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한강 韓江

1970년생.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 장편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바람이 분다, 가라』 『소년이 온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이 있음.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그가 나에게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나는 열흘 가까이 떨어지지 않는 밭은기침을 하며 책상 앞에 웅크려 앉아 있던 참이었다. 외풍이 센 방이어서, 유리창에 올록볼록한 비닐을 붙였고 커튼도 쳤지만 코끝이 찼다. 보일러 온도를 더 높여야 하나. 의자에 걸쳐둔 솜조끼를 스웨터 위에 겹쳐입고 일어서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작고 마른 몸피에 어울리지 않게 통이 넓은 연한 색 청바지에, 역시 지나치다 싶게 품이 큰 갈색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한 발을 방 안으로 막 들였고, 남은 한 발은 바깥에 엉거주춤 걸쳐놓았다. 방문 너머 부엌의 어둠을 등진 그의 얼굴이 해쓱했다.

어쩐 일이세요?

반사적으로 나는 물었다. 그가 나에게 올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의 가족이 아니고 친구도 아니었다. 잠시라도 연인이거나 그 비슷한 무엇이었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내 질문이 무례하고 무정했다는 걸 깨닫고 얼른 덧붙여 말했다.

서 있지 말고 들어오세요.

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턱을 마저 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책상 앞 회전의자를 문 쪽으로 돌려놓았다.

여기 앉으실래요?

그는 망설이는 듯했다. 나는 재차 두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마지못한 듯 회전의자에 걸터앉은 그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뿔테안경 속의 장난기 어린 눈이 조금 웃는 것도 같았다.

차를 대접해야 할까? 하지만 죽은 사람이 차를 마시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차를 끓이는 동안 그를 혼자 두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잠자코 그의 얼굴을 건너다봤다. 어쩐 일이세요,라고 다시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뭐든 이유가 있겠지, 죽은 지 삼년이 지난 뒤 누군가에게 올 때에는. 기다려보기로 했다.

 

*

 

여기가 k씨 집인가?

예.

혼자 살아요?

예.

내가 예전에 k씨 결혼식에 갔었는데, 그게 벌써.

십삼년 전 이맘때예요. 십이월.

그렇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시간이 많이 흘렀어. 그가 되풀이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차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게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어올렸다. 낯익은 모습이었다. 그는 외모에 무신경한 사람, 그래서 얼마간 촌스럽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지만, 억양이나 표정, 손동작 같은 것은 대조적으로 서울 토박이 같았다. 사석에서도 사용하는 문어체 문장들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실제로는 오지라 할 만한 강원도 군사지역에서 태어났고, 인근 마을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필사적으로 책을 탐식하는 그의 습관은 여섯개 학년이 한 학급으로 운영되던 초등학교 분교의 도서실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십칠년 전 첫 직장에서였다. 그는 나보다 여덟살 많은 선배였으니 나에게 말을 놓아도 되었고 간혹 높여도 무방했다. 그는 질책할 일이 있거나 까다로운 일을 의논할 때마다 깍듯한 존댓말을 썼는데갑자기 말을 높이는 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편안한 분위기에서도 다른 선배들처럼 분명한 하대를 하지는 않았다. 가벼운 경어 표현을 이따금씩 섞어 썼고, 뭔가 지적할 때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주 말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글쎄, 그건 다음 기회로 넘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거리를 뒀다.

 

방금 중얼거린 말을 스스로 지우려는 듯 그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다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닌데……

지금 그가 내 사생활을 중언부언 캐묻거나 추궁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곧 알아차렸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단지 정확하고 싶은 것이다. 말로 오류를 범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때 선배님이 접시를 사주셨어요.

화제를 돌리려고 나는 밝게 말했다.

축의금 대신에요. 인사동 통인가게 거였는데, 두개 한벌짜리 분청사기 접시였어요.

내가 그랬나?

미소를 지어야 할지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되물었다.

하나는 이사 다니면서 깨졌는데, 나머지 하나는 그대로 있어요.

나는 접시가 있는 부엌 쪽을 가리켰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가리킨 쪽의 어둠을 향해 그가 얼굴을 돌렸다.

결혼식에서 축의금을 내는 게 늘 싫긴 했어. 너무 편리한 방법이잖아.

그가 또박또박 발음하며 다시 집게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어올리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죽은 뒤에도 그리 변하진 않는 거로구나, 나는 생각했다.

 

*

 

왜 여기로 왔는지는 나도 몰라요.

여전히 침착하게 그가 말했다.

꼭 가고 싶은 곳에 가게 되지도 않고, 꼭 보고 싶은 사람을 보게 되지도 않아.

책상의 스탠드 불빛을 옆으로 받은 그의 얼굴은 절반쯤 밝았고, 나머지 절반은 먹물을 끼얹은 것처럼 어두웠다.

선택할 수 있다면 매번 딸아이를 보러 가겠지. 그애가 벌써 열아홉살이야.

순간 나는 사과하고 싶어졌다.

미안해요 선배. 저는 몰랐어요, 지난봄까지.

뭘 몰랐어요?

아무도 저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경주 언니 그렇게 되고, 첫 직장에서 만났던 사람들하곤 완전히 연락이 끊겼어요. 지난봄에 J사 사람을 우연히 만나 선배 안부를 물었는데, 대답이 믿기지 않았어요. 그 사람을 안 만났으면 아직도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눈가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그가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나쁘지 않은데.

그의 나이는 마흔여섯에서 멈췄고 나는 그 뒤로 삼년 동안 나이를 먹어, 이제 그와 나는 다섯살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여태 내가 함께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의 소식을 뒤늦게 들은 그 봄날 저녁 나는 인터넷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입력했었다. 이년 칠개월 전의 부고 기사가 가장 먼저 떴다. 방금처럼 눈가의 주름을 드러내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 사진을 생소한 느낌으로 들여다보고, 지인들이 트위터에 올린 애통한 단상들을 여전히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읽어내려간 뒤, 오래전 몇차례 들러본 적 있던 그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그가 쓴 기사들과 생활의 단상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업데이트되던 그곳에는 정말로 삼년여 전부터 새 글이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정색을 하면 커지는 검은 눈으로 안경알 너머에서 나를 응시하는 표정이 어쩐지 두렵게 느껴졌다. 내가 잘못된 화제를 꺼낸 게 분명했다.

선배, 차 드실래요?

다시 나는 밝게 물었다.

그럴까?

산딸기차, 박하차, 홍차가 있어요.

박하차가 좋겠는데.

나는 낮은 책장 위에 놓인 씨디플레이어를 켰다.

음악 들으실래요?

좋지.

어떤 거 틀까요?

뭐든. k씨가 듣고 싶은 것.

나는 그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서 그가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블로그에 실렸던 마지막 기사가 초가을 밤 사간동 한옥에서 열린 퓨전 음악회였던 것을 기억했다. 기사 다음에 올린 단상에서 그는 그 공연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평생에 걸쳐 가본 어떤 음악회보다 좋았다고, 정확한 이유는 어째선지 잘 설명할 수 없다고 썼다. 나에게는 여남은개의 국악 음반이 있지만 그중 퓨전은 둘뿐이다. 해금과 피아노 앙상블을 찾아 씨디플레이어에 넣었다.

물이 금방 끓을 거예요.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일어서서 창 옆 책장으로 걸어갔다. 아까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던 듯, 내가 최근에 산 책들 중 하나를 호기심 어린 손길로 꺼내 목차를 펼쳤다. 쉰 목소리로 흐느끼는 것 같은 해금 가락이 막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부엌으로 갔다. 주전자에 물을 붓고 끓이는 동안 가장 좋은 머그잔 두개를 꺼내 티백을 넣었다. 그가 선물했던 분청사기 접시를 씽크대 위쪽 선반에서 찾아내, 냉장고에 남아 있던 호두와 건포도를 모두 털어 담았다. 불안한 마음에 돌아볼 때마다 여전히 방에서는 스탠드 불빛과 음악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책장 앞에 서 있는 그의 헐렁한 청바지가 보였다.

 

*

 

물이 끓기 직전에 나는 생각했다.

그가 조금 변하지 않았나.

물론 많은 부분이 놀랄 만큼 그대로였다. 하지만 십칠년 전 함께 직장생활을 하던 때와는 분명히 달라져 있지 않나.

죽었기 때문일까,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비슷하게 침착한 저 표정을 그의 블로그에 올려진 몇장의 사진에서도 봤다. 나이를 먹으며 성마르고 까다로워지는 사람과 온화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후자 쪽인 것 같았다. 감포 바닷가의 콘도로 떠났던 회사 수련회에서 얼굴에 맥주를 뒤집어쓴 채, 목을 타고 셔츠로 흘러내리는 술을 닦으려 하지 않은 채 핏발 선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던 서른한살의 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

그때 나는 입사한 지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수습사원이었기 때문에 그 충혈된 눈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 그의 얼굴에 맥주를 끼얹은 뒤 유리잔을 쥔 채 떨고 있는 여선배의 손을 이해하지 못했다. 좌중의 침묵을, 헛기침을, 콘도 지하의 컴컴한 술집 테이블에서 서둘러 빠져나가는 임원진의 구둣발 소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와 여선배가 어떤 연애에 얽힌 사이일지 모른다고 막연히 상상했다. 어쨌거나 막내사원인 내가 테이블을 정돈해야 했다. 카운터로 뛰어가 냅킨 한다발과 물수건을 가져와서 그에게 건네며, 여전히 입술을 떨고 있는 여선배의 창백한 옆얼굴을 놀랍고도 꺼림칙한 마음으로 훔쳐보았다.

자신의 얼굴과 셔츠를 대강 문질러 닦은 뒤에도 그는 고개를 똑바로 세운 채 침묵했다. 사람들이 눈치껏 차례로 그 불편한 자리를 떠나는 동안, 문제의 여선배는 맹렬한 속력으로 술을 들이켜 곧 엉망으로 취해버렸다. 열두시가 가까워지자 그와 여선배, 그리고 나만 테이블에 남았다. 둘이서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을 거란 생각에 나도 엉거주춤 일어섰다.

어디 가요? 우리 바람 쐬러 나갑시다.

조금도 취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같이 갑시다, k씨.

아니에요, 뒤로 물러서는 나에게 그는 한번 더 힘주어 말했다.

같이 갑시다.

콘도에서 불과 이백여 미터 거리에 해변이 있었다. 두 사람은 내 앞으로 세걸음쯤 떨어져 걸었다. 엉망으로 취한 줄 알았던 여선배는 비틀거리긴 했지만 부축받지 않아도 될 만큼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들은 진지하게 대화했으며 때로 언쟁했다. 바람과 파도 소리에 묻혀 대화의 내용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연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들은 사적인 화제를 다루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검은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자, 흰 모래펄 틈으로 거칠게 솟아오른 젖은 바위들을 그들은 앞장서서 밟으며 나아갔다. 간혹 뒤돌아보며 내가 아직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는데, 그것은 완벽한 제삼자이자 아무것도 모르는 스물세살짜리 수습사원에게 던질 만한 눈길이 아니었다. 제발 이곳에 둘만 남겨놓지는 말아달라고, 이 시간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곤란과 괴로움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청하는 것 같은 이상하게 간절한 시선이었다. 얼얼하게 얼굴을 때리는 짠바람과, 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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