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인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나

 

 

백낙청 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 영문학.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 최근 저서로 『2013년체제 만들기』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회화록』(전5권)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인문학의 새로움 찾기

 

근년 우리나라에는 ‘인문학의 위기’ 담론과 더불어 ‘새로운 인문학’ 또는 ‘인문학의 창신(創新)’을 추구하는 논의가 빈번하다.1) 그런데 인문학의 새로움은 과연 어디서 올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근대 이전의 전통적 인문학이라는 ‘오래된 미래’에서, 다른 한편으로 ‘날로 새로운 현실’에서 온다. 아니, 그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둘의 ‘만남’이 중요한 것은 ‘오래된 미래’가 곧 지속가능한 현재는 아니며,2) 새로운 현실 그 자체가 일정한 지적 기율을 갖춘 ‘학()’을 형성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학적 성취는 지적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개인의 마음작용과 인류의 문명 차원에서 일대 전환을 수반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인문학 위기설이 전국적 쟁점이 된 계기는 아마도 2006년 전국 80여개 대학교 인문대학장들에 의한 선언이었을 것이다. 이후 연구비의 증액을 포함하여 정부지원 확대 등의 가시적인 효과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 내 인문학과들의 곤경이 기본적으로 개선되었다고 보는 이는 드물다. 사회 전반에 걸친 취업경쟁 중시 풍토에서인문학이 벤처 기업가에게도 소중하다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발언이 거듭 인용되는 중에도인문학과 졸업생들의 입지는 좁아져왔고, 대학당국의 신자유주의적 경영논리 강화 추세는 그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인문학과 교수들 대다수가 현존 인문학이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이나 인식론적 전제를 성찰하기보다 여전히 기존 학문의 분업체제 속에서 자신들의 몫을 늘리거나 지켜내는 일을 주안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반면에 대학 바깥에서는 ‘인문학 붐’이 거론될 정도로 이런저런 활동이 번성하다. 물론 이들 중에는 기존 인문학의 단순한 대중화, 심지어 속류화상품화의 사례도 흔하다. 더구나 “무엇을 하든 인문학적 바탕이 없으면 괴물이 된다”3)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정부기관을 비롯한 수많은 단체들이 ‘인문’이라는 간판 달기에 뛰어들어 ‘붐’을 가속화하는 상황은 독립성과 비판의식을 생명으로 하는 인문정신에 역행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런 행태와 별도로 대안인문학, 실천인문학, 현장인문학 등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여러 진지한 활동들은 인문학의 새로움을 찾아가는 작업의 일환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4)

다만 이들의 작업이 새로운 인문학을 정립하는 데에는 아직 못 미치는 것 같다. 예컨대 이수영(李洙榮)의 「연민의 복지를 넘어 인간 존엄의 복지로: 인문학이 바라본 하나의 현장」은 생생한 현장사례일 뿐 아니라 스피노자(B. Spinoza), 니체(F. Nietzsche), 베르그송(H. Bergson), 들뢰즈(G. Deleuze) 같은 ‘전통적인’ 철학 텍스트를 “단순히 교양주의적 인문학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지점”5)에서 새로 읽을 길을 열어준다. 나아가 ‘복지’에 대한 통념이나 기존 정책들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하는데 이 또한 인문학의 실천성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면모이다. 그러나 인문학의 새로움을 성취하는 문제 자체는 글의 범위 안에 들어 있지 않아 독자들의 숙제로 남은 셈이다.

이 숙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역시 대학이라는 현장과의 소통과 연대를 무시할 수 없다.6) 그 점에서 대학 내부의 움직임으로 ‘21세기 실학으로서의 사회인문학’을 주제로 10개년 연구계획을 수행 중인 연세대 국학연구원의 노력이 돋보인다. 그 일환인 사회인문학총서의 발간사는 “사회인문학(Social Humanities)은 단순히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문학의 사회성 회복을 통해 ‘하나의 인문학’, 곧 통합학문으로서의 인문학 본래의 성격을 오늘에 맞게 창의적으로 되살리려는” 노력이라고 밝히고 있다. 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고 나는 간행된 성과물조차 일부밖에 접하지 못했지만,7) 공감되는 취지일뿐더러 대학이 지닌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이 부분적으로나마 그런 취지로 동원된다는 점을 높이 사주고 싶다. 그런데 백영서(白永瑞) 사업단장의 거듭된 강조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이 사회과학뿐 아니라 근대학문의 주축에 해당하는 자연과학과도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과제는 천착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총서 책임기획위원들의 『사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머리말 첫 문장도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탐구하고 해법을 제시하려는 지적 노력들”8)을 말할 뿐 ‘자연에 대한 탐구’를 언급하지 않는다.9) 이제까지의 ‘사회인문학’ 연구에서 소홀히된 자연과학과의 만남이 어째서 핵심과제인지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2. 인문학의 ‘오래된 미래’

 

유럽과 동아시아 등의또는 내게 생소하여 거론을 생략하지만 인도, 이슬람권 등 다른 지역의전통시대 인문학을 ‘오래된 미래’라 부르는 것은, 옛날의 인문학이 각기 제 나름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길을 탐구하는 종합적이며 실천적인 학문으로서 인문정신의 실천인 동시에 체계적인 앎이 되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요구에 부응했고, 그런 지혜를 담은 ‘고전’을 남겼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그야말로 전통적인 학습 및 교수 방식에 부합한다. 그러나 전통이 일단 해체 또는 변용된 새로운 현실에서 ‘오래된 미래’를 현재화하려는 시도는 전통이 그대로 살아 있던 시절의 ‘옛것 익히기’와는 다른 차원의 작업이기 마련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오래된 미래’가 ‘현재’가 아니게 된 경위를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이 곧 새로운 인문학의 학적 과제이기도 한데, 이는 사회과학적 과제인 동시에 기존 사회과학의 기본전제들을 재검토하는 작업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근대 세계체제, 인문정신, 그리고 한국의 대학」에서 월러스틴의 『지식의 불확실성』10)을 주로 원용했는데, 여기서 그 논의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옛날의 인문학과 성격을 달리하는 근대적 지식체계가 유럽에서 성립한 결정적 요인은 월러스틴의 설명대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탄생이었다. 근대과학의 ‘객관적’ 지식은 자본주의와의 친화성을 과시하면서 지적 권위를 확고히 인정받았던 것이다. “내가 이끌어내는 분명한 결론은 기술혁신이 중심적으로 되려면 다른 무엇보다 먼저 자본주의가 있어야 하며 그 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권력관계의 현실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근대과학은 자본주의의 자식이며 자본주의에 의존해왔다. 과학자들은 실재하는 세계에서 구체적인 개선의 전망(…)을 내놓았(…)기 때문에 사회적 재가와 지지를 얻었다. 과학은 성과를 냈던 것이다.”11)

18세기말 프랑스대혁명이라는 급격하고 대대적인 사회변동 이후에는 그러한 지식을 인간사회에도 적용하려는 시도로 분과화된 사회과학이 성립하게 되었다.12) 실제로 그 전까지는 오늘날 사회과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홉스(T. Hobbes)와 애덤 스미스(Adam Smith), 루쏘( J.-J. Rousseau) 등의 저서가 어느 한 분야로 국한하기 힘든 ‘인문학적’ 성격을 띠었다. 물론 그 흐름은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아주 단절된 것은 아니다.

20세기 중반을 넘기면서는 학문 각 분야의 내부에서 자연과학의 진리를 포함한 ‘객관적 진리’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13)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최종적 위기국면에 접어든 현상의 일환인바, 월러스틴의 책 제목대로 ‘우리가 아는 세계’가 이중적 의미에서, 곧 우리에게 알려진 ‘자본주의 세계’와 우리의 앎을 구성해온 ‘지식 세계’의 동시적 종언을 뜻하는 것이다.14) 이제 인문학의 ‘오래된 미래’를 현재화하는 작업이 새로운 인류문명의 설계에 필수적이 된 것이다.

이 작업에서 동아시아와 유럽의 옛 인문학은 상통하면서도 각기 다른 잠재력을 지닌다. 예컨대 서구 근대의 과학이 자본주의시대 특유의 지식으로 발달된 데에는, 물론 자본주의가 유독 서구에서 먼저 발생한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15) 서양의 전통적 인문학 자체가 ‘객관적’이고 ‘순수한’ 앎의 발달에 유리한 요소를 내장했다는 정신사적 배경도 있다. 따라서 그만큼 근대적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기가 힘든 관성을 지닌 동시에, 서양의 지식세계에서 근대적 지식의 한계를 논증하는예컨대 위의 졸고 「세계시장의 논리와 인문교육의 이념」에서 거론된 하이데거(M. Heidegger)의 사유나 해체론(deconstruction) 또는 ‘복잡성의 과학’(science of complexity) 같은성과가 나올 때에는 남다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동아시아는 자본주의와 과학기술문명의 후발주자로서 근대 세계체제로의 편입과 근대 학문체계의 수용이 시기적으로 늦었을 뿐 아니라 타율적으로 진행된 면도 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전통 인문학의 실천적인 성격이 더욱 강했기 때문이랄 수도 있지만, 강요된 후발주자인 만큼 상당기간에 걸쳐 서구의 학문과 인식론에 대한 예속성을 벗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