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시의 미래와 낙서의 과거

 

 

황현산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저서 『얼굴 없는 희망』 『아폴리네르』 『말과 시간의 깊이』 『잘 표현된 불행』 『밤이 선생이다』 등이 있음. dasungumi@gmail.com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이 2013년에 찍은 영화 「카운슬러」(The Counselor)에는 마약밀매 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일이 잘못되어 벼랑 끝에 몰린 변호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중개자를 통해 범죄조직과 타협하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다. 차라리 범죄조직의 대변인이라고 불러야 할 그 중개자는 변호사에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으며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안또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의 시 「길손」의 한 구절을 읊는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길손이여, 당신의 발자국이

길일 뿐 다른 길은 없다네,

길손이여, 아무런 길도 없다네,

길은 만들어진다네 걸으면서.

걸으면서 길은 만들어진다네.

그리고 그대는 뒤돌아보며

그 길을 볼 수 있지,

결코 다시는 밟지 못할.

길손이여, 아무런 길도 없다네

바다 위에 포말 자국뿐.

 

중개자가 읊은 것은 첫 세 구절이다. 이 시는 인류라는 거대한 바다의 한 방울 물과 같은 개개의 인간이 그때그때 선택한 발걸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그러나 결국은 지워지고 말 발자국을 찍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운명을 형이상학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운명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모든 인간은 걸으면서 제 길을 만드는 길손이다. 중개자는 이 형이상학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전체적으로 이 시의 해석이나 다름없는 영화 「카운슬러」에서, 한 인간의 운명을, 그 인간이 저지른 망동과 그 결과를 극악한 현실의 한 국면에서만 바라보며, 어떤 선택도 불가능한 한 정황을 그 인간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인간을 다른 인간에게서 제외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중개자가, 또는 이 영화를 감독한 리들리 스콧이, 또는 그 원작 씨나리오를 쓴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가 이 시를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다거나 편의대로 소비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변호사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서 이 시를 들을 때, 시는 교과서적 무덤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구체적 국면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개개의 인간에게 나날의 지극히 사소한 행위를 지극히 엄숙한 운명의 틀 안에서 보게 한다. 보는 눈에 따라서는, 시가 말하려는 모든 인간의 운명을 한 인간의 운명으로 지악(至惡)하게 축약한 이 영화는 범죄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거대한 다국적 범죄조직의 광범하고 냉정한 폭력이 우리의 평화로운 삶 속에 어떻게 형태를 바꾸어 준동하고 있는가도 생각하게 한다. 무작하게 끊어버릴 수도 있었던 통화를 계속하며 이 시를 읊었던 중개자가 저 시의 형이상학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는 시의 위의(威儀)를 빌림으로써 수렁에서 발버둥치는 생명에게 편안한 포기의 길을 제시하고, 그의 절망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한다. 그래서 수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자리에 발을 들여놓은 경솔한 주인공이 저 고전적 영웅의 면모를 얻기도 할 것이다. 좋은 시는 제가 태어난 구체적 정황을 떠나서도 그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 생명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은 또하나의 구체적 정황을 만났을 때이다.

한 시인이 제 목소리로 시를 쓸 때, 그의 배후에 다른 목소리가 있다는 말은 여러가지 다른 뜻 외에, 그의 시가 늘 다시 써질 수 있다는 뜻도, 그가 다른 시를 다시 쓰고 있다는 뜻도 포함된다. 어떤 사람들은 황병승(黃炳承)이나 김경주(金經株) 같은 시인이 이른바 전통서정시를 걷어차버린 것처럼 말하지만, 소월이나 미당이 없는 그들을 생각하는 일 또한 어렵다. 황병승이 “찬비가 얼굴을 때리는 새벽”1)이라고 읊을 때도, 김경주가 “거울은 우리에게 저승을 보여주기 위해/만들어진 물성”2)이라고 단언할 때도, 거기에는 소월의 「왕십리」가, 미당의 「국화 옆에서」가 어떤 방식으로건 개입하고 있다. 여기서는 소월과 미당이 황병승과 김경주의 배후이지만, 또한 신세대의 시인들이 소월과 미당의 배후이기도 하다. 신세대 시인들이 시를 쓰는 현실은 소월과 미당이 미래에 만나게 될 또하나의 구체적 정황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시인들이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