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권여선 權汝宣

소설가.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 『레가토』 『토우의 집』,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숲』이 있음.  puruntm@empas.com

 

신용목 愼鏞穆

시인.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가 있음. 97889788@hanmail.net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이 있음. myosu02@hanmail.net

 
 

정홍수(사회) 올해 두번째 좌담이군요. 오늘의 초대손님은 소설가 권여선씨입니다. 소설도 맵고 예리하지만, 평소 날카롭고 솔직한 의견 표명으로도 유명하지요. 주로 술자리 선배들이 그 희생양이 되긴 하지만요.(웃음) 기대가 많이 됩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눌 대상작은 김채원(金采原) 소설집 『쪽배의 노래』(문학동네 2015), 전성태(全成太)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창비 2015), 김성중(金成重) 소설집 『국경시장』(문학동네 2015), 문인수(文仁洙) 시집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창비 2015), 최정례(崔正禮)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창비 2015), 송승언(宋昇彦) 시집 『철과 오크』(문학과지성사 2015)입니다. 먼저 권여선씨의 간단한 인사말씀을 듣고 시작하죠.

 

권여선 반겨주시는 인사가 겉으로는 치켜세우는 말로 들리지만 속으로는 뭔가 추문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으로 가득해 보이네요. 하필 이런 화창한 봄날, 좋아하는 신용목 시인과 만만한 선배를 만나 반갑습니다.(웃음)

 

 

김채원 『쪽배의 노래』

 

문초-쪽배의 노래_fmt

정홍수 김채원 선생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김채원 소설은 실존적 자기 상처와 불안의 응시, 허무와의 싸움 등을 통해 전개되는 자기탐구의 문학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즈음의 한국소설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든 지점이 아닌가 싶어요. 자기대면, 자기탐구야 문학의 영원한 주제겠지만, 한국문학의 진폭이 커지고 방법적으로 다양해지면서 김채원 소설 식의 정면대결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방식은 뭔가 구투(舊套)가 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를테면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생의 한가운데』 같은 작품이라든지 ‘전혜린(田惠麟)’ 같은 이름으로 환기되는 실존적 질문의 자리가 한국 근현대소설의 한 주류였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김채원의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느꼈던 점인데, 거기엔 여전히 바래지 않 문학적 울림이나 광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들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권여선 전체적으로 거리를 확보한 시선이 갖는 격조와 비애감이 좋아서 몰입해 읽었습니다. 시적이면서 산문적이고, 꼭 소설의 형식이 아니어도 좋은, 자기 문장과 시선과 정념으로 이뤄진 세계였어요. 그러면서도 「소묘 두 점」의 스타벅스 장면을 보면 세태도 깔끔하게 잘 다룬다는 느낌을 받았고요. 「누가 빨강 파랑 노랑을 두려워하는가」에서 여성의 불길하고 위태로운 순간을 세밀하게 잡아채는 긴장감이, 오정희(吳貞姬) 이후로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김채원이 하고 있더군요. 「쪽배의 노래」가 참 좋았는데, 소설의 완성도를 떠나 제가 요즘 이런 글을 몹시 읽고 싶어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유년의 이야기라는 게 사실 빤할 수 있는데, 장면들이 갖는 광채가 대단했어요. 어머니가 화장하는 장면, 굴비 살 뜯는 장면, 머리 질끈 동여매고 쇠골을 먹는 장면, 도둑 때문에 대못을 박았다 뺐다 하는 장면, 그 사이로 애틋하게 울려 퍼지는 ‘셰인, 돌아오라고 말이야!’ 하는 오빠의 목소리 등이, 이른바 소설에 구속되지 않고 보석 같은 산문의 형태로 결정(結晶)된 게 아름다웠습니다.

 

신용목 저도 읽는 내내 김채원이란 작가와 마주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가파른 시간을 견딘 자가 읊조리듯 이야기하는 어조가 참 좋았어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사회·역사적 사건들을 처리하는 방식인데요. 이를테면 전쟁이나 9·11테러 같은 엄청난 일들을 다루면서도 철저히 자신의 경험과 시선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우리는 으레 이런 주제에 사회학적 시각이나 특정 담론이 끼어드는 데 익숙해져 있는데, 이 작품에선 사회·역사적 구조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전제된 의도가 최대한 배제된 방식으로, 지극히 개인화된 시각으로만 처리해요. 요즘 시나 소설은 세계에 질문하고 응답하고 다음 세계를 그리는 것까지 한꺼번에 하려고 하거나 최소한 작가의 의도 속에 전 과정을 기획한 뒤에 씌어지고 있는 인상을 주는데, 김채원 소설은 애초에 세계를 정직하게 마주한 다음 어쩔 수 없이 환기되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멈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령 「서산 너머에는」에서 “전쟁이란 다른 무엇이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 왜 공포인가 살펴보면 죽음 때문이었다. (…) 삶은 개인의 몫이 아니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기라는, 내가 믿던 그 말이 허수아비처럼 무너져내리고 있었다”(31~32면)라고 개인적 차원에서 소박하다면 소박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그 정직한 힘이 오히려 감동적이고 깊이있게 느껴졌습니다.

 

정홍수 김채원 소설은 거의 모든 작품이 하나의 작품으로 수렴될 수 있을 듯싶게 비슷한 지점을 파고 또 팝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리는 문학적 파문은 단순한 반복을 넘어섭니다. 실존적 불안이라는 게 있고, 그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여성적 경험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거기 독특한 울림이 있습니다. 이번 소설집의 「조금 더 가까이」에 60년대로 추정되는 당시 젊은 세대의 풍경이 나옵니다. 무언가 모호하고 혼돈스러운 가운데 자유를 갈구하는 청춘들의 흔한 초상일 수도 있죠. 그러나 김채원 소설은 거기에서 자기 정직성, 자기 절실성을 통해 자기만의 길을 찾아내고 있는데, 그것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란 사실이 놀랍습니다. 작가의 문장은 유려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굉장히 소박해요. 어떤 곳은 어눌한 느낌마저 줍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사물이나 세계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느낌이나 생각을 어떤 틀에 넣거나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려는 안간힘, 절실함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상투적이고 일반적인 자기이해, 세계이해의 지평이 교정되고 심화되는 지점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작가의 대표작 「겨울의 환」(1989)은 한 여성의 이야기가 어머니, 외할머니로 이어지는 이전 세대 여성들의 경험 역사와 만나 분단의 상처, 이산과 실향의 아픔을 품는 데까지 나아가는데 그 과정이 너무도 절실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인 「쪽배의 노래」는 어떤 면에서 「겨울의 환」 다시 쓰기 같은 느낌을 주는데, 한국전쟁 전후의 아프고 고단하고 애틋한 역사와 개인의 시간을 담담하게 추억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존재의 어쩔 수 없는 슬픔이나 우수로 감싸안는 필치는 훨씬 깊어진 울림과 감동을 줍니다. 집이 쪽배가 되어 밤을 건넌다는 환상적이고 시적인 이미지가 소설 전체에 부여하는 기품도 인상적인데, 이 소설을 지탱하고 있는 두 시선이랄 수 있는 유년기 소녀와 황혼기 여성의 자리를 하나로 모아내고 환기하는 절실하고 적절한 문학적 장치로 보였습니다. 전쟁 귀향자인 오빠의 죽음이 소설의 한가운데 있고, 그 오빠의 몫을 대신 살겠다는 다짐, 그러나 돌아보니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이제 고독 하나만을 확보한 채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린 날 방바닥에 누워 들었던 ‘바보, 패기’라는 단어를 통해 생생하게 소설을 떠받치잖아요. 오빠가 창호지 문을 등고 서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방 안은 어스름에 잠겨 있는 가운데 어머니와 아이들은 방바닥에 누워 이야기를 듣는다는 구도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신용목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이, 보통 이 정도 연륜이 되면 ‘꼰대’가 되거나, ‘내가 다 알고 있어’라는 태도가 나올 법도 한데 그런 게 전혀 안 보였어요. 젊은 작가들의 작품만 봐도 전지적 시점뿐 아니라 전지적 인식까지도 이미 작품 속에 다 침투시켜놓는 편인데, 그것이 꼭 잘못이라는 건 아니지만, 김채원 작가는 자신의 인식을 소설세계 속에 확정적으로 안착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풀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남다르게 느껴졌어요.

 

권여선 그런 자연스러운 품격이야말로 정홍수씨 말처럼 문학적으로 자기 테두리를 짓지 않고 매번 새롭게 세계를 대면하고 차분하게 언어한테 물어가면서 글을 써왔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글을 쓰다 어느 시기쯤 되면 스스로 일종의 반열에 올라선 듯 자기만의 문학적 시선과 언어를 갖게 되기 쉬워요. 이런 상황은 이렇게 버무리고 저런 대목은 저렇게 표현하겠다는 식의, 세계와 언어에 대한 장악과 압도, 반복과 복제의 포즈가 나오기 마련인데, 김채원은 그런 면이 적은 작가 같아요. 작가의 연륜에 비추어볼 때 대단하죠. 「누가 빨강 파랑 노랑을 두려워하는가」에 보면, 부엌 찬장 유리문에 바깥 풍경이 비치는데 그 쪽진 풍경이 이상하게 이 세상 풍경이 아닌 것 같고, 유리문이 조금 열리면 또 낯선 세상이 비치는데 그게 진짜 세상 같고, 그런 식으로 유리문에 걸린 세상을 담담하게 관조하는 장면이 있는데, 작가는 그걸 응축시키기보다 느슨하게 이완시켜요. 읽으면 짜릿하기보다 느릿한데, 그 때문에 오히려 그 장면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더라고요. 그 느린 속도감까지 각인된 채로요.

 

© 송곳

© 송곳

 

정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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