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소설에서 현실 만나기
문학의 실험과 증언
한강과 공선옥의 최근 장편을 중심으로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저서로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역서로 『지식의 불확실성』 『한 여인의 초상』(공역) 등이 있음. yoohuisok@yahoo.com
머리말
작가마다 동기야 제각각이겠지만 1970~80년대, 더 거슬러 1950년대와 일제강점기까지의 ‘역사’를 다룬 장편들이 근년 작단에 속속 등장한 데는 남북관계를 포함한 우리의 지금 내부 상황이 과거라는 ‘깨진 거울’이라도 들여다봐서 갈피를 찾고 싶을 정도로 엉망이라는 점도 작용했지 싶다. 4·19혁명에서 1970년대 유신시대에 이르는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국동란 때 자행된 민간인 학살(보도연맹)의 진상을 파헤친 조갑상(曺甲相, 1950~)의 『밤의 눈』(산지니 2012)이나, 자전적 기록에다 월북한 부친의 내밀한 행적을 상상적·사실적으로 겹쳐 재구성함으로써 20세기의 굴곡진 한국인의 삶을 촘촘하게 담아낸 김원일(金源一, 1942~)의 『아들의 아버지』(문학과지성사 2013)는 2010년대의 분단문학이라 할 만한 장편이다. 여기에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을 다룬 공선옥(孔善玉, 1963~)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창비 2013)와 한강(韓江, 1970~)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더한다면 ‘역사의 귀환’은 2010년대 한국문학에서 뚜렷이 눈에 띄는 하나의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장편들은 역사소설이 아니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그런 사건에 휘말린 인물의 진실에 집중하는 ‘증언문학’에 가깝다. 분단문학이 원래가 증언을 요체로 삼는 장르임을 상기하면 증언문학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문학이 특히 천안함사건(2010.3.26) 이후 너무도 많은 사실과 진실이 은폐·왜곡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하나의 절박한 대응이라면 그것은 이 시대 특유의 문학적 현상이 된다. 아니, 사건의 진상을 틀어쥔 권력에 의해 그 증거들이 계획적·조직적으로 부정·말소되기조차 한다면 그에 문학만의 방식으로 맞서는 것은 2010년대 한국문학이 짊어져야 할 결정적인 과제다. 그런 맥락에서 “증언이 증언인 것은, 그것이 문학적인 것을 정지시키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하나의 문학적 행위로서 구성하기 때문”이라는 진술도1) 숙고해 더 밀고 나아가야 한다. 문학적인 것의 정지와 스스로를 문학적으로 구성하는 행위가 동시에 발생하면서 증언다운 증언이 가능해진다면, 우리는 ‘사실’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는 증언과 ‘사실’ 이상을 추구하는 문학적인 것을 배타적인 것으로 볼 이유가 없다. 아니, 양자가 서로의 그 특유한 힘을 빌리는 일종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성격마저 띤다는 점을 주목할 때, 문학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도 그런 변증법을 발동시키는 문학의 ‘형식’이 제대로 구사되는 과정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까지 내세울 수 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공선옥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이하 『소년』과 『노래』)도 바로 그 점을 성찰하게 하는 역작이다. 한강과 공선옥 모두 역사가 거꾸로 가는 듯한 오늘의 현실에서 5·18의 참뜻을 새로이 증언해야 할 절박·절실함을 담았거니와, 두 작품 모두 어떤 면에서 시대적인 뭔가가 작가의 손을 잠시 빌려 쓴 게 아닌가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시대성’을 머금고 있다.
증언과 소설의 형식
‘그 어떤 작품도 갑자기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시집 1권 외에 장편소설 6권, 소설집 3권을 펴낸 한강의 작품을 어느정도는 따라 읽은 상태에서 『소년』과 만난 나의 첫 인상은 그랬다. 『검은 사슴』(문학동네 1998)에서부터 모든 ‘회색지대’에 아슬아슬하게 스민 삶의 의욕과 비의(秘意)를 탐색하는 작가적 진정성은 일관된다. 하지만 『소년』에 이르러 그동안 내연(內燃)하고 있던 작가의—때로는 ‘문학주의’를 고집하는 듯한—‘그것’이 5·18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만나는 순간 제대로 폭발했다는 인상이다.2) 작가가 광주에서 나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전기적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독자도 적지 않겠지만 『소년』의 ‘기원’을 거기서만 찾지는 말자는 뜻이다.
다른 한편, 한강의 작품세계에서 분기점이라고 할 만한 면이 『소년』에 있기도 하다. 우선 『소년』은 거의 예외 없이 반듯한 사실주의 플롯을 따르는 전작들과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서사형식을 선보인다. 또한 『소년』은 한강 자신의 민낯을 그대로 노출시킨 거의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3) 물론 핵심은 형식의 특이한 운용과 민낯의 노출도 5·18의 진상을 증언해야 하는 절박함에서 빚어진다는 것일 테다. 사실의 제시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5·18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또는 그 진실의 ‘생성’을 위해—‘말하는 법’ 자체를 고민한 흔적이 형식의 구사에서 역력하다. 가령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에필로그만 해도 특이한 구석이 있다. 에필로그는 작가가 『소년』을 쓰게 된 자전적 경위와 쓸 때의 심경을 독자에게 세세하게 들려준다. 거기서 나는 두가지를 특히 주목했다. 하나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으로 ‘5월 광주’를 규정하는 대목이다(207면). 다른 하나는 동호 작은형의 입을 빌린 작가의 자기다짐인데,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야 한다는 언명이다(211면).
에필로그에서 시작해 작품의 첫머리로 돌아가 순차적으로 되짚어보면 1~6장까지 인물에 따라 다양하게 구사되는 증언의 화법들은 바로 그런 규정과 자기다짐을 소설화하는 ‘장치’에 해당한다는 점이 확실해진다. 하지만 한번 읽어서는 서사의 조각들을 온전하게 짜맞추기 힘든 구성이어서, 각각의 장에서 구사되는 화법과 내용을 간추려보겠다.
1장(어린 새): 5·18 당시. 작가는 동호라는 소년을 ‘너’라고 호명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비가 올 것 같아./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너’는 겨우 중3. 친구인 정대와 시위대에 휩쓸렸다가 “옆구리에 총을 맞”은 정대를 찾는 과정에서 도청 민원봉사실에 들른다. 거기서 수피아여고 3년생인 김은숙과 충장로 소재 양장점 미싱사인 임선주와 한조가 되어 피살자들의 “성별과 어림잡은 나이, 입은 옷과 신발의 종류를 장부에 기록하고 번호를 매”기는 일을 하게 된다.
2장(검은 숨):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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