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강지희 姜知希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물성을 가진 ‘식물-되기’」 「장르의 표면장력 위로 질주하는 소설들」 등이 있음. iskyyou@hanmail.net

 

신용목 愼鏞穆

시인.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가 있음. 97889788@hanmail.net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이 있음. myosu02@hanmail.net

 

 

정홍수(사회) 안녕하세요. 2015년 한해, 신용목 시인과 함께 ‘문학초점’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번 봄호의 초대손님은 요즘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평론가 강지희씨입니다. 두분 반갑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상작을 고르는 일부터가 만만치 않았는데요, 사전 논의를 통해 김인숙(金仁淑) 장편 『모든 빛깔들의 밤』(문학동네 2014), 권여선(權汝宣) 장편 『토우의 집』(자음과모음 2014), 김희선(金希鮮) 소설집 『라면의 황제』(자음과모음 2015), 김희업(金熙業) 시집 『비의 목록』(창비 2014), 이제니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문학과지성사 2014), 성동혁(成東爀) 시집 『6(민음사 2014), 이렇게 여섯권을 선정했습니다. 일단 두분의 간단한 인사말씀 듣고 시작하는 게 어떨지요.

 

신용목 네. ‘문학초점’에 참여하면서 걱정이 많았던 게 사실인데 두분 뵈니까 마음이 놓입니다. 앞으로 정홍수 선생님과 함께 초대손님으로 오시는 분들이 작품의 문제성을 세심하게 짚어주실 것이라 믿고, 저는 부족한 대로 최대한 솔직하게 제 독후감을 말씀드리겠다는 것으로 첫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강지희 작년부터 이 코너를 재미있게 읽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그동안 소설 쪽으로만 평론 활동을 해온 터라 공식적으로 시집을 평한다는 것에 조금 부담을 안고 왔는데요. 든든한 두 선생님께 기대어 오늘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인숙 장편 『모든 빛깔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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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김인숙의 장편부터 이야기해볼까요? 백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형 기차사고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아기를 구하지 못하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의식과 함께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는 아내 조안, 그리고 아내를 보살피며 치유를 돕는 남편 희중의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에 있는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희중을 포함한 주변인물 모두가 이 고통의 이야기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것으로 드러나죠. 희중이 유년기에 저지른 작은 거짓말 한마디가 죄의식의 기원으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전혀 동떨어져 보이는 사건들이 연결되고, 인물들은 얽혀 있습니다. 그 얽힘 속에서 용서를 구한다든지 애도를 한다든지 하는 과정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을 때 봉인되고 억압된 것들이 귀환하는 거대한 악몽의 서사가 펼쳐집니다. 제 의문은 이겁니다. 그 연루와 얽힘이 너무 지나치고 과장된 것은 아닌가. 그리고 모두가 유죄라는 상황을 만들면서 인물들 모두를 죄의식의 기원으로 데려가려고 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으로 귀결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지희 저도 비슷하게 읽었는데요, 처음에는 소설이 열차 전복사고와 관련해서 시스템에 총체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들을 짚어주는 것처럼 느꼈어요. 그런데 중반부 이후 열차사고를 가족의 사적인 역사 속으로 너무 끌고 들어가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희중의 아버지가 성폭행 사건의 범인인지의 문제는 사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너무나 분명한 건데, 원인이 끝없이 확장되면서 가해와 피해를 규명하기 어려운 시스템 차원의 사건이라는 층위에서 다루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의미있게 느껴진 건, 세월호같이 많은 죽음들을 수반하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 문학이 이를 어떻게 마주하고 풀어갈 것인지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에요. 제 생각에 문학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책임까지도 짊어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소설에는 희중뿐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죄의식을 안고 있더라고요. 희중은 어린 시절 자기가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아버지를 궁지로 몰았다는 죄책감이 있고, 조안의 동생 상윤은 자신이 저지른 사고를 수습해주는 누나에게 미안함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는 식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미처 애도하지 못한 존재들이 오히려 일종의 위안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이었어요. 결정적인 순간마다 희중을 도와주는 우산을 든 신사가 희중의 아버지와 닮아 있잖아요. 그 신사는 희중을 사고현장에 데려다주기도 하고, 기억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주죠.

 

정홍수 우산을 든 신사는 위안이 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죄책감 자체가 물질화된 어떤 환영 같은 것 아닌가요? 죄의식을 환기하고 그 기원으로 이끄는 소설적 장치로서 말이죠.

 

신용목 그 사건을 피하지 말고 대면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어떤 기만일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정면으로 부딪라는 측면에서 궁극에는 위안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강지희 맞아요. 위안이라는 말이 단순다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 같아요. 다른 예로 웹툰작가로 나오는 백곰에게 삼촌은 죄책감의 대상이지만, 일상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로도 나타나고 있거든요.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소녀도 처음 읽었을 때는 공포스러웠지만, 소녀의 웃음과 함께 날아가는 나비가 희중이 용서받았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신용목 대형사고로 대변되는 시스템 문제가 어느 순간 증발되고 작품이 관계의 문제로 치달아갑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이 작가의 의도는 아닐까 생각했어요. 시스템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착된 시점에서 결국 서로를 상처와 고통의 원인이자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잖아요. 모든 관계가 우리에게 ‘원죄’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했습니다. 목격자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는데요. 대관절 목격자는 무슨 까닭으로 그 사건에 운명적으로 개입되느냐는 거죠. 여기서 ‘본다’는 감각의 윤리성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도 있을 것 같아요. 세월호는 거대한 시스템의 부조리에 의해서 침몰한 것이고 우리는 그 속에 살아가는 개인일 뿐이지만 이 시스템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죠. 극단적인 말 같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정홍수 희중의 어린 시절 일어난 소녀 살해사건과 아버지의 연루 문제 사실 명백하게 밝혀질 수 있는 일 아닌가요. 그 부분을 모호한 상태로 만들면서 희중의 죄의식을 해소되기 힘든 지점에 두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법적 책임이 가려지는 대목에서 더 나아가 죄책감이나 죄의 연루를 묻는 일이 문학의 몫일 테지만요. 작가는 우리 모두가 얼마만큼은 죄인이며, 그때그때 적절한 사과나 필요한 애도를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그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공감고, 그런 묵직한 윤리적 질문을 추리적 서사 속에 잘 녹여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그 연루와 엮임이 다소 작위적이고 과도한 느낌을 주면서 인물들이 품게 된 죄의식이 일종의 운명론적 순환에 갇힌 것처럼 보이는 것은 비판적으로 짚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용목 요즘 TV 연속극에서 인물 간의 관계가 작위적으로 얽혀 있잖아요.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기 위한 장치일 텐데, 한편으로는 대중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측면도 있요. 모든 우연이 운명처럼 짜여 있지만 진실은 안개에 가린 듯 늘 부유하고 있어서, 스펜스 같은 묘한 불안감과 긴박감을 주죠. 그런 요소들로 인해 운명론으로 흘러가는 듯하다는 말씀도 이해가 가지만, 책임의 문제를 소설이 완결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망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지만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 현실에 비추어 더 작위적이지는 않는지. 사실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늘 그것이 고민이고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강지희 두분 말씀처럼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무거운 책임의 굴레 속에 있지만, 한편 소설 안에서 어느정도 치유의 순간까지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득 자신이 간접적으로라도 가해자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에, 세계가 마법처럼 열리면서 존재들 사이에 따뜻한 관계망이 형성되는 거죠. 이 소설에서는 갈등하는 것으로 나오는 조안과 백곰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마지막에 백곰이 새로 웹툰을 시작하고 이를 조안에게 보여주는 장면은 그들 사이에 모종의 연대가 가능해지는 순간으로 보였습니다.

 

© 송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