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소설에서 현실 만나기

 

극장적 세계와 탈정념 주체의 탄생

 

심진경 沈眞卿

문학평론가. 저서로 『떠도는 목소리들』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등이, 공역서로 『근대성의 젠더』가 있음. stariz87@naver.com

 

 

1. 사과와 오렌지, 또다른 현실

 

2000년대 소설에 대한 흔한 평가 중 하나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나 재현의 노력을 접고 자아의 폐쇄된 우주로 후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0년대 문학에서 현실은 개인의 실존적 불안이나 혼자만의 유희에 밀려 어떤 비극적 사태의 징후로만, 혹은 미묘한 진동이나 기미로만 포착됨으로써 정작 현실의 실재 그 자체는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문학 속 현실이 방 한칸으로 축소되더라도, 그리고 그 안에서 주체가 점점 빈곤하고 왜소해지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88만원세대’가 처한 숨막히는 고립과 폐쇄의 현실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실감나게 재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2000년대 문학이 어떤 측면에서 현실 재현의 위기를 겪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고통스러운 현실은 언제나 그 소설들에서 가시적, 비가시적으로 전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 소설들의 무중력과 탈현실의 포즈야말로 무력한 주체의 강렬한 현실의식이 빚은 결과일지도 모른다.1) 2000년대 문학에서 현실은 그렇게 소설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만 존재감을 발휘하는, 부재와 부정의 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삭제함으로써 존재하게 하는 이 역설의 방법론이야말로 2000년대 문학이 현실을 가까스로 사유하는 나름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 한국문학 속의 현실과 그 현실을 대면하는 주체의 태도는 그 직전 시대 문학 속의 그것에 견주어볼 때 미묘한 형질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관념으로 구성된 추상적 현실(김사과)이나 모든 것이 부서졌다가 재조립된 평행현실(parareality)로서의 ‘고모리’(황정은)를 그 사례로 들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이채로운 것은 박솔뫼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현실과 그 재현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시대 젊은 작가들의 세계감각을 짐작해볼 수 있는 하나의 흥미롭고도 특이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그것은 우선 물속처럼 고요하고 느리면서도 단순한 현실이다. 그 세계는 마치 몇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심플하다. 예컨대 그것은 호프집 아르바이터가 매일 깎아야 하는 사과와 오렌지로 이루어진 세계와 같다. 사과와 오렌지는 “가장 하기 싫고 별것도 아니고 웃기지도 않는 것들”(「차가운 혀」)이지만 그럼에도 그 하찮은 것들이야말로 박솔뫼 소설의 인물들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현실의 ‘기둥’이다. 부분대상으로 축소된 세계. 이에 더하여 “모든 것이 느리고 늘어져 있고 고여 있”는, “천천히 어디로도 가지 않고 여기에 있기만”(「해만」) 하는 곳. ‘집 근처’처럼 익숙하지만 아직 가본 적은 없는 곳. 늘 어딘가에 있는 곳. 그러나 낯선 곳.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결국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곳. 그럼에도 긴장과 갈등, 종결이 없는 곳. 재난과 재앙이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사소하고 일상적인 습관과 관계가 더 두드러진 곳. 그것이 박솔뫼 소설의 현실이다. 박솔뫼는 이렇듯 우리가 익히 아는 현실 공간을 소설에 그대로 끌어오되, 그곳을 사건이 부재하는 추상적인 공간으로 탈색함으로써 완전히 낯선 곳으로 만든다. 익숙하지만 낯선 그곳에서 무감각, 무반응, 무지각의 인물들은 세계와 희미하게 연결되고 또 단절된 채, 아무런 지향점이나 목적도 없이 천천히 유영한다.2)

박솔뫼 소설에 나타나는 이 덤덤하고 무미건조한 현실과 그 현실을 그대로 닮아 있는 주체의 모습은, 2000년대 문학이 지나간 자리에 어떤 주체, 어떤 문학이 등장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이 글은 거기에서 출발해 박솔뫼 소설을 중심으로 이즈음 젊은 세대의 소설이 만들어가는 의미있는 징후의 일편을 포착하기 위한 시도다.3)

 

 

2. 약도, 지도가 아닌

 

이미 몇몇 평론가들이 지적했듯이,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은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공감할 만한 메타 이야기(혹은 큰 이야기)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 전체의 큰 이야기는 다양한 이야기 중 하나로 혹은 ‘작은 이야기’로 유통된다.4) 여기서 핵심은 이야기의 규모 차이가 아니다. 오히려 시야의 각도 차이에 가깝다. 전체적 조망하에 그려지는 이야기가 ‘큰 이야기’라면 ‘작은 이야기’는 청사진이나 밑그림이 없어도 가능한, 자기 시야가 포착할 수 있는 범위에 한정되는 사사로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학은 2000년대를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어떤 방식으로든 ‘큰 이야기’를 의식하지도 참조하지도 않는 ‘작은 이야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큰 틀에서 보면 박솔뫼 소설도 그런 ‘작은 이야기’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작지 않은 차이와 변화가 있다. 지도와 약도만큼이나.

가령 2000년대 문학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은희경(殷熙耕)의 「지도중독」(2005)과 김중혁(金重赫)의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2005)에는 공통적으로 ‘지도’가 등장한다. 은희경의 소설에서 ‘지도’가 삶의 방향성을 상실한 주인공이 역설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지난 시절의 유물 정도로 해석된다면, 김중혁 소설에서 지도는 기억과 상상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는 또다른 세계의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