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야만적인 나라의 황정은씨
그 현재성의 예술에 대하여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평론집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가 있음. kiwookh@gmail.com
같은 텍스트라도 큰 사건을 겪은 이후에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은 문학작품의 독자가 종종 경험하는 사실이다. 추측컨대 그 사건을 계기로 세상이 실제로 달라졌거나 적어도 세상을 받아들이는 독자 자신의 감각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4월 16일의 세월호사건을 전후해서 일어난 이 감각상의 차이는 유난히 도드라진다.
이 글은 낯선 어법의 소설을 선보여온 황정은(黃貞殷)의 작품세계를 『百의 그림자』(민음사 2010),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를 중심으로 살펴보려는 시도다. 다수의 비평가들이 이미 그의 소설의 비범한 예술성에 주목하는 논의를 했고, 나 또한 소설의 정치성을 특이하게 구현한 예로 『百의 그림자』를 거론하기도 했다.1) 그런데도 최근작인 『계속해보겠습니다』는 물론 전작들까지 함께 논하려는 것은 그의 주요 작품들을 세월호 ‘이후’의 달라진 감각과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황정은이 사회참여적인 작가라서 그렇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2009년 용산참사 이후의 항의시위에 참여하면서 「입을 먹는 입」(『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을, 지난해 세월호사건 집회에 나간 후에는 「가까스로, 인간」(『문학동네』 2014년 가을호)을 썼고, 이 글들을 통해 민감한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힌 것은 사실이지만, 이 뛰어난 산문들도 그의 소설과는 일단 구분해서 다룰 일이다.
1. 빛과 그림자의 예술
황정은은 처음부터 독특한 방식의 단편소설을 썼지만 그 특유의 문체와 주제, 모티프와 기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것은 『百의 그림자』일 것이다. 이 소설의 의의는 기존 소설의 여러 통념을 깨뜨리는 동시에 그 자체로 새로운 발상과 독특한 감수성을 보여준 데 있다. 2000년대 이래 등장한 파격적인 소설들 가운데 기존 형식의 뒤집기와 해체에 능한 예는 많지만 그처럼 새롭고 독특한 경우는 드물다.
2010년 발간 당시뿐 아니라 세월호라는 ‘사건’을 겪은 후에 읽어도 이 작품의 호소력이 여전한 까닭을 그 비범함을 빼고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비범함을 말하는가? 우선 주어진 현실을 제시하는 독특한 방법부터 살펴보자. 이 소설은 도심 재개발과 철거라는 민감한 사회적 주제를 깔고 있지만 그 전에 이런 주제를 다뤄왔던 통상적인 사실주의 소설과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진다. 명백한 차이는 인물들의 그림자가 스스로 움직이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버젓이 등장하는 것이지만,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도 사뭇 다르다. 주인공인 은교와 무재의 선문답식 대화에서 엿볼 수 있듯 고통의 당사자들이 자신을 ‘희생자’로 내세우지도 않거니와 작품의 분위기도 이들에 대한 공감을 전제로 연민과 연대를 요청하는 당위적인 태도나 온정주의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런 변화 말고 현실묘사 자체가 특이한 점은 없을까?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을 구분하지 않는 평자들은 앞서 지적한 눈에 띄는 변화를 근거로 이 소설을 리얼리즘과는 다른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 소설의 현실묘사가 정확히 어떤 특성을 띠고 있는지 눈여겨보지 않는다. 소설의 공간을 이루는 도심의 오래된 전자상가라든지 주인공인 은교와 무재가 나중에 찾아가는 섬까지도 우리 현실의 구체적 장소를 필요한 만큼은 정확하게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소설 속 전자상가는 철거를 앞둔 세운상가를, 두 연인이 찾아가는 섬은 근년의 석모도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실제와 부합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특이한 점은 있을 법한 시공간을 상당히 정확하게 제시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 데 있다. 여기서 공간과 사물에 대한 황정은 특유의 예민한 감각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소설의 화자인 은교는 공간과 사물을 범상한 듯 서술하지만 사실은 매우 섬세하게 지각한다. 가령 종종 이런 식의 서술이 등장한다.
나는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 다섯개의 건물이었으나 사십여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29면)
소설 뒤쪽에 붙인 ‘작품 해설’에서 신형철(申亨澈)은 이 구절을 두고 “그저 ‘다섯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해도 될 텐데 이 작가는 각 동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한다. 각 동의 상점들마다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새겨져 있는 사십년의 시간 앞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일 것이다”(176면)고 논평했다. “각 동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하는 언술행위에 함축된 뜻을 잡아채는 눈썰미와 그 풀이도 그럴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할 것은 ‘예의’보다 존재의 ‘개체성’에 대한 황정은의 비상한 감각과 헌신성이다. 무재가 은교에게 가마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는데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에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38면)라고 유머러스하게 던진 말에도 개체성에의 눈멂이야말로 폭력이라는 생각이 묻어 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는 은교가 수리실의 여씨 아저씨 책상 서랍을 정리했을 때이다. 화자는 서랍 속에 들어 있는 “철사 조각, 나사들, 드라이버 손잡이, 카세트테이프, 라벨들, 봉투에 담긴 알약들, 처방지들, 메모들, 쇳가루들, 전선들 (…)” 하고 무려 26개 품목을 죽 열거한 후에 그 “외에도 아무리 봐도 뭔지 모를 마른 것이라거나 브래지어 후크 같은 것이 발견되기도 하는 등 종잡을 수 없었다”(47~48면)고 말을 맺는다. 마치 그 잡다한 것 하나하나의 ‘처지’를 염두에 두고 그 개체성을 묵살하는 폭력을 가하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다. 통상적인 사실주의자라면 26개 품목을 다 열거할까? 십중팔구 몇몇 적절한 예만 들 것이다. 그렇기에 26개 품목을 9행에 걸쳐 일일이 열거하는 이 장면은 특정한 시공간과 그 속의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기보다 작가/화자의 주관적인 의도에 따라 훨씬 늘려놓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있는 그대로’ 제시하지 않은 쪽은 오히려 품목들을 (인용자처럼) 전부 묘사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자르거나 아니면 ‘온갖 잡다한 것들’이라는 식으로 뭉뚱그려버리는 종래의 사실주의 작가들이 아닌가? 작가가 의도했든 안했든 이 열거 장면은 보통의 사실주의자(혹은 자연주의자)들보다 더 사실적으로 밀고나감으로써 사실주의적 관념—사물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생각—을 뒤집고 사실주의가 빠지기 쉬운 맹점—개체성에의 눈멂—을 꼬집는 대목으로 읽힌다.
오무사 전구가게의 묘사가 빛을 발하는 것도 개체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에 힘입은 바 크다. 그간 알전구를 하나씩 더 넣어주는 오무사 할아버지의 배려와 그 가게가 사라졌을 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버리지는 않을까”(104면) 하는 은교의 염려에 초점을 맞춰 이 대목은 흔히 ‘윤리’적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이 ‘윤리’라는 것도 그 가게의 특이성과 오무사 할아버지가 손님을 대할 때의 그 할아버지 특유의 모습이 살아 있지 않으면 작가의 설교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알전구 다발로 ‘빽빽한’ 가게 벽에서 할아버지가 손님이 주문한 알전구를 찾아내어 “손바닥만 한 비닐 봉투를 벌려서 입구를 동그랗게 만들어둔 다음에, (…) 봉투 속으로 한번에 한개씩 (…) 제비 새끼 주둥이에 뻥 과자 주듯, 떨어뜨”(103면)리는 동작이다. 할아버지는 아마 알전구를 하나씩 세어나갔을 테지만 이 동작을 통해 그 알전구 하나하나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군더더기 없이 전해지면서 마치 할아버지와 알전구 하나하나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드러나는 느낌이다.
황정은은 특정한 시공간과 동작의 묘사에서 이런 정확하고 빼어난 재현능력을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편 사실주의적 규범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설 속의 현실과 인물을 자신의 미학적·‘윤리’적 요구에 따라 과감하게 편집하고 변형해서 제시해왔다. 이미 여러 단편을 통해서 아버지를 모자로 바꾼다든지 항아리에 말하는 능력을 부여한다든지 온갖 기이한 존재들과 귀신까지 출연시켰으니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그림자 분리현상은 그리 놀라운 일은 못된다. 불행과 모멸의 극한에서 참다못해 절망과 죽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이 현상은 등장인물이 거의 예외 없이 겪는 일이라서 작품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 소설의 핵심적인 모티프이자 서사장치인 것이다.2)
이 소설에서 그림자 분리현상이라는 초자연적 혹은 환상적 장치가 성공한 것은 아버지를 모자로 변형시킨다든지 하는 종전 장치에 비해 훨씬 복합적이고 미묘한 방식의 표현력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발상은 사람의 그림자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때의 섬뜩한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지만, 작가는 이를 여러 단계로 세분화하고 인물들의 운명이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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