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미국 기원 ‘정착형 식민주의’
과거와 현재
마흐무드 맘다니 Mahmood Mamdani
우간다 마케레레(Makerere) 대학 마케레레 사회조사연구소 소장, 미국 컬럼비아 허버트 레먼 정부학 석좌교수. 최근 저서로 『구원자와 생존자: 다푸르, 정치, 대테러전쟁』 『착한 무슬림, 나쁜 무슬림: 미국과 냉전 그리고 테러의 기원』 등이 있음.
* 이 글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열린 에드워드 사이드 강연(2012.12.6)의 원고를 수정한 것으로, 시카고대 출판부가 발행하는 Critical Inquiry(www.criticalinquiry.uchicago.edu) 2015년 봄호에 게재되었다. 원제는 “Settler Colonialism: Then and Now”이며, 필자는 원문에서 논평을 해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토머즈 마츠낵(Tomaz Mastnak)에게 감사를 표했다. Ⓒ Mahmood Mamdani / 한국어판 Ⓒ 창비 2015
정착형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아프리카와 미국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두 전형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정착형 식민주의가 패퇴한 반면 미국에서 이 유형의 식민주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글의 관심사는 미국의 형성에 관한 미국의 담론을 검토하는 것인데, 나는 이 작업을 아프리카적 시각에서 수행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신세계에 당도한 유럽인들은 그 세계가 유럽과 어떻게 다른지 해명하고자 골몰했다.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미국예외주의로 통칭되는 일군의 저작이 산출되었다. 이 연구전통에서 기준으로 통용되는 텍스트는 19세기 중반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내놓은 미국에 대한 성찰이다. 그 이래로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는 정치이론이나 미국정치를 가르치는 대부분의 교육과정에서 줄곧 필독서였다. 토크빌이 그 책에서 제출한 주장 중에는 미국을 유럽과 구분짓는 핵심적인 면모가 봉건제의 부재라는 것도 있었다. 미국은 물려받은 봉건적 전통에 구애받지 않았기에 댓가를 치르지 않고서도 혁명적 변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내 관심사는 토크빌보다는 토크빌주의자들이 그를 이해한 방식에 있다.
토크빌 이래로 중요한 부류의 미국 사상가들은 유럽이라는 거울에 비친 미국의 자서전을 써왔다. 하나의 유럽중심적인 시각이 미국 정치이론의 주요 윤곽의 형태를 결정해왔다. 미국의 자서전은 정착민의 자서전으로 씌어진 것이다. 거기에 원주민의 자리는 없다. 공식적으로 그들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서 워싱턴D.C.에 세워진 박물관의 명칭은 미국원주민박물관이 아니라 미국인디언박물관이다. 대부분의 미국 원주민 부족은 스스로를 원주민이 아니라 인디언이라고 칭한다. 이처럼 자신이 미국 원주민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는 태도는, 그들이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미국에 속하지 않는다고 마음 깊이 느끼는 데서 비롯된다.
정착민의 자서전 쓰기는 유럽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시작되었다. 다음은 루이스 하츠(Louis Hartz)가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The Liberal Tradition in America)에서 그 자극에 대해 밝힌 내용이다. “토크빌이 미국인이 누린 ‘가장 큰 이점’이 ‘민주주의 혁명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는 데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미국의 삶에 대한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통찰 중 하나를 내놓았음에 틀림없다.”1) 봉건주의가 부재했던 탓에 혁명도 강력한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런 연관된 역사적 유산이 미국에 만연한 개인주의를 해명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츠는 제퍼슨(T. Jefferson, 대통령 재임 1801~1809) 시대와 잭슨(A. Jackson, 재임 1829~37) 시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유럽의 귀족, 농민,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하지 않으며 막 형성 중인 공장 노동자를 비롯해서 사실상 모든 이가 독립적인 사업가의 태도를 지닌 이 나라에서는 두가지 국민적 충동, 즉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향한 충동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LT 89면) 하츠에게 “전체 미국적 딜레마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사회혁명 경험의 부재”는 미국인이 “유럽의 ‘사회문제’”나 “아시아의 더욱 심원한 사회적 투쟁”을 “이해하는 것”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었다(LT 306면). 하츠가 볼 때 봉건주의를 거치지 않은 사회는 “진정한 혁명전통”도 “반동의 전통”도 모두 결여할 수밖에 없었다(LT 5면). 유럽과 달리 미국은 평등을 위해 투쟁할 필요 없이 그저 평등을 “상속받았다.”(LT 66면)
하츠는 이런 평등의 상속이 미국적 경험의 어두운 이면인 숨막히는 합의의 전통을 해명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윌리엄 애쉴리(William Ashley)를 인용하여 봉건제의 부재는 “봉건제를 해체할 강력한 중앙 권력기구가 불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LT 43면). 이렇듯 극복대상과 대의의 부재야말로 “우리의 정치적 사유의 빈곤”을 해명해준다(LT 141면). 미국의 문제는 실은 “미국인이 너무나도 고뇌했던 다수결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만장일치의 문제”였고, 이런 사정이 “왜 미국이 평화의 시기 동안 정치의 영역에서 단 하나의 위대한 철학전통도 내놓지 못했는지”를 설명해준다(LT 141, 176면).
미국이 평등을 “상속받았다”는 주장은 노예제의 역사에 친숙하거나 미국을 백인의 미국과 동일시하지 않는 어떤 이에게도 공허하게 들린다. 남부의 노예농장을 연구하면서 노예제와 봉건제 간의 연관관계를 탐구한 학자들 역시 미국이 뱀이 허물을 벗듯 봉건제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2)
하츠가 공간적으로 분리된 유럽의 파편으로서의 미국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는 유럽의 비이민자 사회와 미국의 이민자 경험을 대조시키면서 이민이 문화와 영토 간의 근본적 단절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그런 단절을 불가피하게 만든 방식을 탐구했다. 다음은 왈저가 유럽과 미국의 차이를 이해한 방식이다. “고래로부터 자리잡은 다수세력이” 존재하는 유럽사회에서 “정치는 다수세력의 문화와 역사에 의거할 수밖에 없기에” “국가는 미국식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오히려 “다수세력을 이루는 민족이 있으면 항상 강력한 국가가 출현한다.”3) 그러나 구세계가 “확실한 다수세력(들)”이 존재하는 정치체제들로 구성된다는 가정은 인종청소의 사례들과 국가 형성기에 조직화된 폭력이 담당한 역할을 기록하고 있는 역사연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데,4) 미국에는 그런 다수세력이 구축된 적이 없다는 가정 또한 마찬가지다.
왈저는 미국이 정착민, 노예, 그리고 원주민 대신 다수의 유럽 이민자로 구성된 중립적인 국가라고 상상하고, 이런 미국의 다원주의가 제국이 아니라 이민자 사회의 표지라고 말한다. 왈저가 보기에 이런 다원주의는 미국, 캐나다, 이스라엘 같은 이민자 사회를 유럽국가들 같은 비이민자 사회와 구분한다.5) 유럽에서 국가 간 차이는 영토에 근거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그런 근거가 부재한다. 왈저에게 유럽은 “종족적”인 반면 미국은 “다문화적”이다(W 15면). 유럽의 종족주의가 영토와 민족성을 결부시키며 정치적인 성격을 띠었다면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영토와 민족성 간의 분리에 기반함으로써 문화적 속성을 띠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왈저가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미국 원주민 종족들에 대한 정복과 대량학살에 의해 마련된 토양에서 꽃피웠다는 그 역사를 인정한다면 분리에 대한 그의 주장은 훨씬 더 이해될 만할 것이다. 그런 한줌의 역사적 정직성만으로도 미국, 캐나다, 이스라엘을 막론하고 이민자 사회가 실은 정착민 사회라는 사실이 명확해질 것이다.
자발적 이민자와 비자발적 비이민자의 차이는 단지 미국인과 유럽인의 차이만은 아니고 미국 내부집단 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포착한다. 왈저 역시 그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물론 인디언 부족들과 멕시코인들처럼 미국의 팽창을 가로막았다가 정복당하거나 합병당한 이들이 존재하며” 또 “강제로 옮겨온 집단들도 있는바 흑인들은 이 나라에 노예로 끌려와서 계속해서 가혹한 억압에 시달렸다.”(W 57면) 그러나 왈저는 그런 식민주의의 문제를 역사적 유물로 간주했다. “미국의 원주민과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같은 토착민들의” 권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마모되었다.”6) 왈저에 따르면 이렇듯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권리가 지워지고 역사적 기억이 흐려지는 것은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해당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대 이스라엘 민족만은 예외다. 그는 그런 이스라엘 예외주의에 대해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한편 두 민족의 미래 문제가 제기될 때면 왈저는 이스라엘 내 “아랍인 부락과 도시에 어떤 종류의 지역적 자치”를 부여할 것을 권하면서도 미국 인디언들의 자치는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치가 허용되더라도 그들의 삶의 방식이 자유주의적인 테두리 내에서 유지될 수 있을지가 전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역사적으로 볼 때 자유주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7) 왈저는 (강요나 강제에 의한 집단에의 가입, 그리고 게토나 보호구역 같은 특정구역에 묶인 존재방식 같은) 정복이나 극단적 강제를 통해 소수집단에 강요된 속성들을 바로 그들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권리주장을 (종족적인) 구세계에 속하거나 (시간이 흐르면서 권리가 마모되었기에)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
왈저는 인종과 정복의 역사를 자연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이 신생국가의 경계는 여타 국가의 경계와 마찬가지로 전쟁과 외교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이민은 (…) 그 영토에 거주하는 이들의 성격을 결정했다.” 이런 논의과정에서 그는 두가지 두드러지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했다. 첫째는 정복이 미국의 경계뿐 아니라 몸통 자체를 결정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미국인이 이 몸통의 형성에 참여하거나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왈저는 미국의 다원주의가 다수 인종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소수 인종들이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사회적으로 비가시적”이었음에도 미국 다원주의의 “형태”는 “그들의 존재나 그들에 대한 억압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소속집단에 배정되는) 구세계의 합의주의(corporatism)와 (소속집단을 스스로 결정하는) 미국의 자발주의(voluntarism)를 대비시키는 왈저의 입장은 백인이 아닌 인종집단들에는 해당되지 않고, 다수세력인 유럽 출신의 (백인) 정착민으로 구성된 종족집단들에만 유효하다(W 57~58면).
미국예외주의에 관한 글들을 얘기할 때 왈저가 자유주의적 우파에 속한다면 쎄이모어 마틴 립셋(Seymour Martin Lipset)은 학계의 자유주의적 좌파의 일원이다. 산업화된 국가들 가운데 왜 미국에서만 비중있는 사회주의운동이나 노동당이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단일한 문제에 몰두했던 립셋 역시 토크빌에 의지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비중있던 일군의 좌파 지식인들이 동일한 질문을 제기해왔던 것을 알고 있었다. 예컨대 독일의 사회주의자인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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