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지돈 鄭智敦
1983년 대구 출생.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hier910@gmail.com
창백한 말
1
장이 모스끄바에 도착한 날은 1월 2일이다. 장은 비행 동안 책을 읽거나 잠을 잤다. 화물로 보내지 않은 그의 숄더백에는 세권의 책이 있었다. 『러시아 미술사』와 발터 벤야민의 『모스끄바 일기』, 보리스 사빈꼬프의 『창백한 말』. 떠나기 하루 전 만난 장은 모스끄바에 가면 미술관에 갈 거라고 했다. 그의 손에는 『러시아 미술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쳐 여러 도판을 보여줬다. 브루벨의 「악마」와 로드첸꼬의 「순수한 빨강, 순수한 노랑, 순수한 파랑」 등이었다.
나는 로드첸꼬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로드첸꼬의 그림은 백년 전의 것이라기엔 너무 현대적이었다. 현대란 현재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이나 시대를 지칭하는 거라고 장이 말했다. 그는 현대는 시간이 아닌, 인물이나 작품으로 오는 거라고 다시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요즘은 전혀 현대적이지 않다고 했다. 별로 와닿지 않는 말이었으나 나는 잠자코 들었다. 그의 얘기가 이어졌다.
장은 해외여행이 처음이지만 설레지 않는다고 했다. 여행은 모스끄바에 있는 장의 여자친구인 미주의 계획이었다. 미주는 셰쁘낀이라는 연극대학의 학생으로 아담한 키에 붉게 물들인 머리, 탄탄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한국에 왔을 때 두어번 봤지만 제대로 얘기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말이 없었고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었다. 매너가 없거나 생각이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장과 미주는 모스끄바에서 일주일을 머문 후 카이로로 갈 예정이었다. 미주는 카이로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반면 장의 목적은 모스끄바였다. 정확히 말하면 모스끄바에서 책을 읽는 거였다. 여행이나 관광을 대하는 장의 태도는 냉소적이었다. 그는 돌아올 기약만을 남긴 채 사라지는 것만이 진정한 여행이라고 말했다.
장은 모스끄바에서 일기를 쓸 거라며 검은 가죽커버의 노트를 꺼냈다. 일기의 첫장에는 이오시프 브로드스끼의 시가 적혀 있었다.
바람이 숲을 남겨두고
구름과
희디흰 고도를 밀어올리며
하늘까지 날아올랐다.
그리고, 차가운 죽음인 듯,
활엽수림은 혼자 서 있다,
따르려는 의지도,
특별한 표시도 없다.
브로드스끼는 쏘비에트 정부로부터 ‘사회에 유용하지 않은 기생충’이라는 선고를 받은 1964년에 이 시를 썼다. 63년에 이미 레닌그라드 신문으로부터 ‘형편없는 포르노그래피에 반 쏘비에트’적이라는 맹비난을 받고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유황주사를 맞고 물고문을 당한 뒤였다. 검찰은 그를 ‘벨벳 바지를 입은 한심한 유대인 포르노그래피 작가’로 기소했다. 당시 판사와 브로드스끼의 심문 내용은 방청석에 있던 한 여기자의 손에 의해 사미즈다뜨(지하출판물) 형태로 유출되었는데 이는 브로드스끼를 반체제의 전설로 만들었다. 판사가 묻는다. ‘피고는 누구의 허락을 받고 시인으로 활동하는가?’ 브로드스끼가 대답한다. ‘없다. 나를 인간으로 허락해준 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흐마또바는 멍청한 쏘비에트 정부가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브로드스끼는 1972년 추방 이후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고 8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장은 틈만 나면 브로드스끼의 일화를 인용했다. 예술가를 기생충으로 보는 건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마찬가지야. 자본주의에선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사회주의에선 구충제를 먹여서 죽이려고 하지만 자본주의에선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죽거든.
2
장의 일기는 눈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모스끄바의 셰레메쩨보 공항에 내린 장이 처음 본 것은 눈이었다. “작은 눈송이들이 주황색 유도등 주위로 흩날렸다. 활주로는 밤의 바다처럼 어둡고 축축했다. 미주는 게이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 오른팔을 꽉 붙들었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미주의 집이 있는 브랍찌슬랍스까야로 향했다. 택시의 여린 진동이 장의 필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도로 너머로 낮은 건물들이 보였다. 납작 엎드린 건물 위로 밤하늘이 멀리까지 드러났다.” 택시에서 내린 장이 처음 본 러시아인은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스킨헤드들이었다. “눈보라가 치는데도 그들 중 몇몇은 민머리를 내놓고 있었다. 그들은 택시에서 캐리어를 내리는 우리를 지켜보았다. 검은 가죽점퍼와 회색 후드티. 낡은 청바지와 군화. 미주는 쳐다보지 말라고 했다. 러시아인을 정면으로 보지 않는 게 안전하다고, 스킨헤드에 의한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뻬레스뜨로이까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 빈부격차가 러시아를 휩쓸었고 사람들은 무기력과 패배감에 휩싸였으며 그렇지 않은 이들은 극우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노인들은 스딸린과 쏘비에트를 그리워했고 젊은이들은 히틀러와 미시마 유끼오, 안드레아 바더를 영웅시했다. KGB 장교 출신인 뿌띤은 스딸린에 대한 존경을 공공연히 밝히며 유도복을 입고 칼라시니코프를 옆구리에 꼈다. 폭력은 일상이었고 외국인에 대한 혐오도 일상이었다. 뿌띤 집권 이후 500여명의 언론인이 죽어나갔다. “이 나라에선 지각있는 이들과 정신 나간 이들과 좌절한 이들이 한몸이다.”
장은 미주의 집에 있는 동안 사빈꼬프의 『창백한 말』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미주의 집은 낡은 아파트의 14층에 있었다. “좁은 엘리베이터는 끼익대며 오르내렸고 현관문은 지하벙커로 들어가는 것마냥 육중한 소리를 냈다. 높은 천장과 커다란 문, 두개의 방과 좁은 거실, 부엌, 화장실. 휑한 거실에 비해 침실인 방은 붉은색 러그와 갈색 책상, 주황색 스탠드의 조화로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장은 두개의 매트리스를 쌓아올린 미주의 침대에 누워 책을 읽거나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고 배가 고플 땐 부엌에서 씨리얼을 먹었다.
장은 단문으로 이루어진 『창백한 말』을 천천히 읽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은 필사했다. 일주일에 불과한 장의 일기가 꽤나 긴 것은 일기의 반이 『창백한 말』의 인용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어제 저녁 나는 모스끄바에 도착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제 저녁 나는 모스끄바에 도착했다. 나와 같은 지붕 아래 수백명이 함께 지낸다. 나는 그들에게 타인이다. 이 돌로 된 도시에서 이방인이고, 어쩌면 세상 전체에서 이방인인지도 모른다.”
보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
-
2018년 여름호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Light from Anywhere)정지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