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현재와 미래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글로벌협력대학 교수, 경제학. 저서로 『개방화 속의 동아시아』(공저) 『중국 농업, 동아시아로의 압축』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경제』 『한국형 네트워크 국가의 모색』(공저) 등이 있음. ilee@hs.ac.kr

 

 

1. ‘동아시아-한반도’라는 관점의 중요성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세계 각국은 급한 불을 끄는 데 힘을 썼지만, 근본적으로 믿음을 주는 대책은 나오고 있지 않다. 2008년 위기는 주로 미국의 금융시스템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미국 달러와 월스트리트, 그리고 신고전파 수리경제학자들의 헤게모니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가 당면한 현실문제로 등장했다.

‘장기침체’ 개념은 대공황기인 1938년 앨빈 한센(Alvin Hansen)이 제기한 바 있는데, 20142월 래리 써머즈(Larry Summers) 전 미국 재무장관이 이를 다시 언급하면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70~90년대에 주요 선진국들의 명목 GDP 성장률은 8%를 상회했는데, 지난 10년간은 4% 이하로 떨어졌다. 2차대전 이후의 인구성장, 금융적 팽창과 낮은 이자율에 기초한 성장 추세가 꺾이는 것은 일시적인 부진이 아니라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1)

선진국들의 침체상태는, ‘위기’의 심화와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역사사회학자들의 논의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시스템의 복잡성 때문에 자본주의의 미래를 단순하게 확정해서 말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사회는 경제적·이데올로기적·군사적·정치적 네트워크의 상호작용이며, 다양한 지정학적 범위와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행위라는 변수도 있다는 것이다.2)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개된 생산네트워크는 자본주의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더욱 증대시켰다. 주요 선진국들이 침체를 거듭하는 동안 동아시아는 세계 자본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는 장소였다. 중국과 한국은 2008년 세계경제위기의 충격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넘어선 바 있다. 그러나 추세를 보면 2010년경 이후 동아시아 경제의 성장세가 꺾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2015년초 현재 미국 경제에는 바닥을 쳤다는 기대감이 있지만 유럽과 일본의 전망은 여전히 어둡다. 동아시아 경제의 저성장 추세가 점차 굳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졌다.3)

한국은 저성장 추세가 더 뚜렷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전()산업생산은 2013년에 비해 1.1% 증가했다. 그런데 이는 5개 산업군을 포괄한 전산업생산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0년 이후 최저치에 해당한다. 또한 2014년 광공업 생산증가율은 0%로, 2009년에 –0.1%를 기록한 이후 가장 낮은 수치로 내려갔다. 이에 대해 한국의 산업엔진이 멈췄다는 자극적인 언급이 나오기도 했다.

좋은 의사는 예견과 치료 능력을 두루 갖추는 법이다. 경제를 다루는 데에도 이런 능력이 필요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경제를 구성하는 주요 변수들이 정확하게 계산되고 예측될 수 있다는 관점은 신고전파 우파 경제학이나 국가사회주의 좌파 경제학이 공유하는 바였다. 그러나 이들의 예견은 기존 시스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신념을 전제로 했다. 신념에 기초한 예측이 너무 자주 빗나가면 그 신념의 효용성은 오히려 약화된다. 자본주의는 점점 더 복잡해져서 그 본질적 추세를 논의하는 것도 그만큼 어려워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지정학적 범위에 따라 서로 다른 과제와 시간대가 설정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단계 자본주의의 핵심 문제는 격차 확대와 대침체의 불안이다. 그런데 성장과 분배에 관해서도 어느 위치와 어느 범위에서 문제를 보는가에 따라 진단과 처방이 달라질 수 있다. 한 국가 차원에서, 또는 세계 전체의 범위에서 문제를 볼 때 해결책이 묘연해질 수도 있다. 필자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동아시아-한반도’ 차원에서 문제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1990년대 이후 형성된 ‘동아시아 자본주의’와 연결된 한국 및 한반도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파악하면서, 새롭게 전개된 자본주의 환경에 대한 적응과 개선·극복의 방향을 생각해보려 한다.

 

 

2. 1990년대라는 전환점

 

우선 한국의 경제현실부터 짚어보자. 먼저 분배상황을 보면, 전세계적으로 1970년대 이래 불평등이 심화되었는데, 한국은 이와 달리 1990년대 중반 이후에야 세계적 추세에 합류했다. 가구소득 분배가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악화 추세로 전환했고 외환위기 이후 가파르게 나빠졌다. 성장률 추세는 특정 시점을 확연한 전환의 계기로 잡기가 쉽지 않다. 1997년 위기, 2008년 위기가 성장 추세에 충격을 주었지만 곧이어 반등세가 나타났다. 성장률 수준으로 보면, 80년대 중반까지는 고성장 단계, 80년대 후반~2000년대 중후반은 중간성장 단계라 할 수 있고, 2008년 이후에는 저성장 단계로 진입하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4)

분배와 성장의 추세 변화와 관련하여 흔히 글로벌화, 기술변화, 노동시장 제도변화 등의 요인이 다양하게 거론된다. 그런데 이러한 요인들 모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포함하는지도 문제고, 각 요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이러한 요인들을 통틀어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같은 개념으로 지칭한다면, 그것을 통해 어떤 실천적 대안을 끌어낼 수 있을까. 시장기능을 제한하는 대책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으며 그러한 대책으로 과연 성장과 분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잘 드는 칼로 싹 베어낼 수 있도록 환부가 분명한 것이 아니라면, 성장, 분배, 기술, 제도 등 여기저기를 좀더 살피고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흐름이 잡히는 것은 산업구조 쪽이다. 한국의 성장 및 분배와 가장 강력한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1990년대 전반에 진행된 산업구조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통계상으로 1988년까지는 제조업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