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카라따니 코오진과 맑스

 

 

유재건 柳在建

부산대 사학과 교수. 역서로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 『근대 세계체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등이 있음. jkyoo@pusan.ac.kr

 

 

1. 머리말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요즘 같은 시절에 전체 세계사를 ‘교환양식’의 변화과정으로 해명하겠다는 시도는 얼핏 진부해 보인다. 생산양식 운운하는 것도 식상한 터에 또 무슨 교환양식인가 하는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최근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 모색하는 교환양식론은 그 발상이 참신하고 창의적일 뿐 아니라, 실천적 문제의식 또한 선명하다. 2001년 출간된 『트랜스크리틱』으로부터 시작하여 『세계공화국으로』와 『세계사의 구조』에서 전개되는 그의 역사이론은 역사학·경제학·철학·인류학·종교사회학·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와 대화하면서 독자적인 지평을 열어가고 있고, 논리전개도 만만치 않다.1)

카라따니의 이론적 모색에는 1989년 국가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를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그는 기승을 부리는 신자유주의 앞에 국가사회주의가 대안이 못되는 현실에서 미래사회에 대한 대안적 상상력과 이념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역설한다. 요즘도 자본주의 세상 너머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지만, 개략적이나마 그 미래의 상()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과거와 같은 국가적 통제의 발상에 머무르거나 혹은 사민주의적인 복지국가를 상상하는 경우도 많은데, 카라따니는 그런 방식으로는 자본주의가 결코 극복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오늘의 세계는 자본주의와 네이션(nation), 그리고 국가라는 세가지 교환양식이 상호보완적인 삼위일체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수단의 국유화나 공동체적 통제에 의해서(즉 국가나 네이션에 의해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카라따니의 입론에서 독창적인 것은 이러한 자본제〓네이션〓국가의 삼위일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안팎에서 제4의 교환양식을 실현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제4의 교환양식을 그는 자유가 보장되는 시장경제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끝없는 자본축적은 지양되는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의 교환양식으로 상정한다. 이 교환양식은 맑스(K. Marx)가 『공산당선언』에서 제창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어소시에이션 계보에 속하지만, 자본제〓네이션〓국가를 넘어선 세계체제 차원의 것이기에 카라따니는 칸트(I. Kant)의 ‘세계공화국’ 이념의 계승을 표방한다. 그것은 전지구 차원에서 새로운 대안적 체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지향의’(libertarian) 사회주의적 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라따니는 교환양식을 축으로 한 역사이론을 바탕으로 새롭게 자본주의 극복방안을 모색하는데, 그 모색이 줄곧 맑스 사상과의 꾸준한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특징적이다. 교환양식론은 맑스의 생산양식론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라 할 수 있지만, 양자간 관계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 카라따니 스스로가 맑스 읽기, 『자본』 읽기를 평생의 화두로 삼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사상에서 맑스와의 대화는 결정적인 것이다. 그는 서슴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맑스를 읽는 것, 그것도 『자본』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문학비평이라고 생각했습니다.”2) 실제 맑스 사상에 대한 그의 과감한 재해석과 비판은 찬반 여부를 떠나 독창성과 더불어 상당한 통찰을 보여준다. 이 글은 카라따니의 교환양식론의 기본 골자를 맑스 사상과 관련지어봄으로써 그 이론적 위치와 실천적 함축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인간과 자연의 교환

 

역사를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조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맑스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카라따니의 주장이다. 맑스가 ‘생산’ 개념을 쓸 때 언제나 인간을 자연과의 상호관계에서 보는 관점에 근거했기 때문에, ‘생산’을 ‘신진대사’(Stoffwechsel: 혹은 물질교환)로, 즉 광의의 ‘교환’(Wechsel)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내가 ‘생산양식’이 아니라 ‘교환양식’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본다고 했을 때, 그것이 맑스주의의 통념과 다르다는 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반드시 맑스와 다른 것은 아니다. 나는 ‘교환’을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고 있다. (…) 맑스가 ‘생산’이라는 개념을 고집한 것은 젊은 시기부터 일관되게 인간을 근본적으로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시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헤스(M. Hess)에게서 배우고 ‘신진대사’로서, 바꿔 말해 ‘교환’으로서 보았다.3)

 

카라따니의 전체 생각 밑에 깔린 흥미로운 논점은 우리가 맑스주의라고 알고 있는 것이 오히려 맑스 자신이 비판했던 사유체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맑스주의’가 맑스 자신이 일관되게 비판했던 헤겔(G. W. F. Hegel) 철학 및 고전경제학 체계와 유사한 일종의 근대주의적 관점에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라따니는 맑스주의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인간의 노동을 특권화하는 산업자본주의의 발상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고 본다. 그런 사고방식에서는 ‘생산’이 자연과의 ‘교환’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오직 인간 노동의 창조성이란 면에서 높이 평가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카라따니가 주목하는 것은 맑스의 『고타강령비판』 첫 대목이다. 1875년 라쌀레주의자들과 일부 맑스주의자들이 독일노동자당의 강령으로 채택한 「고타강령」의 첫 조항은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데, 맑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 바 있다.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의 원천이다(그리고 물질적 부는 바로 이 사용가치로 이루어진다!). 노동 그 자체는 자연력의 하나인 인간 노동력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 부르주아지가 노동에 초자연적인 창조력을 부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4)(강조는 맑스)

 

맑스의 이런 생각은 저작 곳곳에서 거듭 강조되는 것이라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다만, 맑스 자신의 사상과 이런저런 맑스주의가 혼동되어 뿌리깊은 오해가 만연한 터라, 카라따니의 주장은 맑스 사상의 핵심적 면모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의미가 있다. 역사를 자연에 대한 정복과정으로 간주하면서 자연에 대한 인간 노동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인간관은 노동을 “자연력의 하나인 인간 노동력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보는 맑스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다. 『자본』에서 맑스는 인간의 노동을 “사용가치의 조형자(Bildner)”로 표현하기도 했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매개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생활을 매개하기 위한 영구적인 자연필연성”이지만 “생산과정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연 그 자체의 방식에 따르는 것뿐, 다시 말해 인간은 단지 소재의 형태를 바꿀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5) 맑스가 이런 관점 여부를 중대한 문제로 여긴 것은 분명한데, 그는 자연을 인간을 위한 대상, 인간 욕구에 종속시키는 대상으로 간주해 그 자체 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근대 특유의 부르주아적 자기망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에서부터 맑스가 철학과 경제학을 비판하면서 강조한 것이 바로 이런 자연사적 관점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점은 자주 간과되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헤겔이 대변하는 인간주의 철학을 극복하기 위한 유물론적 고투로 점철된 『경제학·철학 초고』를 두고서도 유물론과 대립되는 의미의 ‘인간주의 철학’의 저술이라고 오해해 상찬하거나 비판하는 일이 일반화되어 있기도 하다. 맑스는 거기서도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기 자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일 뿐”이라 주장하면서 “자연주의(Naturalismus)만이 세계사의 행위(Akt der Weltgeschichte)를 파악할 수 있다”6)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맑스의 생산 개념을 광의의 교환으로 받아들이는 카라따니의 생각에 무리스러울 것은 없어 보인다. 아마도 그는 주고받음, 소통, 교통 혹은 교류의 관계를 경제학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교환’ 개념이야말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상호의존성을, 인간과 자연이 동참한다는 뜻을 잘 나타내기에 맑스의 유물론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