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길
『김학철전집』 발간에 부쳐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명예교수. 저서로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근대소설사론』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문학의 귀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연변에서 부쳐온 『김학철전집』 여덟권1)을 받아들고 새삼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 가이없다. 식민지시대에는 중국에서 일제와 투쟁했고, 해방 직후에는 서울에서 미군정에 저항했고, 월북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불화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을 비판한 고매한 사회주의 전사 김학철(金學鐵, 1916~2001) 선생! 태극기와 붉은기, 애국애족과 사회주의국제주의가 걸림없는 자유의 경지에서 따듯하게 제휴한 경우는 일찍이 없었거늘, 이 깨끗한 마음이사 일체의 전제(專制)에 저항하는 신비로운 원천일지도 모른다. 민주적 사회주의의 길 위에서 일생을 불굴의 혁명적 낙관주의를 품성대로 견지해오신 선생은, 아, 최후의 순간, “희망이 없어”라고 뇌시며 운명하셨다. 노혁명가의 탄식 앞에서 모든 말길이 끊어진다.
1. 김학철 귀국기
『격정시대』가 한국에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은 현재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작가 김학철의 자전적 장편소설이다”2)로 시작되는 서문을 읽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가 연변에 생존하고 있다니! 해방 직후에 나타났다 홀연 사라진 김학철을 남한으로 불러낸 6월항쟁(1987)의 마술에 감사하는 한편, 중국공산당의 국제전사인 그가 바로 그 중국에서 ‘반동작가’로 지목, 4인방 몰락(1976) 이후에야 해금, 그 결실이 1986년 중국료녕민족출판사에서 간행된 『격정시대』라는 대목(격정시대① 7면)에 이르러 당혹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서문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앞선 소개들이 없지 않았다. 선편(先鞭)은 이정식(李庭植)·한홍구(韓洪九) 엮음 『항전별곡』이다.3) ‘조선독립동맹 자료Ⅰ’이란 부제가 보여주듯 1942년 중국공산당과 연계, 화북(華北)에서 민족해방단체로 결성된 조선독립동맹과 그 군사조직 조선의용군(조선의용대의 후신)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소개인데, 6·25 이후 한국에서 철저히 봉인된 사회주의민족해방투쟁사의 뚜껑을 여는 역사적인 문헌이 아닐 수 없다. 이 책 속에 김학철이 껴묻어 한국에 상륙한바, 그 실질적 편집자 한홍구는 말한다.
여기에 수록된 김학철의 『항전별곡』(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1983) (…) 등은 바로 오랜 침묵 끝에 나온 의용군 자신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귀중한 것이다. 주목할 사실은 이와 같은 역사기록이 1980년대에 가서야 간행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독립동맹과 의용군 출신들은 북한에서뿐 아니라 중공에서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문화혁명은 이들에게 큰 시련이었다. 문화혁명의 성격은 (…) 중국 내의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한족에 대한 동화정책이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는 없다. (…) 특히 독립동맹 출신들은 이 정책에서 두드러진 표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독립동맹 출신 중 상당수가 이 기간 중에 투옥되기도 했고 독립동맹 당시의 사료들이 상당히 훼멸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의 역사는 70년대 후반 4인방 축출 이후에야 빛을 보게 되었다.4)
조선독립동맹이 남에서는 좌익으로, 북에서는 연안파로, 그리고 중국에서는 ‘지방민족주의’로 몰린 맥락이 드러나거니와, 1935년 중국 망명-의열단-1938년 조선의용대-1941년 호가장(胡家莊)전투에서 부상으로 포로-나가사끼(長崎)감옥-왼쪽 다리 절단-해방 직후 서울로 귀환한 김학철의 “소설적인 삶”이 파노라마로 제시되던 것이다.(항전별곡 328~29면)
그후 김희민(김재용金在湧의 가명)이 엮은 『해방3년의 소설문학』(세계 1987)에 김학철의 단편 「균열(龜裂)」(1946)과 「밤에 잡은 부로(俘虜)」(1946)가 선보인다. 아마도 당시에는 편자가 연변 김학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듯싶은데, 해방 직후의 진보적 문학전통을 새로이 발굴한 이 소설집에 껴묻어 김학철의 단편이 40여년 만에 햇빛을 봤으니 이 또한 80년대 젊은 운동의 성과다.
이처럼 한홍구와 김재용에 의해 슬그머니 한국으로 스며든 김학철의 귀환을 결정적 사건으로 매긴 것은 물론 『격정시대』다. 풀빛은 『격정시대』에 이어 『해란강아 말하라』를 출간함으로써 김학철 붐을 확정한다. 그 경위가 흥미롭다.
이 소설은 원래 1954년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의 연변교육출판사에서 3권으로 출간된 것인데 편의상 (…) 상하 두권으로 재편집하여 발간하게 되었다. (…) 30년이 넘어 구하기 힘든 (…) 원본을 (…) 흔쾌히 제공해주시고 옥고까지 보내주신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大村益夫) 교수님과, 일본여행중 바쁜 여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수소문하여 찾아 전달해주신 황석영 선생의 애정어린 도움이 없었으면 이 책의 발간은 불가능했다는 것을 밝혀둔다.5)
오오무라 마스오와 황석영(黃晳暎)의 주선이 빛난다. 오오무라는 이 책에 부친 「김학철 선생의 발자취」를 통해 작가의 생애, 특히 월북 이후를 개관함으로써 퍼즐을 완성했다. 1946년 월북-1951년 북경(北京) 이주-1952년 이래 연길(延吉) 정착을 밝힌 위에 그 고초의 내막을 구체적으로 알린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서 비판받고 (…) 24년간 (…)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반혁명스파이’로 몰려 10년간(1967~77)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0년에 와서야 비로소 사회활동에의 복귀를 허락받아 (…) 창작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1985년에 중국국적을 획득한 이래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에 가입 (…) 연변분회의 부주석의 한 사람으로서 선출되었다.”(해란강 하 293면)
“외발의 항일영웅”(해란강 하 292면)이라는 애칭을 헌정한 오오무라의 국제적 우정으로 김학철의 한국 귀환이 획을 그었다는 것은 시사적인데, 이를 김정한(金廷漢, 1908~96)의 복귀에 비긴 황석영의 지적은6) 정곡을 찌른 것이다. 김정한이 오랜 침묵을 깨고 「모래톱이야기」(1966)로 서울문단에 돌아왔을 때 일본 맑스주의와 연계된 식민지시대 프로문학의 봉인이 따진 것이라면, 김학철의 귀환은 중국혁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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