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소설에서 현실 만나기
조금은 기묘한 ‘전형’ 개념의 역사
김동수 金仝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발자끄와 리얼리즘: ‘리얼리즘의 승리’를 다시 생각한다」 「아름다운 것들의 사라짐 혹은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 역서로 『아미엥에서의 주장』 등이 있음. donnard@hanmail.net
변증법적 통일?
198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말 중에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어구는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차원들이 극적으로 합일을 이루게 되는 경지를 뜻하지만, 실상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도 그 구체적인 통일의 경로를 알지 못한 채 막연한 당위 내지 공허한 구두선(口頭禪)으로 일컫는 적이 적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가 다루게 될 ‘전형’이라는 개념이 상당부분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리얼리즘 문학 이론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해온 ‘전형’ 개념과 관련하여 루카치(G. Lukács)는 “현상과 본질의, 개별 경우와 법칙의, 직접성과 개념의 대립이 해소되어 양 측면이 예술작품의 직접적 형상 속에서 자발적인 통일성으로 통합되어 나〔간다〕”1)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당위적인 요구들이 자동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님은 80년대의 민족문학을 평가하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형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개별화에 함몰하여 그 개별성이 보편성에 이어지지 못하여 전형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와 보편성에 경도되어 개별성을 희생하여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보편성만을 드러내어 전형화를 이루지 못한 경우가 있다. 최근 우리 민족문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지배적이다.”2)
사실 민족문학 혹은 노동소설의 도식주의의 문제는 1980년대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1930년대의 카프(KAPF) 시절에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있었고, 그 배후에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창작방법을 두고 쏘비에뜨연방에서 벌어진 ‘세계관과 방법’ 논쟁이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을 그려내면서도 그 인물의 운명을 통해 한 시대의 본질적인 경향을 포착해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일 텐데, 그때마다 동원된 것이 엥겔스(F. Engels)의 유명한 전형 개념이었다. “내 생각에 리얼리즘이란 세부의 진실성 이외에도 전형적인 환경에서의 전형적인 인물을 진실하게 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3) 그러나 숱한 논의를 거쳐 전형에 대한 논의들이 일정한 이론적 진척을 거두었음에도 그것이 구체적인 비평과 창작의 결과로 잘 이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단순히 외적 환경이나 작가들의 무능 혹은 비평의 권위적인 작풍에서 비롯된 문제로 치부할 일은 아니며, 오히려 전형 개념 자체에 내재한 모호성과 난점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전형’ 속에서 보편과 개별이 통일된다는 생각은 리얼리즘 이론 진영에서 자명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실제로 이 용어의 통상적인 의미가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우선 일상생활에서 ‘전형적’이라는 표현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경우와 대립하여 반복적이고 심지어 상투적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된다(“그건 전형적인 정치공세입니다!”). 심지어 문학교육에서도 ‘전형적인 인물’은 개성적인 인물과 대립되어 개념화되기도 한다.
집단의 성격을 대표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전형적 인물과 개성적 인물로 구분하는 경우이다. 전형적 인물은 보편적 전형과 시대적 전형으로 구분된다. 보편적 전형에는 수전노, 서로 사랑하는 남과 여, 충직한 하인, 방랑자와 같이 인간의 어느 한 속성을 대표하는 유형이 있다. 이들은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인물 유형이다. 이에 비해 시대적 전형은 어떤 특정한 지역과 시대 안에서 이루어진 인간 유형을 말한다. (…) 훌륭한 소설은 전형과 개인을 적절하게 조화시켰을 때 창조된다고 볼 수 있다.4)
우리는 이와 관련된 개별적인 쟁점에 대해 평가를 내릴 위치에 있지는 않다. 다만 전형 개념 자체 속에서 보편과 개별의 통일이 당연하게 전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전형에 관한 세세한 쟁점들을 다루기보다는 ‘전형’ 개념이 어떤 맥락에서 출현했고 어떤 내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 조명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전형 개념이 가지는 의미를 막연하게나마 측정해보고자 한다.
‘사회적 전형’의 등장
엥겔스의 리얼리즘 구상은 상당부분 발자끄(H. Balzac)의 소설관, 특히 『인간희극』의 「서문」(Avant–propos)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하크니스(M. Harkness) 양에게 보내는 엥겔스의 편지에 출현하는 ‘세부의 진실성’ ‘전형’ ‘미래의 인간’ 등의 핵심적인 용어들이 발자끄가 「서문」이나 다른 작품들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발자끄는 전형이라는 개념을 의식하고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가였다.5) 그리고 여러 작품의 서문을 통해 스스로 일정한 전형이론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이전에 나온 서문들의 완결편에 해당하는 『인간희극』 전체 「서문」에서 전형을 그가 그리고자 하는 ‘풍속의 역사’(l’histoire de moeurs)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계기로 제시한다.
프랑스 ‘사회’가 역사학자가 될 것이었고, 나는 단지 그 비서가 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선행과 악행의 목록을 작성하고, 정념들의 주요한 사실들을 한데 모으고, 성격들을 묘사하고, ‘사회’의 주요한 사건들을 선택하고, 동질적인 여러 성격의 특징들을 모아 전형들을 구성함으로써, 아마도 나는 역사학자들이 잊어버린 역사, 바로 풍속의 역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었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