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이현 鄭梨賢
1972년 서울 출생.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이 있음. deepoem@hanmail.net
천사는 날개를 달고 오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함께 살았다.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벼룩시장’ 신문지를 방바닥에 깐 채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었다. 남우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우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나 죽는다고, 아니면 누군가 죽었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남우가 무거운 몸을 뒤척이자 침대 프레임이 삐걱거렸다. 갑자기 그가 매트리스를 주먹으로 퍽 내리쳤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목격한 남우의 행동 가운데 가장 폭력적인 것이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누가 죽었다고?
아니라고 남우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확실히 그즈음 남우는 미묘하게 변했다. 우리가 같이 살기 시작한 지도 일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같이 살아야겠다는 결정을 내릴 무렵 우리는 서로에게 미쳐 있었다. 남우는 선배와, 나는 전 직장의 동료와 함께 방을 얻어 살았는데 우리는 각자의 룸메이트가 없는 시간을 틈타 서로의 방에 스며들곤 했다. 한번은 남우의 방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으로 허둥지둥 화장실로 숨어야 했고, 사정을 파악한 남우의 룸메이트가 서둘러 돌아나간 뒤에야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침, 내 룸메이트가 결혼하고 남우의 룸메이트가 외국에 가게 되는 시기가 비슷하게 겹치자 우리는 각각 새 동거인을 구하는 대신 서로의 동거인이 되기로 결정했다.
생활비에 관해서는 애당초 원칙을 세웠다. 월세와 공과금은 반분하기로 했고 식료품비와 외식비는 일정액을 똑같이 각출하여 공동명의의 통장에 넣어두고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기본원칙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상황이 속출했다. 이를테면 남우가 데려온 강아지 애니의 병원비 같은 부분이 그랬다. 노견인 애니는 잔병이 많았고 남우는 그때마다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진료를 마친 후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공통의 생활비가 들어 있는 카드로 계산을 했다. 카드 사용내역서를 받아들 때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몇주 전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뒷다리를 절룩이며 걷던 개가 별안간 일어서지 못했다. 수의사는 척추내부에 생긴 악성종양이 신경을 누르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며칠을 못 넘긴다는 설명을 들으며 나는 낯선 불안감을 느꼈다. 남우는 대기실 한구석에 얼굴을 처박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내가 병원 측에 수술비용을 물었다. 이백만원쯤이라 했다. 내 한달 월급보다 많았다. 수술만 하면 살 수 있느냐고 이번엔 남우가 물었다. 남우는 암흑 속에서 한줄기 구원의 빛을 발견한 사람으로 보였다. 열어봐야 알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오십 퍼센트 이상은 희망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수술해도 살리지 못할 확률이 나머지 오십 퍼센트는 된다는 거잖아요? 지금 살아난대도 재발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셔야 하잖아요?
동물병원 대기실에서 이런 반박에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우의 귀에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 공간에서 가장 절박한 사람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리려는 의논은 크게 할 수 있어도, 죽이려는 의논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남우에게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 않느냐고도 했다.
일시적으로 고비를 넘길지는 몰라도 그건 애니의 고통이 연장된다는 의미일 거야.
남우가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내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애니는 나한테 유일한 가족이야. 지금 한 말, 안 들은 걸로 할게.
남우가 이겼다. 애초에 질 수 없는 게임이었다. 남우는 응급수술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애니의 종양은 무사히 제거되었고 애니는 뛸 수 없는 개가 되었다. 회복실 앞에서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남우가 깨어난 애니를 품에 안고 감격을 만끽하는 동안 그가 과연 어떤 신용카드로 결제할 것인지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 속내를 아무에게도 드러낼 수 없다는 데에 짙은 외로움을 느꼈다. 남우가 지갑에서 꺼낸 것은 우리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카드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신용카드로 이백만원을 일시불로 결제했다. 그는 피트니스센터의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남우가 버는 돈은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적을 터였다. 그가 나를 위해 이백만원의 돈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미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멈추었다. 강아지의 목숨과 내 목숨을 동일한 저울에 달아놓고 측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밤 우리는 크게 다퉜다. 표면상의 이유는 남우가 침대에서 내 속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가임기간이라 밝혔음에도 동작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내가 다시 제지하자 남우는 괜찮다고 웅얼거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켰다. 남우가 눈가를 찌푸렸다. 괜찮다고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여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평소 우리는 유니더스 초박형 콘돔을 인터넷최저가로 구매해 사용하고 있었다. 남우는 서랍 속의 콘돔을 꺼내려고도 언쟁을 그만두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우가 말했다.
왜 너는 항상 미리 걱정하지? 문제는 생기기 전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생긴 후에 해결하는 거야.
그 문제가 구내염이 재발하거나 발목 인대가 늘어나는 문제하고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그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그가 모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화가 났다. 꼭 그럴 필요 없었는데도 나는 언성을 높였다.
아니. 내 인생엔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 이 좁은 방에서, 죽어가는 개 옆에서, 애를 키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절대로.
남우가 스탠드의 스위치를 탁 껐다. 침대 발치에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린 애니의 씰루엣이 보였다. 나와 남우는 각자의 어둠 속에서 몸을 뒤치다 잠들었다.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곧 원룸 계약의 만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년치 월세계약을 갱신하는 문제에 대해 남우와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다. 남우도 나에게 묻지 않았다. 이제 나는 우리 사이에 남은 것은 헤어짐뿐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헤어짐이 동거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연인관계의 근본적인 종결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남우의 말대로 미리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미지야.
내가 발톱의 매니큐어를 말리는 동안 등을 돌리고 누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남우가, 불쑥 이름을 불렀다.
얼마 정도가 있으면 평생 살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남우는 잠자코 있다가 이내 급한 일이 있다며 나가버렸다. 매주 일요일은 우리가 함께 쉬는 유일한 날이었다. 지금껏 나와 남우는 모든 일요일을 함께 보내왔다. 나는 월요일이 되면 부동산에 가야겠다고, 현재의 월세 보증금 절반으로 방을 구할 수 있는 동네를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드물게 햇살이 좋은 오후였다. 이불 빨래라도 할 요량으로 붙박이장의 문을 열었다. 이불더미 옆에 처음 보는 검은색 트렁크가 놓여 있었다.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기내 반입용 사이즈의 가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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