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김사인 金思寅
시인, 동덕여대 문창과 교수.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이 있음. silentin@naver.com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사실, 역사, 그리고 시」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강경석(사회) 문학초점을 좌담형식으로 개편한 뒤 두번째 시간입니다. 문단의 원로·중진급 선배님 한분씩을 모셔서 세대간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데요, 오늘 손님은 김사인 선생님입니다. 특별히 소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 알려진 시인이시고, 최근에는 해설을 곁들인 사화집 『시를 어루만지다』(도서출판b 2013)를 펴내기도 하셨고 새 시집도 준비 중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엔 뜸하시지만 예전엔 평론가로도 활약하셨지요. 자꾸만 고사를 하셔서 겨우 모셨습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우선 독자들께 인사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사인 이런 떨리는 자리에 불러주셔서 가문의 영광입니다.(웃음) 아마 『시를 어루만지다』라는 책 바람에 프리미엄이 좀 붙은 것 아닐까 합니다. 근 20년 만에 다시 참석하는 『창비』 좌담자리가 감개무량하기도 하고요.
강경석 개편 첫회인 지난호 문학초점을 읽어보셨을 텐데 소감 한 말씀씩 나눠보죠. 주변 반응을 전해주셔도 좋겠고요.
김사인 제 느낌은 이전의 서평 방식에 비해 구어체의 좌담 형식이, 더구나 한국 비평계의 두분 신예와 원로인 백낙청(白樂晴) 선생께서 화제작이나 동향에 대해 함께 짚어주시니까 읽기에 더 입체감이 있었습니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서도 실감이 더할 뿐 아니라 참가자 세분의 숨결 같은 것까지 잘 전해져서 개인적으로 그전보다 신선하고 좋았어요. 다만 『창비』의 다른 분야 대담에 비해 좀더 자유롭고 ‘문학적’인 좌담이 되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야 글이 아니라 입말로 이루어진다는 장점이나 개성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오늘 제가 허튼소리를 좀 하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웃음)
송종원 교사들이 『창비』를 많이 구독하잖아요. 중·고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친구들 중 하나에게 전해들으니, 동료 선생님이 지난호 문학초점을 펼쳐놓고 읽는 걸 봤는데 ‘재밌다, 이렇게 보니 접근하기 쉽다’고 했다 하더군요. 나아진 면이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웃음) 하지만 여전히 문제점도 보여요. 군데군데 보충 설명이 필요한 용어로 채워져 있고, 또 한 작품에 대해 뭔가 완결된 형식으로, 완결된 내용을 전달하려는 의욕도 약간 앞서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찌 보면 시나 소설이란 것도 모두 일종의 변죽을 울리는 식으로 씌어지는 거잖아요. 정답을 도출하기보다 불확정성을 인식하고 애매하고 모호한 지점에 도달하려 모험도 하고요. 앞으로 이 좌담도 그런 면을 염두에 두고 진행해도 좋을 듯해요. 다소 부정확하더라도 여유를 가지고 말을 주고받다 보면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틈이 생기지 않을까요.
김사인 예컨대 좀더 높은 자리에서 뭔가 완결된 평가를 내리려 하는 것이 비평가들의 일반적인 무의식인데, 그보다는 창작자들이 지금 애쓰고 있는 바의 복판에 내려가서 우리도 같이 앓는 것, 같이 치르고 같이 고민하는 과정이 육성을 통해 더 담길 수 있다면 좋겠어요.
강경석 이번호부터는 좀더 빈틈을 내서 독자들에게 여유를 제공할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다들 좋아하셨다니, 별로였던 분들은 면전이라 내색을 못하신 게 아닌지요?(웃음) 오늘은 1~3월 출간작 중에서 골라봤습니다. 소설로는 먼저 제목 외우기가 힘든 은희경(殷熙耕)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 2014, 이하 『눈송이』)와 박솔뫼의 첫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자음과모음 2014), 시집으로는 신해욱(申海旭)의 『syzygy』(문학과지성사 2014)와 유병록(庾炳鹿)의 첫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창비 2014), 그리고 나기철(羅基喆) 시인의 『젤라의 꽃』(서정시학 2014)입니다. 각각 다른 성향의 시집 세권과 소설 두권, 총 다섯권입니다. 선정 자체가 평가라기보다는 본지의 다른 지면에서 다룬 작품들을 제외하는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한 것이지요.
은희경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강경석 그럼 『눈송이』에 대해 먼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이 소설집이 저로서는 흥미로운 구석이 많았고 근래 본 소설 중에서 가장 느낌이 좋았습니다. 수록작 수준도 편차 없이 고른 것 같고요. 베이비붐 세대가 현실에서 겪는 곤혹스러움을 중심으로 그 앞뒤 세대가 어떤 난관에 봉착해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이야기로 보였어요. 지금으로서는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묵묵히 견뎌나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나 하는 메시지도 설득력이 있고, 연작소설처럼 연결되어 작품들이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형식적 면모도 눈에 띕니다.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이하 「독일 아이」) 같은 작품에 뜨개질 얘기가 나오는데 세대 격절(隔絶)이나 고립의 아픔을 견디는 뜨개질의 형식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근거 없는 낙관에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단순한 비관에 함몰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송종원 저 역시 좋았어요. 오랜만에 소설을 통해 감동을 받았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먹먹함이 밀려오더라고요. 일단 짚을 것은, 재현에 상당히 충실한 소설이라는 거예요. 한 시대의 실감에 접근하려면 소설읽기가 여느 통계자료를 들여다보는 일보다 유용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요즘 한국소설은 인물이 놓인 사회적 배경을 흐릿하게 둘 뿐 아니라 인물과 배경 자체가 알레고리적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많았는데, 이 소설집에서는 인물들이 풍부한 맥락 속에서 상당히 생동감있게 그려지고 있어요. 인물의 삶을 구성하는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매우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어 생생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사인 저는 잡지에 연재될 때의 『태연한 인생』(창비 2012)도 잘 봤는데, 이번 작품집에서도 은희경이 작가로서 예전보다 좀더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이 우선 좋았어요. 어설픈 체면 같은 것들을 거침없이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통이 커지고 편해졌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언어나 문장들에서도 여일하게 노력하는 ‘글꾼’의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요. 작가가 저와 비슷한 연배라서 더 그랬겠지만, 작품 속 화자의 시선이 갖는 세대적 위치며, 옛 세대와 자라나는 세대 양쪽을 중간에서 다 지켜보면서, 그렇지만 어떤 낙관적 전망도 가질 수 없다는 것, 어떤 회한 같은 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 이런 점이 제게는 남의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송종원 은희경 소설의 인물이라고 하면 어딘가 기가 센 느낌 내지는 명철한 이성을 가지고 냉소하며 살아가는 이를 떠올리게 되지요. 그런데 이번 소설에 그려진 인물들은 짠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많이 풍겨요.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지 못하고 스스로 그것을 잘라내는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엿보이고요. 가령 표제작 「눈송이」의 주인공 안나는 사랑의 대상에게 다가가는 대신에 주위를 맴돌죠. 반면 같은 대상을 대하는 루시아의 태도는 상당히 적극적이고요. 안나의 행동 배경에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루시아에 비해 빈곤한 처지가 놓여 있어요. 그래서 사랑의 욕망에서조차 적극성을 띠지 못하죠. 대신에 소소한 삶의 경험에서 빚어지는 미세한 감각들에 집중함으로써 저 욕망의 결여를 채워나갈 때는 안쓰럽고도 먹먹해집니다. 「프랑스어 초급과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삶은 도시의 중심부에 진입하지 못한 채 중심도시의 외곽, 그러니까 신도시에서 희망 없는 시간을 견디는 모습을 보여줘요. 이렇듯 자신이 놓인 계급적 위치에 대한 직관적인 자각에 의해서건 혹은 사회의 요구에 의해서건 알아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포기하는 모습이 안타깝고 쓸쓸하고 먹먹하게 다가왔어요.
그런데 그런 인물들이 소소한 행위 또는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자신을 조금씩 회복해가죠. 이게 읽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면이 있어요. 「독일 아이」의 인물은 뜨개질하면서 허술하긴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조금씩 만드는 연습을 해나가죠.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에서는 경제적 여건 때문에 원치 않은 이민자의 삶을 살며 주눅이 들어 있는 어머니가 이국의 문화와 부딪히며 조금씩 자신의 욕망을 발언하는 과정을 겪어요. 가장 뭉클했던 작품은 「금성녀」였어요. 한 인물의 삶을 거슬러 오르는 서사 속에 한 사람의 삶을 구성했던 다양한 역사적 맥락, 그리고 그 안에서 한 개인이 겪어낸 아픔과 욕망의 좌절, 겸허한 운명에의 수긍 같은 것을 유연하게 풀어내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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