, 그 내부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해방의 길도 존재하지 않는 질서”7)다. 인간이라면 지니고 태어난다는 근원적 원죄이든, 그 원초적 빚짐(Urschuld)을 사해주기 위해 희생한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적 빚짐이든, 사회적·정치적 혹은 경제적 의미에서의 빚짐이든 이 ‘빚짐의 연관’에 붙들려 있는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 빚/죄가 우리가 갚아야 할 것이든, 누군가에게서 돌려받아야 할 것이든 우릴 자유롭지 못하게 함은 마찬가지이다. 신화적 질서는 보복 또는 보상을 요구하며, 그를 위한 명분과 이념을 내세우면서, 이 빚과 빚짐의 상태를 지속시키면서, 결국 우리를 “살아 있는 것의 빚의 연관인 운명”8)에 종속되게 한다.

 

 

신적 폭력

 

이러한 신화적 질서를 신적 질서와 대비시키면서 법과 폭력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글이 「폭력 비판을 위하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