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싸르트르의 소설론

소설과 전기 사이

 

 

윤정임 尹貞姙

불문학자. 공저로 『실존과 참여』 역서로 『상상계』 『시대의 초상』 『변증법적 이성비판』(전3권, 공역) 등이 있음. poulou58@hanmail.net

 

 

만일 글쓰기가 단순히 선전이나 오락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사회는 무매개적인 것의 소굴 속으로, 날파리나 연체동물 같은 기억 없는 삶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하기야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계는 문학이 없어도 넉넉히 존속할 테니 말이다. 아니, 인간이 없으면 더욱 잘 존속할 테니까.1)

 

 

들어가는 말

 

장 뽈 싸르트르( JeanPaul Sartre)에게 소설은 그의 모든 다른 활동처럼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었다. 그 인간은 그가 총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파악하려 했던 ‘개별적 보편자’(luniversel singulier), 자서전 『말』(1964)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 유명한 문장 속의 ‘진정한 인간’이다.2) 평생을 지속한 이 인간이해의 작업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문학작품이고 철학서이며 전설처럼 회자되는 ‘행동하는 지성’의 면모일 것이다.

단편집 『벽』(1939)을 제외하면 싸르트르가 ‘소설’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작품은 『구토』(1938)와 미완의 『자유의 길』 연작(1945~49)이 전부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구토』에서 ‘소설’이라는 표제어를 삭제하기를 바랐으며, ‘자유로 나아가는 행보’를 보여주고자 했던 『자유의 길』은 끝내 그 길을 다 가지 못했다. 까다로운 그의 소설관을 적용시켜 본다면 싸르트르의 소설작품은 아예 없거나 ‘거의’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설 이외의 그의 글에서 우리는 수많은 ‘소설적 요소들’을 마주하게 된다. “문학은 철학처럼, 철학은 문학처럼” 써냈다는 비판은 내내 그를 따라다니며 이른바 ‘정통’ 문학계와 철학계의 은근한 따돌림을 용인해주었다. 장르와 영역을 뒤섞어버린 대담한 시도에 대한 의미부여는 뒤로하고, 우선은 그렇게 된 이유와 의도가 궁금하다.

싸르트르는 소설을 썼고 소설에 대한 비평을 했으나 체계적인 ‘소설론’을 내놓지는 않았다. 『문학론』에 소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드러나긴 하지만, 참여문학론을 주장하기 위해 작성된 그 글에서 자기강요적인 논지를 거두어내고 소설에 대한 그의 ‘진심’만을 가려내는 일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오독의 우려도 크다. 그렇다고 전기적 문학비평에서 발견되는 소설론과 ‘소설적 요소’들까지 모두 포함시켜 논의를 전개하기에는 역량과 지면이 턱없이 모자란다.

그리하여 아주 소박하게 그가 왜 소설을 그만두고 ‘소설 같은’ 전기비평에 몰두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논의를 한정하기로 한다. 이를테면 소설가 싸르트르의 실패담이 될 터인데, 이것이 그가 늘 경계하던 ‘상공에서 조망하는 사유’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 안에 들어가 벌인 일이니 최소한 구체성의 미덕만큼은 전달되기를 바란다.

 

 

1. 전기의 환멸과 소설의 구원

 

첫 소설 『구토』에서 시작해보자. “철학적 확신이 낳은 효과로서의 문학적 아름다움”3)이라는 상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테제소설’이라는 딱지를 떼버리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소설의 외양과 윤곽을 간직하고 있고, 허구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상의 작품”4)이라는 싸르트르식 소설의 정의를 지키고는 있지만, 작품 전면에 두드러진 철학적 내용으로 인해 『존재와 무』(1943)의 ‘소설적 버전’이라는 평판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일기형식인 이 소설의 주인공 로깡땡은 역사 저술가이다. 그는 18세기의 정치 음모가인 롤르봉 후작(물론 가상의 인물이다)의 과거를 추적하여 그에 관한 역사전기를 작성하고 있는 중이다. 로깡땡이 부빌에 머물고 있는 이유도 롤르봉에 관한 사료가 그곳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료는 신통치 않았고, 되살려야 하는 롤르봉의 과거 행적은 묘연하기만 하다. 이질적이고 모순된 몇몇 객관적(이라고 알려진) 사실만으로 한 인간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작업 앞에서 그는 차츰 무력감을 느끼고, 문득 자신이 ‘허구와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기란 이미 완결된 삶을 기록하는 일이기에 거꾸로 된 순서로, 즉 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로깡땡은 ‘뒤집힌 시간성’을 취할 수밖에 없는 전기의 시각(時刻)이 뭔가 진실하지 못하다는 반성에 이른다. 결말에 따라 이전의 일들을 꿰어맞추거나 변형하고, 시간을 꼬리로부터 되밟아가는 일. 그것은 매순간의 무정형한 삶을 논리적 연계 속에 정돈하여 실제의 삶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꾸려내는 속임수이다.

이야기에 몰두한다는 것은 삶을 실존적으로 마주하지 않고 자기기만에 빠져 사는 것이다. 물컹한 현재만 즐비하게 이어지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모험과 완벽한 순간과 경험이라는 드라마틱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일이 바로 이야기의 환상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야기’로 대체되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순간 실존의 죄를 벗어났다는 착각을 얻는다.

이야기에 대한 환멸로 로깡땡은 전기작업을 포기한다. 그 무엇도 무정형한 의식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을 온전하게 구원해주지 못하며, 그 어떤 일을 해도 존재의 우연성과 근거 없음에 대한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그 순간 들려온 재즈음악. 그 완결된 우주 속에서 희한하게 잠재워지는 구토. 그리고 부러움. 나도 저 음악처럼 되고 싶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저 음악을 만들어낸 사람이라도…… 책을 쓰는 일, 그러나 전기는 절대 아니고 아마도 소설 같은 것. 그리하여 먼 훗날 어떤 사람이 나의 소설을 읽고 그것을 써낸 나를 생각하며 나의 삶을 되살려준다면…… 그렇다면 나는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전기를 포기한 로깡땡은 소설에서 구원을 꿈꾼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시금 전기적 환상에 빠져들고 있다. 누군가의 전기를 쓰는 일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전기의 대상이 되는 일, 즉 전기작업의 주체에서 객체로 전환된 것이다. 전기적 환상은 뿌리 뽑혀지지 않았다.

 

 

2. “소설기법은 언제나 작가의 형이상학에 되돌려진다”

 

‘문학과 사회의 관계’라는 고색창연한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문학론』은 그 의도적인 도발성으로 인해 오래도록 입에 오르내렸고, 저자에게 참여문학론이라는 갑갑한 투구를 안겨주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역설하기 위해 도입된 이분법적 사유(예컨대 시와 산문의 거친 구분)와 논리적 비약은 두고두고 거센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5)

오늘날은 그 책에서 시대적이고 논쟁적인 부분을 거두어내면 그것이 제기하는 질문(쓴다는 것은 무엇이며, 왜 글을 쓰며, 누구를 위해 쓰는가)은 곱씹어볼 만한 원론적인 것이라며 날선 비판의 칼을 거두고 책을 ‘선용’하려는 분위기다. 결과적으로 애초에 싸르트르가 강조하고자 했던 ‘참여’를 빼버리고 ‘문학’론으로 읽어냄으로써 『문학론』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자격을 부여받은 셈이다.

이 책의 3장인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에서 싸르트르는 작가와 독자 그리고 작품의 역사적 연루를 지적한다. 우리 모두는 “역사적 상황에 연루되어 있는 존재들”이며, 작가의 진정한 참여는 그러한 “자연적 연루상태를 반성적 연루로 이끌어 갈 때” 이루어진다. 사회에 대한 의식이 있는 작가라면 후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글을 쓰며, 그렇게 써낸 글은 당연히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아래 싸르트르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의 관계를 12세기 이래의 프랑스문학사를 통해 개관한다. 지배계급과의 관계로 짚어본 작가의 위치는 어디인가? 작품의 실제적인 독자는 누구인가? 그같은 역학관계가 변화시킨 사회와 문학은 어떤 모습인가? 싸르트르의 고백처럼 “편파적 시각”으로 작성된 이 ‘독자와 독서의 사회학’에 따르면 18세기 부르주아 출신의 작가들은 자기가 속한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글을 썼고, 그 시대가 요구한 문제를 자기 문학의 구체적인 소재로 삼을 수 있었던, 프랑스 역사상 유례없이 행복한 작가들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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