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시대 전환의 징후를 읽는다
거울 앞에서
분단체제와 북한의 변화
김연철 金鍊鐵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통일부장관 정책보좌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역임. 주요 저서로 『북한의 산업화와 경제정책』 『냉전의 추억』 등이 있음. dootakim@hanmail.net
1. 두개의 코리아, 역전의 데자뷰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정은(金正恩)체제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보수정부의 정보 무능과 언론의 책임감 결여, 북한에 대한 편견이 어우러지면서 정보와 첩보가 뒤섞이고 실상과 희망을 구분하기 어렵다. 검증되지 않은 소문들이 실어 나르는 것은 바로 ‘북한붕괴론’이다.
그러나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할 뿐이다. 만약 북한정치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하더라도 남한이 개입할 근거는 없으며 실제로 개입하기도 어렵다. 북한이 붕괴하면 통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근거도 없고 현실적 가능성도 없다. 예측은 ‘희망적 사고’와 다르다. 현미경이 아니라, 망원경으로 북한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나의 국가는 하루아침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쌓은 중층의 구조를 이해해야 하고, 좀더 장기적인 시각에서 북한체제를 전망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분단국가다. 두개의 코리아는 서로 부정하며 대립하고 경쟁했고, 때로는 대화하고 협력하며 포용했다. 북한체제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단이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분단체제라는 시각으로 보면, 두개의 코리아는 닮아 있다. 시차가 있지만 상대의 태도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남북관계에서 인도주의라 하면 남한이 주고 북한이 받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인도적 지원은 북한이 주고 남한이 받았다. 1984년 9월 서울과 경기 지역에 많은 비가 내려 수재민이 발생했다. 9월 8일 북한의 적십자회는 쌀과 시멘트, 의약품을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1950년대부터 북한은 남한에 수해가 나고 가뭄이 들고 재난이 발생할 때 언제나 인도지원을 제안했다. 남한은 당연히 거부했다. 냉전시대는 상대편이 받을 수 없는 혹은 상대편을 고려하지 않는 ‘제안경쟁’의 시대였다.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는 1970년대 초반에 이미 역전되었지만, 제안의 관성은 1984년까지 지속되었다. 전두환(全斗煥)정부가 북한의 상투적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제안경쟁’은 끝났다. 1983년 아웅산 사태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정부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북한의 제안을 덜컥 받았다. 1983년 기준으로 쌀 생산량은 남한(540만톤)이 북한(212만톤)보다 2.5배 많았고, 시멘트 생산량도 남한이 북한보다 2.7배 많았다.1)
인도지원의 핵심 쟁점인 분배의 투명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남한의 대북 인도적 지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분배의 투명성 문제는 남한 내부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을 둘러싼 갈등의 핵심이었다. 군대에 전용될 가능성을 주장하며 ‘퍼주기’ 프레임을 덮어씌울 때도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분배의 투명성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1984년 북한 수해물자 인도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을 때, 북한은 직접 수해지역을 방문하여 물자를 수재민에게 전달하겠다고 주장했다. 분배현장에 접근할 권한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대한적십자 측은 “받는 쪽이 물자인도 장소를 지정하는 적십자 관례”를 들어 강력히 반대했다. 국내 언론들도 ‘북한의 저의’를 규탄했다. 경제력이 역전되었다고 과거의 기억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때로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2005년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한은 200만kW의 전력제공을 북한에 제안한 적이 있다. 북한이 영변의 5MW 원자로를 폐기하는 대신, 대체에너지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이었다. 다만 방식은 남한에서의 직접 송전이었다. 남한은 몸에 피가 돌듯이 전기가 통하면 통합이 가까워질 것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상호의존이 적대의 자리를 대체할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은 거부했다. 상호의존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과거의 기억 때문이다.
1948년 5월 14일 정오에 북한은 남쪽으로의 송전을 중단했다. 해방 직전 한반도의 전력설비 및 발전량은 90% 이상이 북부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일본은 이렇듯 풍부한 전력공급원이 존재했던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역을 중화학공업지대로 육성했다. 1940년대 초반 한반도 북부 지역은 동아시아 최대 수준의 발전설비를 보유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 해방 직후 남한 지역의 발전량은 미미했다. 한반도 남부는 1948년 4월까지 평균전력의 66%를 북한의 송전에 의존했다.
북쪽에서 전기를 끊자 어떻게 되었을까? 남쪽의 공장 가동률이 30% 아래로 떨어졌고 가정용 전력 사용이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수돗물 이용도 곤란해졌다. 전기세가 대폭 올랐지만 그래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남한의 전력수급은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나아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