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역사의 그늘 넘어선 서사 미학의 탐색

 

 

오창은 昶銀

문학평론가. 저서로 『비평의 모험』, 『모욕당한 자들을 위한 사유』, 『절망의 인문학』 등이 있음. longcau@hanmail.net

 

현기영 玄基榮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제주도 현대사의 비극과 자연 속 인간의 삶을 깊이있게 성찰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소설집 『순이삼촌』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 『지상에 숟가락 하나』 『누란』, 수필집 『젊은 대지를 위하여』 『바다와 술잔』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만해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받았다.

 

 

현기영의 「아스팔트」(1984)4·3의 기억을 봉인한 ‘삼십육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시 열세살이던 창주의 시선을 중심으로 4·3의 경험이 재구성되어 있다. 입산자들과 경찰 사이에서 혹독한 시절을 견뎌야 했던 새밋드르 마을 주민들의 일상은 위태로웠다. 산사람들에게 끌려가 두달여 동안이나 동굴생활을 감내하기도 했고, 하산한 이후에는 전략촌 건설에 동원되고 토벌대의 등쌀을 받아내야 했다. 그 시절, 무고한 주민의 입장에 서 있던 창주는 지서주임 임씨와 마을이장 강씨가 조작했던 일들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억압 속에서 제대로 진상을 밝힐 기회조차 없이 보이지 않는 대립관계만 형성해왔다. 창주는 이제 모교의 중학교 교감이 되어 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강씨가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에 놀라면서도 의아해한다. ‘삼십육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임종을 앞두고서야 강씨는 그 시절의 진상을 밝히려 하는 것이다.

「아스팔트」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강씨의 임종을 지키려 홀로 걷는 창주가 대면한 ‘아스팔트’이다. 다음과 같이 감각적인 문학적 언어로 아스팔트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부드럽게 뺨을 핥는 감촉, 자정이 넘은 시간 어둠속에 붐비는 이 눈송이들은 필경 사자들의 혼령이리라. 두런두런 뭐라고 저희끼리 속삭이는 소리. 산야 여기저기 풍우에 곱게 닦인 흰 백골과 삭은 고무신들…… 그러나 눈송이들은 아스팔트를 뚫지도 못하고 덮어싸지도 못한다. 눈송이들은 다만 견고한 아스팔트 위에 부딪쳐 허망하게 바스라지고 녹아버릴 뿐이다.

—「아스팔트」, 『아스팔트』(현기영 중단편전집2, 창비 2015) 90면.

 

창주는 새밋드르를 향하면서 ‘우르르 소소리바람’에 몸이 오싹해짐을 느낀다. 죽은 혼령들의 거처인 솔숲에서 ‘검은 숲의 기억’을 환기했기 때문이다. 4·3에 대한 기억을 봉인하고 있는 것이 아스팔트다. 아스팔트의 불모성은 금기와 억압에 대한 은유이다. 아스팔트 밑에는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4·3 원혼들의 목소리가 봉인되어 있다. 관광객의 관문인 공항으로부터 아스팔트 관광도로가 제주도 산야 전체로 뻗어 있다. 제주도의 관광명소들과 중산간 마을 곳곳은 학살의 장소였고, 희생자들의 한이 맺혀 있는 원혼의 거처였다.

현기영은 봉인의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기억의 풀씨를 곳곳에 뿌린 작가다. 그는 4·3을 최초로 소설화한 「순이 삼촌」(1978)을 발표한 이래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1979)를 연이어 발표해 4·3의 진상을 세상에 알렸다. 이로 인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소설집이 판매금지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의 문학은 ‘변방세계의 보편성’을 향해 있다. 중심 혹은 주류적 삶에서 비껴 선 채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통해 대안적 세계를 모색해왔다. 그것이 때로는 도시적 삶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기도 하고(「아내와 개오동」 「동냥꾼」 「겨우살이」 「망원동 일기」 등), 은폐된 역사의 진실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순이 삼촌」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 「잃어버린 시절」 「길」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거룩한 생애」 「목마른 신들」 「쇠와 살」 등). 또는 역사 속 비주류로 취급되어온 ‘반란의 역사와 민중주의의 결합’이라는 성취를 이뤄내기도 했다(장편 『변방의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 현기영은 권력화를 좇는 변방이 아니라, 거부와 저항을 통해 인간주의를 구현하는 ‘탈중심의 공동체’ 사회를 지향했다. 그 스스로 ‘변방에서 꾸리는 공동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의 문학은 앞에서 언급한 ‘아스팔트’의 이질성과 ‘변방의 미학’이 중첩되어 있다. 도시에서 살면서도 도시와 동화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고향의 세계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형상화하지도 않는다. 대표작인 「순이 삼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제주도와 서울이 공간적으로 충돌하고, 19484·3의 시간과 1978년 근대의 시간이 충돌한다. 그때의 사건에 대한 처절한 목격자 순이 삼촌의 목소리와 가해자인 고모부의 목소리가 공존한다. 4·3을 증언하는 다양한 목소리들 사이에서 소설 속 화자인 ‘나’는 타자이면서 주체이다. 「순이 삼촌」의 문학적 성취는 ‘변방의식’ 즉 ‘타자성’에 주춧돌을 놓았기에 빛나는 성좌처럼 돋보인다. 오로지 피해자의 입장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도 함께 들어야 하는 타자로서 ‘나’의 위치는 호소력이 강하다. ‘나’는 현재 제주도에 살고 있지 않고, 그 시절의 기억에 포박되어 있지도 않다. 역사적 사건으로만 4·3을 알고 있는 후속세대가 그러하듯이 기억은 역사화되어 잊히고 있다. 바로 이러한 ‘타자성’ 때문에 ‘나’를 통해 ‘재구성된 사건의 진상’은 ‘치열한 기억투쟁의 전장’으로 긴장감을 획득한다. 중심은 위계적이다. 변방은 연계적이다. 변방의식을 갖고 있는 작가는 세계를 주변부적이면서 비위계적인 공동체들로 파악한다.

현기영의 문학세계가 그의 등단 40주년을 맞아 중단편전집 3권으로 간행되었다. 지난 56일 오후에 ‘인문까페 창비’에서 대담을 가졌다. 현대사의 현장에서 시대와 대결을 펼쳐온 원로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면에서 깊은 울림이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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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작인 단편 「아버지」는 모더니즘적인 심미적 열정이 돋보인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4·3에 대한 언급이 곳곳에 나옴에도 불구하고,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