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학습과 사유를 결여한 홍콩사회에서 ‘우산운동’을 사고한다

 

 

후이 보겅 許寶

홍콩 영남(嶺南)대 문화연구학과 교수. 저서로 『냉소주의와의 이별: 홍콩 자유주의의 위기』(告別犬儒: 香港自由主義的危機) 『부를 제한할 것인가, 가난함을 구제할 것인가: 부유함 속의 빈곤』(限富扶貧: 富裕中的貧乏) 등이 있음. 최근 홍콩의 우산운동에 깊이 관여하며 다수의 평론을 발표함.

  

 

중국대륙 정권 및 국가주의에 친화적인 일부 여론은 홍콩의 점령운동을 최근 몇년간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색깔혁명’과 나란히 논하며, ‘우산혁명’1)이 정권탈취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점령운동이 외세에 의해 조종당한 이른바 ‘역외정치’離岸政治라고 지탄하는데, 본토사회의 보호를 목표로 하는 우산운동이 실제로는 외세를 강화시킴으로써 홍콩과 중국의 이익을 손상시킨다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이같은 여론은 노골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실정치에 기초하여, 물질적 이익 외의 요구와 가치를 억압함으로써 점령운동에 참여하는 홍콩 민중의 주체성을 박탈하고자 시도한다.

이처럼 국가주의적 시각으로 민중운동을 단순화하는 데 방점을 둔 현실정치론은 홍콩 민중이 관심을 두고 대면하고 있는 진정한 문제들, 예를 들어 심각한 빈부격차 등과 관련해 베이징 정권이 위에서 아래로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은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정권의 성격에 대한 특정한 판단을 기초로 한다. 즉 중공이 사회주의 전통을 어느정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홍콩 자본주의 착취세력을 제약하여 견제하려 한다는 것이다.2)

그러나 이같은 논리는 지난 30여년간 중공정권과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국가주의적 시각하에 민중의 생활에서 비롯된 천차만별한 요구와 문화적 가치를 은폐하고 그 주체적 위치를 박탈함으로써, 국가정권이 정의 내린 협소하고도 노골적인 정치·경제적 이익에 대한 고려에 민중을 복종시키려 한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시기를 거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의 중국이 자본주의로부터 예외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일부분인가? 내 생각은 비교적 후자 쪽에 가깝다. 물론 먼저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짚어봐야 할 것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사실 새롭지도 자유롭지도 않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라 명명된 자본주의의 운용방식은 1930년대에 이미 출현했으며, 그에 대해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거대한 전환』(1957)은 매우 명료하게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의 정치·경제구조는 1930년대 빈부양극화의 상황과 거의 유사하다. 즉 ‘방임’과 ‘불간섭’ ‘자유시장’ 같은 공허한 수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에도, 부와 권력이 고도로 독점 및 집중된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는 도리어 감소했다. 따라서 오늘날의 이른바 신자유주의란 새롭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일종의 대중영합적인 정치적 조작으로, 자유무역이나 사유화 같은 각종 공허한 기표를 이용해 부의 집중과 권력의 독점을 가져오는 과정이다.3)

그리고 이같은 과정은 문화적 기획을 포함한다. 즉 신자유주의는 또한 사회적 가치를 개조하고 번역하는 문화적 기획으로서, ‘참됨()’(사실/논리)과 ‘선함()’(도덕/윤리)을 제거하고, 그것을 협소하고 공리적인 경제이익과 현실정치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할 때, 당대 중국사회의 생활은 매우 명확하고도 순수한 신자유주의 논리로 향한다. 만약 홍콩의 우산운동이 일종의 항중(抗中)운동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저항하는 것은 바로 중공의 정치·문화적 간섭으로, 특히 중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작년 831일 홍콩의 정치개혁 틀을 정한 후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항중은 ‘참됨’과 ‘선함’을 단일한 공리적 가치로 대체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문화기획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권탈취, 역외정치 같은 현실정치의 개념을 사용하여 우산운동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비민주적 정권과 제도적 폭력을 미화하는 효과를 낳을 뿐 아니라, 민중 주체의 능동성과 다원적 요구를 도외시한다. 그 결과 남는 것은 현실정치론을 고취하는 자가 말하는 대로 “공격대상을 만들어놓는” 식의, “뇌세포를 소모하지 않으려는 (…) 도식적인 이해”4)뿐으로, 우리가 미래를 탐색하고 출구를 모색하는 데 진정으로 도움이 되지 않거나 심지어 방해가 될 것이다.

이처럼 정권탈취식의 ‘혁명’ ‘역외정치’ ‘외세’ 등의 개념을 사용해 수십만 홍콩 민중이 참여한 사회운동을 해석 및 규정하는 것은 니체가 말한 “네가 사악하므로 나는 선량하다”라는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즉 그것은 타인(혹은 외세와 같은 적)의 행위를 반면가치로 삼아 자신의 올바름과 정의로움을 드러낼 뿐, 자신이 원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며 또한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묻지 않는다. 이같은 니체적인 의미에서의 노예의 도덕이 추구하는 바는 종종 외재적인 금전과 권력, 혹은 타인의 인정일 뿐이며(일례로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5)은 이번 우산운동 과정에서 시종일관 자신의 정치실적을 쌓고, 중공정부의 지지를 얻는 데 집중했다), 또한 이로써 행동과 인생의 목표를 정한다. 이같은 “네가 사악하므로 나는 선량하다”는 이해방식으로는 그 많은 홍콩 민중이 어떠한 정신으로 풍찬노숙하면서 체포와 구타의 위협을 무릅쓰고 최루탄과 후추 스프레이에 맞섰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글에서 나는 우산운동에 참여했던 교육 종사자의 시점에서, 국가주의 현실정치론이 등한시하고 있는 민중 주체를 다시 이 운동의 중심적 위치에 돌려놓고자 한다. 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