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기획 | 표절 문제와 문학권력
문학의 법정과 비판의 윤리
신경숙을 위한 변론
윤지관 尹志寬
문학평론가. 저서로 『민족현실과 문학비평』 『놋쇠하늘 아래서』 『세계문학을 향하여』 등이 있음. jkyoon@duksung.ac.kr
* 이 글은 필자가 7월 23일 한국작가회의 홈페이지(http://www.hanjak.or.kr) 게시판에 여론재판으로 표절작가라는 부당한 낙인이 찍힌 작가 신경숙에 대한 변호의 뜻을 회원들에게 알리고, 이후 8월 3일까지 아홉차례에 걸쳐 올린 ‘변론’을 모은 것이다. ‘변론’은 주제별로 시일을 두고 올렸으며, 의미있는 반론이나 질문이 있으면 다음 ‘변론’에 반영하겠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연재하는 동안 별다른 반론 없이 글이 마무리되었기에, 군데군데 교정 차원의 손질 외에는 그대로 싣는다.
1. 변론을 시작하며
한겨레 문학전문기자 최재봉(崔在鳳)씨의 표현 그대로 한 동세대 작가가 신경숙(申京淑)을 표절혐의로 ‘고발’한 이후 그야말로 “폭풍 같은 한달”이 지났다. 최기자는 한겨레 7월 16일자 기사 「표절과 문학권력을 넘어서」에서 이 사태를 정리하는 가운데 “신경숙의 표절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대가 이루어”졌고, 이제 “표절을 방지하고 찾아내며 처벌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서부터 ‘문학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과제로 남았다고 썼다. 어느정도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고, 언론이라면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 일차적인 책무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리가 크게 빠뜨리고 있는 것이 있다. 이 폭풍이 여론재판이라는 ‘광풍’의 성격을 띠었고 여기에 언론이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응준(李應準)씨의 고발이 있자마자 언론들의 선정적인 보도가 시작되고, 진작부터 문학을 권력투쟁의 장으로 보던 평단 일각의 비난공세가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면서 순식간에 신경숙은 ‘상습적인’ 표절작가로 전락하고 주요 문학출판사들은 ‘돈만 밝히는’ 부도덕한 권력집단으로 매도되었다. 거의 마녀사냥에 흡사한 국면이 펼쳐져서 다른 의견을 내놓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갖은 험담과 욕설이 난무하고 언론들은 이 흐름에 편승하여 논란을 부추기고 다른 목소리는 아예 차단하기도 했다.
문학에 대한 평가는 이런 식의 여론재판으로 결판날 일이 결코 아니다. 문학에서의 표절 문제도 창작행위를 이해하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문학담론 차원에서 논의될 일이지 ‘묻지마 식’ 여론상의 다수결로 결정하고 단죄해버릴 일이 아니다. 다산포럼(http://www.edasan.org, 7월 14일자)에서 내가 「문학에서 표절이란 무엇인가: 신경숙 사태를 보는 한 시각」을 쓴 것은 작가에 대한 일방적인 단죄가 도를 넘었고 이것이 비단 당사자만이 아니라 문학의 남아 있는 영역조차 근본에서부터 허물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문학의 문제가 문학 나름의 논리에 따라서 정리될 기회도 없이 여론재판부터 시작되고 법적 대응이 운위되는 것 자체가 한 작가의 표절 혐의와는 비교가 안되는 문학에 대한 최악의 추문이다.
이 광풍을 거치는 동안에 신경숙은 혐의에 비해 그야말로 과도한 징벌을 받았고 그와 함께 우리 사회에서 문학의 위상도 그나마 가지고 있던 품격을 내던지고 여론이란 것의 먹잇감이 되는 치욕을 견뎌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 언론은 선정성을 한 특성으로 한다. 세계적인 명성까지 획득한 한국의 대표작가가 부도덕한 표절행위를 한 것이 발각되었고 그것이 내부고발에 의해서라니 언론이 그렇게 흥분한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한편 언론은 다른 의견에 대해서도 귀를 열고 현상을 보는 여러 시각들을 소개하면서 공정을 기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거의 모든 언론이 이 책임을 방기하였다.
물론 폭풍이든 광풍이든 잦아지는 순간이 오고, 아무리 할 말이 있더라도 “소나기는 피하고 봐야 한다”는 속담도 있다시피 침묵을 지키는 것이 상책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최기자의 말대로 표절방지 대책을 세우고 문학권력을 해체하고 하는 것이 평단의 책무일 수도 있지만, 그 근거 자체가 과도한 여론재판의 결과라면 우선 사실여부부터 점검하는 것이 순서다. 신경숙이 과연 표절작가라고 단정되어도 좋은 것인지? 그것도 상습적인 표절을 해왔다고 단죄되어도 좋은 것인지? 달리 보는 시각도 엄연히 있는데 최기자뿐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판정을 당연시하면서 문단의 책무 운운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방적 정리일 뿐이다. 그러니 한번 짚어보자는 것이다. 사실을 확인하고 되짚어보는 것, 그것이 이 광풍이 휩쓸고 간 초토(焦土)를 정리하는 첫걸음이 되겠기 때문이다. 내가 신경숙을 위한 변론에 솔선 나서기로 한 것은, 한 여론재판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는 뜻도 있지만, 만신창이가 된 한국문학을 추스르는 최소한의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는 비평가로서의 책임의식도 작용하였다. 변론을 의뢰한 적도 없는 작가에게는 양해를 부탁드린다.
문학을 두고 하는 논의와 평가, 즉 문학의 법정은 현실의 법정과는 다르고 대중의 여론과도 무관하다. 또 판정을 위한 시간 또한 장기간을 요구한다. 당대에 비난받고 폄하되던 작가나 작품이 후세에 높이 평가되는 사례는 문학에서 비일비재하다. 문학을 평가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판정은 긴 대화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문학의 법정에서 하는 변론도 그런 대화의 시작이고 궁극적인 판정을 위한 한 입장의 표명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승산이 있는 변론일지 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최기자도 정리한 것처럼 이미 일심판결이 압도적으로 나 있는 상황이고, 그 근거도 없지 않다. 우선 누가 보아도 분명해 보이는 증거를 제시한 최초고발자가 있고, 그것을 확증해주는 목청 큰 논자들이 즐비하며, 소위 누리꾼이라는 이름의 대중이 시퍼런 눈을 뜨고 이들의 뒤에 버티고 있다. 급기야 문단의 거목이라고 할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趙廷來)씨까지 나서서 표절사실을 당연시하면서 아예 절필하라고 일갈했다. 이 막강한 고발자들의 위세 앞에서 누가 감히 승산을 말하겠는가? 아마도 내가 이 일을 맡겠다고 누구에게 의논이라도 했다면 친구들은 손을 홰홰 저으면서 말릴 법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그렇지만 위안도 없지 않고 나름대로 운산도 없지 않다. 설혹 대세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무엇보다 평론가로서 소신을 지켜나간 데서 오는 충족감이 그 선물일 것이다. 승산이 아주 없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사태 이후 작가의 표절 혐의 부분들을 모두 검토해보았지만 「전설」에 대한 이응준의 고발을 근거로 신경숙을 표절작가로 몰기에는 무리가 많고, 또 상습범의 증거로 내세우는 다른 작품들의 표절 의혹도 근거가 부실하거나 최소한 논의의 여지가 있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유리하게 여겨지는 것은, 여론재판에 참여한 거의 절대다수의 대중은 고발대상인 작가의 「전설」을 읽지도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고 더구나 미시마의 「우국」을 읽은 사람은 더 드물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문제를 제기한 평론가들이나 조정래씨야 설마 그렇지 않겠지만, 그동안 표절 의혹이 제기되었던 다른 작품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에 대해 더 잘 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다음에야, 그렇게 남의 말만 듣고 단죄에 가담하다보면 군중심리에 휩쓸리기 십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두고두고 께름칙한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여론상 불리한 상황에 있는 변호사로서 나는 충분한 자료를 접하지 못하는 일반 대중이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을 만한 자료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한다. 문학의 법정은 설혹 여론이 바뀐다고 해서 승소했다 할 수 없겠지만, 일단 이들이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나의 임무 가운데 하나일 법하다. 만약 단죄부터 하던 대중이 “아,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게 볼 일이 아니고 여러가지 따져볼 일이네”라고 느끼기만 해도 나의 변론은 소기의 성과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응준의 고발장 검토에서부터 시작해보겠다.
2. 이응준의 고발장에 대한 검토
신경숙과 동세대 작가인 이응준은 인터넷매체인 『허핑턴포스트코리아』 6월 16일자에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이 글에서 그는 20년 전 발표된 신경숙의 단편소설 「전설」의 일부 문장이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의 「우국」의 표절임을 폭로하면서 그런 행위를 “문학적 야만”이라고 극렬하게 비난하고 이 표절 사실에 대해 한국문단은 “‘뻔뻔한 시치미’와 ‘작당하는 은폐’”를 자행하여 결국 “한국문학의 참담한 타락을 가져”왔다고 질타한다. 그리고 한국문학을 대표해온 작가의 표절 폭로와 썩어빠진 한국문단에 대한 이 비난은 한 용기있는 문인의 내부고발로 칭송되면서 곧바로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가 불과 일주일 만에 작가는 상습적인 표절작가로 단죄되고, 상업주의에 물들어 타락한 한국문단을 뒤엎고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줄을 잇는다. 고발자의 의도는 아마도 100% 이상 충족되었고 이 고발을 ‘법적 검토’까지 거쳐서 게재한 『허핑턴포스트코리아』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응준의 고발이 저절로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한 탓에 그 고발의 문제점은 더 악화되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의 글은 고발대상인 작가를 문학 내부의 논의가 아니라 외부, 바로 여론재판에 회부할 목적으로 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신경숙을 도덕적 타락자로 매도하여 비난여론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너무나 역력하다. 글이야 어떻게 쓰든 쓰는 이의 자유겠지만 표절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문학적 논의의 차원을 건너뛴 채 여론재판으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문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이 글이 여론을 겨냥한 선동인지 짚어보겠다.
이응준은 서두에서 거두절미하고 신경숙의 표절 혐의가 가장 확실해 보이는 문단을 제시한다.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로 시작하는 「우국」의 문단을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로 시작하는 「전설」의 문단과 병치시킨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과 같이 글을 시작한다.
자, 이제 눈을 감고, 내가 말하는 장면을 각자의 머릿속에 그려보자. 대한민국 최고의 유명, 유력 소설가 신경숙은 문단의 까마득한 선배인 김후란 시인이 번역한 일본의 대표작가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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