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신예소설가특선

 

양선형

1990년 광주 출생. 2014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tolevinas@naver.com

 

 

 

수은의 시도

 

 

관념은 조금 빈 잔이고 모서리가 있다.1)

 

그는 간다. 대개의 환영은 피로 때문이다. 세계란 자아의 암실이다. 암실을 향한 환영 폭파다. 그는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환영을 내버려둔다. 이윽고 그것을 어기적거리듯 쫓아간다. 여하간 그는 오랫동안 걸었다. 눈 속을, 눈에 파묻힌 벌판을, 은막에 휩싸인 지붕 위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양쪽 무릎이 눈밭 아래로 푹푹 빠져든다. 눈이 햇빛을 튕겨낸다. 빛은 날카롭다. 쉬이 아물지 않는 빛이다. 지칠 때면 멈춰서 눈을 파헤친다. 이유도 없이 그렇게 한다. 깡마른 억새들이 손아귀로 줄줄이 딸려온다. 날씨는 쾌청하다. 어젯밤 내린 폭설이 무색할 정도다. 그는 자신이 어느 지대를 통과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유리컵 안에 몇개의 얼음덩어리가 있다. 그는 상상한다. 컵이 놓여 있는 장소는 침대 옆의 나이트테이블이다. 유리컵의 오른쪽 측면으로 간이 스탠드가 비치되어 있다. 조명을 받은 유리컵이 둥글게 번쩍거린다. 얼음은 환하고 투명하다. 내부로 자잘한 균열이 비친다. 기포들이 있다. 물과 함께 그대로 응결된 기포들이다. 얼음이 사라지기 전에 그녀가 온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다. 조바심이 나는 것이다. 빠득빠득 얼음을 씹고 있으면 마치 부러진 이빨을 씹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다. 실내는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 간혹 취한 자들의 음성이 창문에 쳐진 린넨 커튼을 천천히 흔들어댈 따름이다.

곧 그는 눈 속에 매장되어 있는 한채의 컨테이너를 발굴하게 된다. 과정은 이러하다. 그는 눈으로 이루어진 언덕을 본다. 손을 뻗는다. 눈을 쥔다. 입에 넣는다. 갈증이 가신다. 그는 이러한 행동을 수차례 되풀이한다. 눈 속에서 그가 처음 발견한 것은 비죽 튀어나온 컨테이너의 문고리다. 그는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컨테이너 상단에 쌓인 눈뭉치가 우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올려다본다. 문은 잠겨 있지 않다. 그는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선다. 처음에 그곳은 어둡다. 그는 열린 문 앞에 서서 제 눈이 침침한 어둠에 길들여지길 기다리고 있다. 컨테이너 안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는 마치 가래를 삼킬 때 나는 꼴깍거리는 소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는 걸음을 옮긴다. 컨테이너 안에 누군가 있고, 그는 아직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

 

그는 차량사고를 겪었다. 그는 그 사고가 어젯밤의 기억인지, 좀더 이전에 벌어졌는지, 아니면 불과 몇시간 전의 일이었는지 좀처럼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사고가 있었다. 그것은 홀연한 기억이었다. 사실 최초로 떠오르는 기억이란 눈발을 거스르며 삐걱삐걱 움직이던 와이퍼의 모습이다. 이때 그는 핸들에 손을 얹은 채 구불거리는 도로를 넘어가고 있었다. 고산지로 이어진 국도였다. 와이퍼가 눈에 덮인 차창을 긁어대고 있었다. 더디고 안쓰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는 눈발 사이로 불쑥 삐져나온 경고 표지판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스팔트를 점령한 폭설은 마침내 제 내부를 주파하려는 모든 의지를 묵살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와이퍼가 우두커니 멈췄다. 눈발이 중복되고 있었다. 그는 브레이크를 밟고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코를 골고 있었다. 미약하고 가느다란 음향이었다. 그녀는 잠만 잤다. 출발할 당시부터. 좀처럼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에 슬쩍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허벅지가 축축했다. 긴 머리칼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전방을 응시했다. 차는 눈 속에 고립된 담뱃갑이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그는 눈발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눈발이 시야의 여남은 간격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뜬금없이 그는 조난당한 처지였던 것이다.

코골이 사이로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데 분명치는 않은 말이었다. 귓바퀴에 걸리지 않는 말, 주르르 미끄러지는 말, 예컨대 그것은 말이 아니라 말들의 잇새에서 사그라지는 거품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가로 얼굴을 가져다댔다. 말들을 해독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그는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그대로 두고 싶었다. 그는 폭설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눈에 파묻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금의 처지를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오래도록 잠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이 그칠 때까지 잠의 세계에서 되돌아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또한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무언가를 속삭이고, 그녀와 입을 맞대고, 그녀가 하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그것은 이상한 욕망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꿈속의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혼미한 꿈속을 떠다니는 그녀의 익사체와 말이다.

곧 그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차량을 출발시켰다. 눈발이 허공을 나뒹굴고 있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자 차량이 굉음을 냈다. 그는 백미러를 쳐다봤다. 눈 사이로 수렁처럼 아스팔트가 고여 있었다. 눈발이 낙서처럼 이지러졌다. 비좁은 시야가 망원경을 들이대듯 확대되어 보였다. 그는 핸들을 내팽개쳤다. 가드레일이었다. 충돌한 차량이 쨍한 소리를 냈다. 엔진이 팽창하고 있었다. 바퀴가 공회전을 했고, 차량이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했다. 그는 사고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것이다. 반경에 포함된 눈발이 순식간에 연소되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에 그는 깨어진 파편이 그녀의 얼굴 위로 무수히 박혀드는 광경을 보았다. 앞쪽 유리가 잘게 부서져 있었다. 유리가 눈발에 반향하며 예리하게 반짝거렸다. 그녀가 부서진 유리창에 얼굴을 짓이기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

 

그는 주저하듯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선다. 눈은 재빨리 녹아버린다. 그는 쭈뼛거린다. 불안하게 발을 구른다. 꾸벅 인사를 한다. 안쪽을 향해 말이다. 내부는 캄캄하게 닫혀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텅텅 소리를 내는 컨테이너 바닥이 아무것도 심기지 않은 모종판 같다. 그는 멈춘다. 지금 그는 망설이는 사람이고, 망설이자마자 컨테이너의 어둠이 잦아드는 것을 느낀다.

컨테이너 중앙에 구식 석유난로가 놓여 있다. 방열판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온다. 쇠약하고 앙상한 빛이다. 그는 석유난로 앞에 선다. 바깥과의 기온차로 인해 온몸이 화끈거린다. 그는 달아오른 볼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그는 곧 이곳이 컨테이너를 개조한 가건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둠이 헐거운 터번처럼 벗겨져간다. 저편에서 신음이 들린다. 컨테이너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줄곧 귓속을 파고들던 음성이다. 그는 신음의 정체를 확인할 용기가 없다. 이내 그는 난로가 발하는 빛 안에 잠시 머무른다.

오른편 벽으로 철제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에는 화재감시초소라는 글씨가 삐뚤빼뚤한 필체로 새겨져 있다. 못으로, 아니면 철심으로, 조악하게 표기된 글씨다. 신빙성이 없다. 실내에서 후텁지근한 유황 냄새가 난다. 그는 기침을 한다. 은은한 난로의 미광이 호롱처럼 컨테이너 내부를 밝히고 있다. 그는 신음이 들려오는 방향을 주시한다. 빛은 아직 신음의 자리까지 권역을 넓히지 못한 채 어느 선상에서 멀겋게 멀어 있다. 그는 코트를 벗는다.

그는 신음을 향해 전진한다. 지지부진하게, 거의 표가 나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로, 그러나 그것은 끈질긴 걸음걸이다. 끈질기다 못해 집요한 걸음걸이에 가깝다. 신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다. 그는 신음의 주인에게 사과를 할 작정이다. 죄송합니다, 함부로 들어와서 죄송해요, 사고가 났어요, 전화를 좀 쓸 수 있겠습니까, 어딘가 아프신 모양인데, 등등.

그는 소파에 누워 있다 천장의 형광등은 점점이 그을린 얼룩이 있고 타버린 구리선이 통째로 내다보인다 어쨌든 그는 누워 있고 허물어진 자세 그대로 천장의 어느 지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그는 갑작스레 깨어난 자다 누군가에 의해 한꺼번에 주어진 자다 무성의하고 게으른 자다 그는 의지가 없고 계속해서 복기할 기억이 없고 그러한 것들이 없다는 사실이 없고 그런 것들이 없다는 사실이 괴롭지 않다 좀처럼 괴로워지지 않는다 소파 측면으로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 곁눈질하면 화면을 볼 수 있다 텔레비전은 며칠째 같은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색색으로 시끄러운 나비들의 영상이다 궁지와 불만의 반짝이는 분말들인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있다 나는 유령처럼 있지 않고 환각처럼 있지 않고 그러한 것들에 항변하듯이 있다 유령처럼 있는 것 환각처럼 있는 것 허구의 영점인 것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나의 가면에 불과하다

동시에 진행되는 장면 안에서 그는 바닥으로부터 한뼘가량 떨어져 있는 그녀의 다리를 본다. 달랑거리는 다리를 본다. 하늘거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지금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백랍의 개체들을 본다. 넘어진 의자, 칼집이 난 침대보, 팽창하는 커튼의 시야를 본다. 층층이 반복되는 계단들, 층간에서 사선으로 몰아치는 눈발을 본다. 기억의 진위를 판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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