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세월호 이후, 다시 생각하는 한국문학

 

부모의 자리에 서서

최근 소설이 ‘세월호’를 사유하는 방식

 

 

신샛별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절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의 두가지 행로김애란과 김사과에 주목하여」 등이 있음. venus860510@naver.com

 

 

1. 세월호참사와 부모의 자리

 

세월호참사로 별안간 아이를 잃었지만, 부모들은 부모의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아직 배 안에 갇혀 있을 실종자를 찾아야 했고, 수장(水葬)될 위기에 처한 진실을 건져올려야 했으며, 재발을 방지할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나라를 총체적으로 바꿔야 했다. ‘아이를 잃은 부모’라는 장소는 이 길고 긴 싸움의 진지였고 최전선이었다. 지난 한해, 오로지 누군가의 부모로서만 살아온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 한편에서는 응원과 지지를 보내며 나름의 방식으로 그 뜻에 동참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악의적인 해석을 생산·유포시켰다. 특히 세월호 인양에 드는 비용과 유가족이 받을 보상금 액수를 운운하는 정부의 공식발표는 현 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여론의 향방을 어느 쪽으로 유도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표면화되었느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 세월호 관련 보도에 대해 언젠가부터 피로를 호소해온 여론의 흐름 내에도 이미 그러한 배반의 조짐은 잠복돼 있었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끔찍한 결과로부터 서둘러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세월호 ‘사고’가 ‘처벌 또는 보상’이라는 편의적인 과정을 거쳐 신속히 정리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작년에서 올해로 넘어오는 동안 영화 「인터스텔라」(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2014)와 「국제시장」(윤제균 감독, 2014)이 크게 흥행한 까닭은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두편의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를 구하는 데 성공한 부모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은 전지구적 재난상황에서 자녀세대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지구를 대체할 만한 행성을 찾아 우주탐험에 나선다. 그런가 하면 「국제시장」에는 한국전쟁 이후 우리 현대사의 주요 장면을 몸소 통과하며 가난을 극복하고 가족을 살려낸 아버지가 있다. 자신의 삶은 방치·포기·희생하고서라도 아이를 키워내는 것이 바람직한 부모라고 믿는 한국사회의 ‘부모도덕’1)은 한국전쟁 이래로 급속한 산업화시기를 거쳐 이제는 자녀양육과 관련한 온갖 문제들을 시장의 원리가 장악해버린 현재까지도 여전히 공고한 것 같다.2) 아이 한명을 키우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을 수치화해 발표하는 나라, 투자자나 다름없는 부모가 아이의 성적, 취직, 결혼을 관리·통제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의 생존가능성은 부모의 경제적 역량과 점점 밀접해지고 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지금-여기의 부모는 벌고 또 벌어야 한다. 부모노릇의 고단함은 아이를 통해 언젠가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는 미망으로 얼마간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왕의 부모도덕에 짓눌린 젊은 세대는 역설적으로 연애·결혼·출산의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고 인생을 계획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젊은 세대에게 아이란 고된 노동의 댓가로 겨우 마련한 삶의 기반마저 좀먹는 무서운 존재가 돼버린 건지도 모른다.

부모라면 어떻게든 아이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는 한국사회의 부모도덕은 기묘한 방식으로 일그러져 세월호 유가족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근거로 전용됐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그들은 아이를 지켜내지 못한 부모가 아닌가.’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들이 파렴치하게 시신을 앞에 두고 흥정까지 하는 모양새라니.’ 두편의 영화를 보며 우리가 실제로는 하지 못한 일을 영화 속에서 해내면서 환상적 자기위안에 빠져 있는 동안, 국민을 구해야 한다는 국가의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떠넘겨졌고, 국가의 실패 탓에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고통은 오롯이 그들만의 것이 돼버렸다. 그런데 세월호참사로 아이를 잃은 부모의 모습에는 재래의 부모도덕의 틀로는 충분히 파악할 수 없는 어떤 면모가 있다. 그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예전의 부모들과는 달리, 한없이 슬퍼하다가 대중의 관심과 공론의 영역에서 내쫓기듯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그러면 죽은 아이들을 다른 의미에서 살려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연하게 진실을 향해서 걷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부모의 길이라는 듯이,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부모로 살겠다는 듯이. 2014416일 이전에도 그들은 부모였으나, 아이를 잃고 난 이후에 그들은 또 한번 부모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한번도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한번도 예상한 적 없는 모습으로.

공감과 지지 못지않은 오해와 비난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그들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외로우면서도 가장 급진적인 주체성을 현시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그토록 자주 문학과 윤리에 대해 논의해왔으면서도 여태까지 상상해본 적 없는 어떤 주체성의 면모를 계시하고 있지 않은가. 주체성이란 어쩌면 하나의 장소를 가리키는 이름일지 모른다. ‘아이를 잃은 부모’라는 장소, 그 자리에 서면 세계를 달리 볼 수 있거나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당면한 일을 함께 해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장소를 포섭하여 앞으로도 내내 그것을 ‘살아내는’ 방법은 없을까. 어쩌면 새로운 주체성의 창안을 제 고유한 임무로 삼는 문학이야말로 바로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일 테다.3) 이 글에서는 세월호참사 이후 발표된 몇편의 소설과 더불어 ‘아이를 잃은 부모’라는 사유와 실천의 장소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 분투의 함의를 헤아려보고자 한다. 아이를 살아남게 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에 시달리며 신음해온 부모에게도, 미래에 올지 모를 아이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살해해본 경험이 있는 젊은 세대에게도, 이것은 긴급한 공부일 것이다.4)

 

 

2. 잃어버린 생명, 되찾아야 할 삶

 

김애란(金愛爛)의 「입동」(『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은 한국사회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이며, 그들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되는지를 적실히 보여준다. 태어난 지 52개월 된 ‘영우’가 후진하던 어린이집 차에 치여 숨진 뒤, 반년 동안 영우의 부모는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아이의 흔적을 더듬으며 살아간다. 영우를 잊지 못하는 아내마저 잇달아 잃게 될까 두려워진 남편은 아이가 쓰던 물건들을 표나지 않게 정리해보기도 했지만, 아내와는 갈등만 일으킬 뿐 그들의 삶은 회복될 기미가 없다. 차라리 이사를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 때문이다. 베란다 밖으로 지나다니는 출퇴근 차량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던 아이, 깨끗이 치워둔 거실을 곧잘 어지르던 아이, 아이를 위해 꾸며진 방, 부모 모르게 아이가 남겨둔 낙서…… 아직도 곳곳에 아이가 함께하고 있는 그 집에 계속 산다면 부모는 죽은 아이를 영영 떠나보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 소설이 집장만을 위해 부부가 애태우며 고생하다가 경매로 싸게 나온 작은 아파트를 구입하고 기뻐했던 시절을 꽤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집을 떠날 수만 있다면, 죽은 아이를 떠나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