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세월호 이후, 다시 생각하는 한국문학

 

3·11 이후 일본문학과 ‘이후’의 상상력

 

 

남상욱 南相旭

인천대 일문과 교수. 공저로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일본, 상실의 시대를 넘어서』 등이 있음.  indimina@incheon.ac.kr

 

 

미래의 문이 닫히는 순간

우리의 지식이 완전히 죽는다는 것을

이제 당신은 이해하겠지!

단떼 『신곡: 지옥편』 중에서1)

 

1. 들어가며: 붕괴된 서고로부터의 출발

 

2011311일 오후 24618초에 태평양에서 발생한 매그니튜드 9도의 지진은 최고 40미터가 넘는 쯔나미를 일으켜 일본 동북해안 일대를 덮쳤다. 그 여파로 약 2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뿐 아니라, 후꾸시마(福島)1원전 원자로 총 6기 중 3기가 노심용융(爐心鎔融)에 빠져 수소폭발을 일으켜 천문학적인 수치의 방사성물질이 외부로 확산되었고 약 16만명의 지역주민이 고향을 떠나 지금도 피난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비슷한 시각 토오꾜오에서 쉰살이 된 장애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던 일흔여섯 노작가의 서고에서는 책과 자료, 오래된 원고 들이 쏟아져 내렸다. 여진이 계속되어 불안해하는 쉰살의 아들이 누울 곳만을 겨우 마련해준 후 줄곧 TV 앞에 앉아 쯔나미와 원자력발전소 사고 영상을 지켜보던 그는, 사고로 유출된 방사성물질에 의한 오염의 실상을 취재하던 프로그램을 보고는 마침내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만다.

키우고 있는 말의 출산이 임박해 피난권고 명령을 무시하고 위험지역에 남은 농장주는 정작 망아지가 태어나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다. 말이 뛰어놀고 풀을 뜯을 초원이 방사능 비에 오염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한 생명의 탄생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게 된 그 농장주의 어두운 표정을 본 작가는, 그 초원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물론 그보다 훨씬 오래도록 원래대로 될 수 없으며, 나아가 ‘그것을 우리의 동시대 인간은 저질러버렸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그만 울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참담함 속에서 무너진 서고 앞에 멍하니 있던 그는 단떼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문구를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그러니까 “미래의 문이 닫히는 순간/우리의 지식이 완전히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노벨상 수상작가인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郎)의 사실상 마지막 작품인 『만년양식집』(晩年様式集, 2013)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4장에서 하겠지만에서 그는 후꾸시마의 충격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전후 일본에서 원자력발전소는 ‘원자폭탄’이라는 대량학살병기의 기술을 평화적으로 사용한다는 명목하에 도입되어 일종의 ‘미래의 문’으로서 기능해왔다. 이러한 ‘미래의 문’이 폭발을 일으켰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과학이라는 지식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밝혀진 바 있듯이 과학은 여러차례 원자력의 위험성을 경고해오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후꾸시마 원자력 폭발은, 과학의 잠재적 위험성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미래’만을 보도록 강제하는 어떤 ‘지식’의 임계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맹목성을 과연 ‘지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그러한 맹목성을 허용해온 어떤 다른 ‘지()’를 일컫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만년의 오오에가 후꾸시마 사고로부터 ‘지식의 죽음’이라는 충격을 받았을 때, 여기서 ‘지식’이란 그가 그토록 옹호하고 신뢰했던 ‘전후민주주의’까지 포함하는 ‘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3·11 이후 스스로를 지탱해온 ‘지’의 죽음을 간파한 것은 사실 오오에가 처음은 아니다. 예컨대 젊은 사상가 사사끼 아따루(木中)3·11 직후 열린 한 강연에서 서구의 철학에서 ‘대지’(大地, 독일어로는 Grund, 영어로는 ground)가 ‘근거이자 이유이며 이성을 움직이는 무엇’이자, ‘법의 근거’이기도 함을 환기시킨 바 있다.2) 이는 3·11에 의한 대지의 흔들림이, 국가의 법을 지탱하는 ‘지’의 흔들림이기도 하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는 사고 이후 일본정부 대변인과 토오꾜오전력이 반복해왔던 ‘상정 외(想定外)의 대사건’이라는 말 속의 그 ‘상정’에는 어떤 근거도 없었음을 상식적인 문헌검색을 통해 지적하고 있고, 오오에 역시 『만년양식집』에서 정부와 토오꾜오전력의 ‘상정 외’라는 말에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상정 외’의 현실과 맞서려”는 의지는커녕, 포기의 알리바이만 보일 뿐이라고 비판한다.3) 그러니까 두 사람은 모두 원자력발전소의 폭발위험을 ‘상정’하지 않으려 하는 ‘지식’에 기대 있는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정부는, 시민과 지역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꾸시마 원전사고를 일종의 ‘예외’로 간주하며 원자력발전소를 재가동했고, 나아가 ‘지’의 흔들림을 틈타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허용하도록 법안을 바꾸려 하고 있다.

‘지’의 흔들림은 반드시 3·11 이후의 일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잔잔했던 바다에 학생들을 가득 태우고 가던 배가 갑자기 침몰해 304명의 사람들(이 중 단원고 학생은 250명)이 죽거나 실종되었을 때, 죽은 것은 배에 탔던 어른과 아이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아이들의 ‘미래의 문’이 닫힌 그 순간, 실은 ‘우리의 지식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이제 우리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왜 그 배가 그렇게 침몰했고, 왜 구하지 못했으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며, 죽은 아이들에게, 남은 유족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지, 여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러가지 의미에서 매우 다를 수밖에 없는 세월호와 후꾸시마가 비록 하나의 가느다란 선으로라도 연결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양자가 각각 어제까지의 ‘지’의 임계점을 노출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바꿔 말해 세월호 이후의 한국문학에서 3·11 이후의 일본문학이 하나의 참조점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붕괴된 서고’로 상징되는 바로 ‘우리의 지’에 대한 절망을 공유함으로써만 가능할 수 있겠다.

 

 

2. ‘방사능’이라는 새로운 ‘현실’의 출현

 

그렇다면 붕괴된 서고 속의 일본문학은 어떻게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