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존재 리얼리즘을 향하여

최근의 총체성과 리얼리즘 논의에 부쳐

 

 

김성호 金成鎬

서울여대 영문과 교수. 역서로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헤겔, 아이티, 보편사』 『바그너는 위험한가』 등이 있음. shkim@swu.ac.kr

 

 

다이하드

 

문학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진화와 변신을 거듭해온 역사적 생물이다. 서구 미학에서 ‘리얼리즘의 시대’라 불리는 19세기 중후반 이후에도 리얼리즘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새롭고 다채로운 형태로 다시 출현하여 ‘다이하드’적 면모를 과시해왔다. 근대 자본주의체제와 더불어 탄생한 그것은 어쩌면 그 체제가 종말을 고하는 시점에야 사라지기 시작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론으로서의 리얼리즘은 또다른 이야기다. 그 역시 현장의 요구에 응해 변화해왔으나, 이론과 창작의 ‘싱크로율’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큰 편차를 보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그 수치는 매우 낮은 듯하다. 왕성한 이론에 비해 창작이 빈곤하다거나, 그 반대라는 뜻은 아니다. 양쪽이 다 부진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양쪽이 동시에 부진하다고 싱크로율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요는 창작의 경향이 변하고 있으며, 기존 리얼리즘론의 대표적 개념—장편소설론의 경우 ‘전형’ ‘총체성’ ‘전망’ 등—으로 그 변화를 설명하기가 거북하다는 것, 심지어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동원하기조차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물론 변화는 오래전에 감지되었다. 리얼리즘론이 루카치(G. Lukács)의 설명틀을 넘어 진화한 것도 오래된 일이다.1) 그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재 리얼리즘론의 개념과 틀은 창작의 현실에 비해 너무 작거나, 너무 크다.

지난호에서 황정아(黃靜雅)가 ‘총체성’을 재론하고 나선 데는 이런 이론적 곤경에 대한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2) 그가 자신의 글이 리얼리즘의 전면적 재론이 아니며 자신은 “심지어 지금 필요한 문학론의 갱신이 리얼리즘론으로 수렴될 수 있는지 여부에도 준비된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3)라고 밝히는 점이 주목된다. ‘준비된 답’이 ‘지금 필요한 문학론의 갱신’을 방해하는 사태가 없지 않은 만큼, 미리 선을 긋지 않고 생각을 밀고 나아가는 자세는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총체성’이라는 전략적 개념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그의 논의 자체는 분명 리얼리즘론의 맥락에 있고, 그것도 현 시점에 대단히 야심찬 이론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출발점은 황정아의 글에 제시된 총체성과 총체화의 개념이 미학적으로, 특히 소설론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물음이다. 나의 논의는 체제적 총체화에서 주체적 총체화로, 다시 특정하게 정의된 정서의 개념으로 초점을 옮겨가고, 존재 리얼리즘의 윤곽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맺게 될 것이다.

 

 

상실?

 

황정아의 주장을 검토하기에 앞서, 같은 시점에 총체성 개념에 문제를 제기한 강동호(康棟晧)의 논의4)를 보자. 그는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내세운 총체성의 개념이 “상실의 형식을 빌려 비로소 태동할 수 있었던 일종의 스펙터클로 읽힐 여지가 없지 않다”라고 주장한다.5) 총체성은 루카치가 자기 시대에 결핍된 것을 마치 상실된 것처럼 상상한 결과 존재하게 된 사후 발명품의 성질을 띤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의 기저에는 “루카치의 목적론적 장르론” 또는 “본질주의적 장르론”6)에 입각한 장편소설론 내지 ‘장편소설 대망론’이 중단편 위주로 전개돼온 한국소설의 성취와 가능성을 부당하게 폄하한다는 판단이 놓여 있다. 나는 한국소설사를 조망하면서 이 문제를 다룰 입장에 있지 않지만, 그간 장편 형식의 역사성에 대한 고민이 충분치 않았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또 계몽주의 사상가들로부터 데리다( J. Derrida)에 이르는 서구 식자들의 고대 그리스 시대에 대한 이상화는 고질적인 면이 있다고 보는 편이다. 반면 강동호가 초기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을 루카치 자신이 이후에 내놓은 자기비판까지 동원해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비판하면서도 맑스주의자 루카치에 대해서는 “모든 갈등과 분열이 지양된 존재 총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7)의 가능성에 그가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단정하는 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후기 루카치의 사유가 일정 국면에서 스딸린주의 미학과 친연성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삶철학의 세례를 받은 청년 루카치가 존재의 타자성에 대해 보이는 깊은 관심이나, 후기의 경우에도 위의 국면을 넘어선 시기에 그가 개진하는 삶과 사회의 영구적 미완성(未完性)에 대한 사유는 강동호의 비판이 루카치에 대한 매우 단편적인 이미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더 중요한 논점은 유토피아적 사고에 관한 것이다. 초기든 후기든, 루카치의 사유에 유토피아적 차원이 결여된 적은 없다. 맑스주의자 루카치에게 묻는다면 아마 ‘유치한 유토피아주의자’보다 ‘유치한 현실주의자’가 더 혐오스럽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결국 강동호의 관점을 정당화해주는가? 루카치의 유토피아주의가 하나의 관념론, 즉 현실을 이념의 자기구현 과정으로 보는 입장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냉철한 현실판단—여기에는 현실의 적대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그 극복의 지난함에 대한 이해도 포함된다—과 ‘유치하지 않은’ 유토피아적 사고—여기에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지향뿐 아니라 삶의 본원적 비완결성·가변성·부정성에 대한 긍정도 포함된다—는 얼마든지 결합될 수 있으며, 후기 루카치, 적어도 『미학』(1963)의 루카치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결합이다.8) 그의 청년기 사유에 내포된 풍요로운 통찰을 감안하면 루카치가 후에 행한 자기비판이 오히려 편협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 비판은 ‘유토피아주의’를 겨냥한 ‘현실주의자’의 (또는 더 지독한 관념적 유토피아주의자의) 비판은 아니었던 것이다.

‘상실’의 정서에 대해 말하자면, 현재에 결핍된 것을 과거의 현실에 투사하는 심리는 마땅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블로흐(E. Bloch)가 상기시키듯 과거는 미래에 대한 상상의 중요한 자원이며,9) 이에 대해서는 한국소설의 더 나은 미래를 염원하는 비평가들도 동의하리라 믿는다. 문제는 근대성을 바라보는 시각인데, 서구의 고대를 포함한 전근대에서 곧장 미래의 삶의 모델을 추출하는 것은 판타지소설에서나 가능하겠지만, 전근대에서 근대로, 또는 근대 초기에서 후기로 오면서 상실된 것, 애도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 과연 없다고 하겠는가? 강동호가 문제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