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  손택수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빛나는 먼지들’의 힘으로 운행하는 ‘목련 전차’

손택수의 시와 함께 떠나기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손택수 孫宅洙

시인. 197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경남대 국문과와 부산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가 있다. 신동엽창작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임화문학예술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

문태준 김선우 손택수 진은영 심보선 김행숙 황병승……

언젠가 우리 시사(詩史)1970년생 시인들을 위해 별도의 지면을 할애해야 할지도 모른다. 1970년. 근대화의 요란한 구호들과 기계음 없이 떠올리기 힘든 이 해는 우리의 심중에 한국이 산업사회로 출범한 첫해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사실보다는 오롯한 체감의 차원에서다). 1969년까지는 전근대, 시골, 논밭, 자연, 수공업, 대가족, 공동체 등을 정렬해두고, 1970년부터는 근대, 도시, 공장, 개발, 산업, 대량생산, 핵가족, 개인화 등을 덮어쓰기 하는 인식과 감각의 무의식적 체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이든 상징이든, 체질이 다른 두 세계가 역사적으로 마주치며 갈라지는 정점을 ‘1970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생의 기원을 1970년에 둔 시인들이 전근대와 근대, 오래됨과 새로움, 노래와 산문 등의 이질적인 지평을 어떤 형태로든 소화해야 할 필연을 안고 사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거칠게 분류해 문태준 김선우 손택수 등이 ‘전부터 있어 내려온’ 재래(在來)의 미덕을 기린다면, 진은영 심보선 김행숙 황병승 등은 ‘지금 있거나 앞으로 올/와야 할’ 모던(modern)의 향방을 탐색한다. 그중 손택수에 관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핵심은 그의 시 전체 지형과 관련된다. 손택수 시의 본령은 전근대 세계를 열애하고 시적으로 현재화하거나, 그것의 반대항으로서 근대의 비루한 행적을 질타하는 데 있지 않다. 손택수의 시는 전근대와 근대가 불편하게 동행하고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문제 자체를 사유하고 살아내며 재론하고자 한다. 때로 상극처럼, 짝패처럼, 거울처럼 어지럽게 이접하는 두 세계를 어떻게 시적으로, 더불어 구체적인 삶 속에서 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어려움에 대한 통감이 손택수의 시를 떠받치는 동시에 뒤흔드는 근원이다.

이러한 시적 체제가 손택수의 첫시집1)에서부터 완전히 확립된 것은 아니다. 그와 동세대 시인들의 시에 유사한 문제의식이 부재하거나 빈약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근본적이면서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점에서 손택수의 시 작업은 각별한 바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손택수 시가 천착하는 궁극적인 화두는 전근대와 근대의 패러다임 및 그 교체와 혼돈의 1970년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손택수의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과 문명 전환에 맞닿은 거대한 사회·역사적 사건들이 가역적으로 환치되고, 비가역적으로 이월되며, 시련과 모순을 나누어 갖는 가운데 전개된다. 드라마의 온갖 잡음과 무음은 시인의 (무)의식을 거쳐 텍스트의 (무)의식에 스며든다. 손택수의 시에서 텍스트의 표층은 묘사하고 기술하며, 심층은 논쟁하고 자문한다. 표면은 웃고 울고 노래하고 수런대며, 이면은 웅숭그리고 골똘하며 적막하다. 노래와 산문, 공동체의 둥그런 이야기와 개인의 바스러진 사연(/私緣), 당나귀가 쓰는 시와 생활의 먼지, “나뭇잎과 푸른 물고기에 대한 비유”와 “하수도관을 뚫고 들어간 나무”(「나무의 수사학 4」, 『나무의 수사학』)들의 두 계보 사이에서 텍스트가 취할 화법과 자세는 그에게는 너무 적거나 너무 많다.

몰락하고 제압하며, 견디고 관철하는 두 세계의 격돌을 살아온 시인은 시의 유구한 깊이와 높이를 모르지 않으나, 세상의 다른/낯선 척도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의 ‘위대한 힘’을 모르지 않으나, 누군가의 시선에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시의 무력에 눈감을 수는 없다. 시의 다양한 장치들을 유려하게 다룰 줄 모르는 바 아니나, 그에만 골몰할 수는 없다. 짐작하겠지만, 이 분열과 상처야말로 손택수가 사랑하고 꿈꾸며 시를 쓸 수 있는 역설적인 힘이자 창작방법론이다. 더불어 그의 고군분투를 끊임없이 위태롭게 하는 생의 항상적인 기류다.

 

2

제가 고향 담양의 들판을 뛰어다니다가 서른해를 보낸 곳이 부산입니다. 부산이란 지명은 구체적인 실체가 아닌 추상으로 그만의 고유한 체취가 묻어나지 않죠. 국()이나 도(), 시()처럼 체감되는 공간이 아니라 어딘가 막연하게 다가옵니다. 추상으로서의 장소를 가능한 한 살갗으로 직접 부비면서 살고자 하는 게 농경민의 전통이겠지요. 실제로 저는 틈만 나면 산동네의 슬레이트 지붕 위에 올라가 수평선을 바라보았습니다. ‘붕-’ 후미진 골목길을 따라 올라오는 뱃고동 소리와 소금기가 있는 낯선 말들, 물너울에 비치는 빛살 같은 눈부심을 간직하고 있는 풍경들. 이 새로운 풍경이 그리움을 앓게 했습니다. 낯선 도시의 풍경 속에서 지금 내게는 없는 무엇인가가 비로소 분명하게 각인되기 시작한 거지요. 바다를 통해 내면공간이 열렸다고 해도 좋을 텐데, 아마도 ‘내국 디아스포라’의 슬픔 같은 것이 그 공간을 채워주었을 것입니다. 돌이켜보니 성장기의 가장 예민한 시기에 저는 언어적으로도 그렇고 존재론적으로도 디아스포라의 슬픔 속에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전근대에서 근대로 옮겨왔으니 모국어도 존재도 다 분열을 앓은 거지요. 그때 향수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말해야겠네요. 어느날 저는 고향에서 멱을 감던 기억을 불러오기 위해 세숫대야에 물을 받고 고개를 처박았습니다. 콧속으로 물을 빨아들이고 있노라면 강물이 콧속으로 들어올 때의 감각이 살아났거든요. 그 찡하고 맵고 알싸한 느낌. 눈물이 흥건하도록 희미해진 감각을 찌르는 물의 환기를 통해 매번 귀향의식을 치렀나봅니다. 특정 장소에서 가치로 바뀐 고향을 갖게 된 자들의 귀향은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더 간절한 꿈으로 생을 자극합니다. 여기엔 ‘나는 너다’와 같은 동일성의 세계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하나가 될 수 없는 균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