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199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cyndi89@naver.com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사실, 역사, 그리고 시」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송종원(사회) 가을호 문학초점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작품선정 과정을 짧게 언급할까 합니다. 지난 계절에 나온 소설과 시집 가운데 작품의 성취와 완성도를 기준으로 하고 다양한 성향, 연배, 성차 등의 배분 역시 고려했습니다. 더불어 지면 제약도 어쩔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네요. 그 과정에서 아쉽게 좌담 대상에 포함되지 못한 책도 꽤 있었음을 밝혀둡니다. 이번호에는 1996년 등단하신 이래로 현재까지 문학비평 현장에서 꾸준히 활동해오신 평론가 백지연 선생님을 초대손님으로 모셨습니다.

 

백지연 초대손님이라고 하니 새삼 부담과 무게가 느껴지는데요.(웃음) 요즘 문학비평이 독자와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여러가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지난 봄호부터 이렇게 좌담으로 서평의 형식을 개편한 것도 비평이 독자에게 좀더 친밀한 방식으로 닿아야겠다는 의미가 있겠지요. 오늘 이 자리에서도 작품에 대한 호평과 함께 아쉬운 점도 고루 짚으면서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끌어내었으면 좋겠습니다.

 

송종원 오늘 좌담에서 다룰 작품집은 다섯권입니다. 소설로 성석제(成碩濟) 장편 『투명인간』(창비 2014)과 박형서(朴馨瑞) 소설집 『끄라비』(문학과지성사 2014), 시집으로는 이시영(李時英) 시인의 『호야네 말』(창비 2014), 이수명 시집 『마치』(문학과지성사 2014) 그리고 이현호(李賢浩)의 『라이터 좀 빌립시다』(문학동네 2014)입니다.

먼저 다룰 작품은 『투명인간』입니다. 『투명인간』은 작가의 전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2), 『조동관 약전』(2003) 등의 작품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가가 워낙 ‘이 사람을 보라’ 식의 인물 형상화가 장기여서 그럴 텐데요. 이 작품 역시 제목을 좀 늘여보면 ‘투명인간 김만수전’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김만수 캐릭터를 어떻게 읽으셨는지 먼저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성석제 장편소설 『투명인간』

 

165-문초-투명인간_fmt 백지연 『투명인간』은 성석제의 어떤 소설보다 많은 이야기가 빼곡히 담긴 작품이에요. 전쟁과 분단,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1980년대를 가로질러 현재까지, 이렇게 긴 연대기를 담고 있으니까요. 이전의 성석제 소설과 비교해보면 1980년대 이후의 시대 풍경까지 담고 있는 점이 특별하고요. 개인적으로는 몰입하면서 무척 재미있게 읽은 소설입니다. 성석제 특유의 활달한 입담이 갖는 장악력도 대단하죠. 소설이 다루고 복원하는 시대풍속을 제가 모두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적으로 와닿았어요. 학교 점심시간에 혼식 검사를 통과하려고 친구 도시락에서 보리를 몇알 빌려서 얹었던 거며, 연탄가스를 마시고 어지러웠던 일도 생각나고요.(웃음)

주인공인 김만수는 이름만으로도 이전 작품의 유명한 캐릭터인 ‘황만근’을 연상시키는 면이 많죠. 순수하고 선량한 품성도 그렇고요. 황만근이 애도의 기억 속에 간직되는 초월적 인물이라면 김만수는 우리의 현재적 분신처럼 느껴지는 좀더 밀착적인 인물이에요. 김만수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 온갖 고난과 역경을 통과하며 분투하는 삶 자체가 분단 이후의 근대화 과정과 고스란히 맞물리지요.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어도 정작 뚜렷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투명인간’이 되고 마는 가파른 삶이 비극적이면서도 생생하게 다가와요.

 

송종원 ‘투명인간’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바가 크죠. 우선 경제 중심의 근대화에서 주변부적 삶을 강요받은 인물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김만수의 성격을 보자면, 말 그대로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인간형이기도 하죠. 경제적 근대화가 요구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전략적 가면을 쓴 인간형일 텐데 김만수는 그와는 동떨어진 아닌가 싶었습니다. 가면이 없는 우직한 인물로 볼 수 있죠.

 

강경석 좀더 거시적으로 볼 필요도 있어요.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삼대 서사입니다. 지식인 조부로부터 무지렁이 농사꾼 아버지, 그리고 김만수를 비롯한 육남매 이야기로 되어 있죠. 이 삼대가 통과해온 현대사의 굴곡진 여정을 김만수 중심으로 전개한 것이 특별합니다. 김만수의 형 김백수가 부잣집 여대생을 만나 『적과 흑』에 나오는 쥘리 렐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쥘리 렐은 추락할 때까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인물이잖아요. 김백수는 그러지 못하고 베트남전에서 병사하죠. 재능있고 출세욕이 강한 김백수는 중도하차하고, 한 시대의 집단초상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인 김만수는 끝까지 남는 겁니다. 김백수나 동생인 김석수처럼 욕망하는 인물들을 상대화하는 대신 황만근 류의 우직한 바보 캐릭터를 선택함으로써 흔히 말하듯 압축되고 왜곡된 우리 근대의 면모가 유연하고 폭넓게 드러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백지연 소설 속에서 여러번 강조되는 ‘산업역군’ 세대라는 말이 있어요. 산업화 과정에서 가족공동체를 뒷받침하는 물질적·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김만수 같은 인물이 해준 거죠. 김만수는 가족 가운데는 가장이고, 회사에 나와서는 또 구성원을 이끌고 보듬는 역할을 맡게 돼요. 읽다보면 어떻게 이렇게 착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람이 있는지 의아하다가도 만수의 삶에 얽혀드는 구체적 관계들을 보면 이러지 않을 수 없겠구나 싶어요. 만수네 형제가 성장하는 과정이 전혀 순조롭지 않죠. 한 예로 연탄가스에 중독된 두 누나 중 한명만 산소탱크에 넣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 나와요. 만수가 울면서 큰누나를 고르는 순간, 이미 그는 더이상 아늑하고 평화로웠던 공동체 속에 생존할 수 없게 된 거지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도시로 와서 집안의 가장이 되지 못하고 만수가 그 몫을 떠안죠. 만수가 지닐 수밖에 없는 책임감이나 죄의식은 한국 근대의 가족표상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이에요. 모두가 다 교육받고 잘살 수 없었고, 그래서 누군가는 자기 인생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죠.

 

송종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김만수의 태도가 인상적이긴 한데요. 이 태도를 숭고한 희생으로만 읽을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여기에는 책임을 져야 할 국가나 사회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책임이 온전히 가족과 개인에게 부과되어 있다는 점을 같이 읽을 필요가 있어요. 국가는 경제 영역에서만 출현했을 뿐 복지 같은 공적 영역의 문제를 온전히 가족공동체나 개인이 해결하게 만든 경향이 있죠. 자조(自助)하는 인간형을 요구한 거죠. 저는 김만수의 입에서 ‘이 책임모두 내 것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말이 끝내 나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더라고요.

 

강경석 김만수라는 인물이 그를 둘러싼 여러 다른 인물들의 회고와 논평, 체험 속에서 점차로 조형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거꾸로 가족공동체의 모습 또한 다초점으로 형상화됩니다. 풍부한 삽화들이 동원되는 이유죠.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삽화가 어느 개인의 특수한 체험이 아니라 한국인의 일반적인 기억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야기를 공유하기 때문에 공동체가 되고, 공동체이기 때문에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순환이 일어나는데, 이 순환에 대한 튼튼한 신뢰가 작가에게 있는 것 같아요. 가족주의는 그에 비하면 부차적이죠. 도입부이자 결말인 다리 위 장면을 보면, 지금까지 삶을 지탱해왔던 그 이야기 공동체가 다 붕괴되어서 좌절과 비관으로 끝나야 할 것 같은데도 작품 속에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 순환의 힘이 손쉬운 비관으로 떨어지는 것을 저지해주는 듯해요. 말하자면 내용으론 비관적인데 형식이나 작품에 담긴 세계관으로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곧 비전이기도 한 거죠.

 

송종원 파국으로 가는 이야기 중간중간 인물들이 겪는 경험에 미세한 밝음과 따뜻함을 환기시키는 부분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게 비전의 제시로 기능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소설의 처음과 끝이 한 상황으로 연결되어 있죠. 한 생명이 다리 위에서 죽음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생명관리 시스템으로서의 국가가 거기에 친밀을 가장한 언어로 다가오는 장면은 상당히 황폐하게 읽혔어요. 더불어 후반부에 환각처럼 다가오는 친밀함의 기억이 결국 죽음으로 뚝 끊기는 점도 출구 없는 비극처럼 읽혔고요.

 

왼쪽부터 백지연, 송종원, 강경석 © 송곳

왼쪽부터 백지연, 송종원, 강경석 © 송곳

 

백지연 도입부의 다리 난간과 추락의 상징 자체가 워낙 뚜렷해서 비관적으로 다가와요. 그런데 이 죽음의 구조가 몰락과 황폐로만 읽히지는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