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아토포스’라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아방가르드

 

 

이경진 李京眞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속물들의 윤리학」 「앨리스씨를 위한 동정론」 등이, 역서로 『공중전과 문학』 『도래하는 공동체』가 있음. snowbonbon@hanmail.net

 

 

1. 진은영의 물음들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고 한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버리는 일. 그

럼으로써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

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성을 또다른 사회적-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포스이다.”1)

 

자끄 데리다( Jacques Derrida)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주목한 바 있다. ‘~이란 무엇인가’(what is…)라는 어떤 본질을 전제하는 물음의 형태, 그리고 어떤 본질에 저항하는 행위로서의 ‘문학’ 사이에 가로놓인 불균형이 그 물음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까닭이다.2) 한데 그는 이러한 통찰이, 어떤 규범이나 제도, 진리적 가치로부터 언제나 우아하게 빠져나가는 문학의 공간이 특정한 시대적 제도로서 구획된 것이 아닌가를 회의하는 그다음 물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주의적인 물음은 텅 빈 물음이 아니라 대단히 특수하고 긴박한 작업으로 전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저 무용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게 만드는 어떤 배치의 공간성을 확인하고 그 장소에서부터 다시금 문학의 존재론을 정립하는 작업이다. 즉,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비평의 불가능한 물음이 아니라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어야 하는 물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여름에 출간된 진은영(陳恩英)의 『문학의 아토포스』는 이러한 물음의 (불)가능성과 고투한 비평집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문학과 윤리 또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영원회귀하는 질문들”(16면)을 ‘자유롭게 건네온’ 궤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서장에 해당하는 글은 저 유명한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이다. 그 글은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중후반 그야말로 ‘종언’을 모르는 여러가지 종언의 담론들, 문학의 종언, 정치의 종언, 시의 종언, 근대 장편소설의 종언, 비평의 종언 등으로 얼어붙어 있던 문단에 랑씨에르( J. Rancière)라는 “먼 친척 아저씨”가 보내준 “달콤한 과자상자를 받아든 아이”(17면)의 설렘을 널리 공유함으로써 생산적인 질문과 답변 들을 움트게 한 기원적 장소로 기능했다.

그리고 육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 여섯해는 단순히 양적으로 환산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이 비평의 문학사적 의의를 평가하기에는 무척이나 오만하게도 짧은 시간이며, 그렇다고 그 비평의 직접적인 후속 논의를 새삼스레 선보이겠다고 자처하기에도 뒤늦은 시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시간은 저 비평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한국사회의 뚜렷한 정치적 퇴행이 끝을 모르고 계속된 시간이며 인간의 존엄과 부끄러움이 말살되었음을 고통스럽게도 여러번 확인해야 했던 시간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한 시인이자 비평가이자 철학자가 시와 정치 사이의 헐거워진 연결고리를 과감히 부수고 새롭게 짜맞춰가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던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다면 바로 그 시간을 담고 있는 『문학의 아토포스』의 출간을 계기로 진은영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 및 후속 논의들이 제기했던 물음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우리 시대 비평의 근거를 되묻고자 하는 시도가 아주 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2. 종언과 시작(始作/詩作)

 

진은영의 비평이 근래의 비평담론에서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수많은 논쟁을 점화시켰다는 사실에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시대 문학(그리고 비평)의 근거를 기저에서부터 다시 고민하는 태도에 있다. 즉 진은영의 그 글은 정치다운 정치가 실종된 한국사회에서 ‘시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직접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지만, 좀더 넓게 보면 문학이 주도했던 정치적 공론장의 축소라는 시대적 현실에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하나의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문학평론가가 이 비평으로 촉발된 ‘시와 정치’ 논쟁을 두고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한 지연된 대응”3)이라 진단한 것은 정확한 것이었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 ‘근대문학’에 내린 사망선고가 독단적이고 편협한(근대 장편 리얼리즘 소설만을 근대문학과 동일시하는)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이 던진 충격이 지금까지도 한국문학의 몸체에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문학과 정치의 긴밀한 관계를 ‘증언’(또는 ‘회고’)하는 것은 유수의 전통있는 문예지들뿐이다. 신작시와 신작소설의 앞뒤에 전반적인 시국 비판과 정치적·사회적 논평이 있으며, 철학논문을 방불케 하는 지성적 사유의 장이 펼쳐지기도 하고, 온 분야를 망라하는 근간들의 리뷰가 있는, 한국에서는 사실상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 문예지의 이러한 배치로 인하여 시는 그것이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과 정치의 연계는 직관적으로 당연시되었으며 그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관습화된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텍스트들 간의 접합 문법이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자명하게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4) 많은 이들이 문학이 차지하는 공론장의 위축을 나날이 실감하고 있으며, ‘작가〓지식인’의 공식 또한 낯설어지고 있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체감하는 문학의 위상과 한국문학의 전통적인 당위 사이에 분열이 횡재한 시대에 문학과 현실이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할 필요성은 절실하게 요청되어왔다.

진은영의 저 비평은 바로 이러한 요청에 대한 한가지 응답이었다. 그녀가 고통스럽게 자각했던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16면)은 시와 정치 사이에 애초부터 존재했던 분열이 아니라, 카라따니 식으로 말하면 근대 문학체제가 붕괴했다는 감각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었고, 그것과 대결하겠다는 비평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카라따니가 뼈아프게 지적했듯이 문학이 사회와 사상의 변혁을 주도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미디어 영향력으로만 따지면 이제 활자매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