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신용목 愼鏞穆
시인.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가 있음. 97889788@hanmail.net
정홍수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이 있음. myosu02@hanmail.net
황정아黃靜雅
문학평론가. 최근 평론으로 「리얼리즘과 함께 사라진 것들」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문학」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정홍수(사회) 오늘 이야기를 나눌 대상작은 정찬(鄭贊) 장편 『길, 저쪽』(창비 2015), 김중혁(金重赫) 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문학동네 2015), 김종옥(金鍾沃) 소설집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문학동네 2015), 마종기(馬鍾基)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문학과지성사 2015), 고형렬(高炯烈) 시집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창비 2015), 고영 시집 『딸꾹질의 사이학』(실천문학사 2015)입니다. 황정아 선생님, 인사말씀 부탁드립니다.
황정아 문학초점란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도 그렇지만 특히 시는 축적된 독서량이 많이 부족한데도 두분 선생님들께서 원체 든든한 분들이시라 묻어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새로운 사람들과 문학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설레는 일인데요, 즐거운 시간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찬 『길, 저쪽』
정홍수 정찬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존재론적, 윤리적, 형이상학적 물음을 간직한 채, 그 인간다움을 저해하는 세상의 이야기를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인간다움의 이야기는 그것의 해체나 파괴 같은 부정적 양상을 통해, 혹은 탈승화의 차원에서 소설화되는 게 대세가 된 것 같은데, 언제나 도달점이나 회복해야 할 지점을 상정하고 정공법으로 전개되는 정찬 문학은 그런 점에서도 더욱 주목을 요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번 장편의 모태가 된 작품은 2007년 발표된 단편 「희생」인데, 이 무렵 작가는 악순환되는 폭력의 구조, 만연한 폭력의 세상에서 고통의 공감 가능성 등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희생」은 폭력을 끊어낼 수 있는 가능성, 특히 야만적 폭력의 희생자로부터 모색되는 인간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품고 있는 작품입니다. 장편으로 다시 쓰면서 70~80년대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디테일이 대폭 살아났고, 서사를 끌고 가는 인물의 축도 늘어났습니다. 민청학련 사건 때 구속되기도 한 학생운동권의 리더 김준일이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민주화운동,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흐름이 5월 광주, 87년 시민항쟁 등을 경유하고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관련해서 제시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 변혁운동의 이야기는 김준일의 삶이 94년 모스크바에서 자살로 끝나는 것처럼(그는 운동가-시인의 캐릭터로 나옵니다) 다소 이상화되어 제시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이 작품의 핵심이 상징적 의미에서 ‘여성적 존재’의 희생과 슬픔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있다고 보면, 차라리 정형화된 역사적 배경에 그친 듯한 김준일보다는 그의 숨은 연인으로 나오는 차혜림의 이야기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강희우와 대비되는 의미있는 소설적 탐구가 진행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차혜림의 자리는 상처를 품어 안는 자연이나 ‘모성-여성’의 품으로 그려지면서, 그 질문을 좀더 두텁고 복합적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떻게들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황정아 70~80년대 역사에서 고통을 겪은 개인들의 이야기이고 전체적으로 일종의 후일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과 역사의 두 차원이 거의 대등한 비중으로 들어오면서 진행되는데, 우선 역사의 희생자라 할 수 있는 강희우의 고통을 드러내지만 그 고통이 준 슬픔을 통해 희생자 서사를 넘어서려는 구도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 역사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전반적으로 폐허로 그려지잖아요. 역사적 변혁운동의 폐허기도 하고 화자가 생각했던 역사가 성취되지 못한 세계, 꿈을 잃은 역사인 거죠. 이 폐허 역시 고통에서 온 슬픔으로 감싸안으려 하는 작품인 것 같아요. 제목 ‘길, 저쪽’ 과도 연결되는데, ‘길, 저쪽’이 여기서는 어떤 유토피아가 아니라 죽음에 가까운, 그렇지만 슬픔으로 세계와 개인의 고통을 보듬는 죽음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후일담소설이란 형식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후일담이 왜 어려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70~80년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여전히 살아 있는 질문이라 생각하고, 개인과 역사의 차원을 다 같이, 어느 한쪽도 놓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하는 게 절실하다고 보지만 상처나 치유, 화해 같은 프레임으로는 이 질문을 감당하기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역사소설과 후일담소설의 공통점과 차이가 뭘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체험했건 아니건 역사를 어떻게 객관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양자가 공유하는 점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후일담소설은 역사소설만큼이나 역사적 시각을 확보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출발하는 장르인데, 역사소설에 비해 그 점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할 위험이 크다고 봅니다. 역사적 시야라는 건 어떻게 보면 소설이 다루는 역사가 어떤 현재성을 갖는지 조명하고 설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럽게 겪은 역사를 이야기한다고 곧장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아닐 테니까요. 절실하게 전하려 할수록 더욱 객관화가 필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그만큼의 역사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정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실은 ‘작가의 말’에도 나와 있는데, 70~80년대 역사가 배경이나 풍경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과도 닿아 있지 싶습니다.
신용목 70~80년대의 어떤 진지함? 그 시대를 거쳐왔던 분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강직함일 수도 있고, 역사에 대한 숭고한 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래서 정선생님이 말씀하신 구원이나 승화의 측면으로 볼 때, 신학적인 질문과 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비극성을 지상의 방식으로 극복하는 과정 같은 것? 그래서일까요, 한편으로 제 입장에서는 많은 부분이 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어요. 김준일이라는 인물을 묘사하는 대목도 그렇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의 신념을 성숙하게 실천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인간이 어떻게 이 정도로 자기를 단련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정치적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누군가 나서서 그 핵심을 진단하고 설명하는 방식이 조금 교조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역사를 대하는 태도의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소설에서 기대하는 개인과 일상의 문제로 바꿔놓는 측면에서 보자면 좀 아쉬웠습니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일베’(웹사이트 ‘일간베스트’)의 활동에 대한 책임이 독재나 모순에 맞서 헌신적으로 싸웠던 분들에게도 어느정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분들이 가진 윤리적 염결성이 나머지 사람들, 이를테면 중도적이거나 우편향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양심을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은 아닐까 해서요. 사실 예전엔 ‘내가 이 독재정권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정당했고, 그래서 상대적인 도덕적 우월감과 체제 거절의 제스처로서 낭만성을 표출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찍지 않았다고 해서 이 부정한 정권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하기 힘든 시대잖아요. 그것이 제가 최근의 시를 읽을 때 그 낭만성을 의심하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소설에서도 역사를 다룰 때, 이제는 중심 서사와 그를 둘러싼 핵심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주변까지 아우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순전히 정찬 선생님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감 때문이기도 할 텐데요. 가령, 광주항쟁 때도 열심히 싸운 사람들이 아니라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며 도망쳤던 사람들의 고통을 아우르는 것, 꼭 윤리적 인식을 곁들이지 않더라도, 소박한 개인의 욕망이 한없이 처참해지고 비루해지고 그래서 더없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장면을 생산할 수 있는 소설가가 많지는 않다고 생각되거든요.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그 때문에 제 독후감이 상당부분 바뀌기도 했는데요. 죽음을 건너가는 인물들의 묘사가 아주 시적으로 느껴졌거든요. 물론 그 역시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어차피 우리에겐 죽음 자체가 비현실적인 일이니까요. 그래서 마지막 부분을 읽고 나서 앞의 서사들을 반추해보니 비현실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느정도 납득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우리의 경우, 유물론적 역사관을 바탕에 두고 거기에 특이한 방식으로 동양사상을 결합하는 사례가 많은데요. 앞서 자연과 모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듯이 생명의 본원을 끌어와서 어떻게든 슬픔을 딛고 새롭게 출현한 시대를 증언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송곳
정홍수 이상하게도 저는 이 작품이 후일담소설의 틀이나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의 측면에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운동이나 역사의 문제가 서사의 배경이나 밑그림 이상으로 특별한 소설적 질문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고 제가 느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주안점 역시 거기에 있진 않다고 보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이런 측면들이 분리되어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이 소설은 야만의 시대에 저질러진 폭력의 역사적 의미를 증언하거나 탐구하는 차원보다는, 거기서 생겨난 고통과 상처로부터 헤어나오는 길을 정찬 소설 특유의 방식으로 질문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희생의 자리에서 모색되는 구원론 같은 거죠. 끔찍한 성고문의 희생자 강희우의 쉽지 않은 삶의 궤적에 그 질문과 답이 들어 있는 것 같은데, 강희우가 마지막에 남긴 편지에는 좀더 직접적인 언술로 희생자로서 여성적 존재가 갖는 힘, 슬픔으로 고통을 정화하고 폭력을 끊어내는 가능성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길, 저쪽’은 반복되는 폐사지 이미지가 말해주는 것처럼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배태된 질문이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차원의 함의를 더 많이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 소설에서 가장 논쟁적인 지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강희우는 80년대 중반 수배 중이었던 연인인 소설 화자 ‘나’의 행방과 관련해서 공안기관에 끌려가 참혹한 성고문과 강간까지 당합니다. 자살을 기도하지만 뱃속의 생명을 의식하게 되면서 삶 쪽으로 돌아옵니다. 그러곤 아기를 낳아 기르기로 결심합니다. 사실 이 결단은 소설의 핵심 테마, 작가가 설정한 문제의식의 구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어서 쉽게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긴 합니다. 야만의 세상, 폭력의 시대에 무언가 다른 보조선을 만들어보려는, 다른 사랑의 길, 구원의 길을 찾아보려는 작가의 상상적 결단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이게 통상적으로 떠올리고 받아들이기 힘든 결단이라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황정아 그 결단이 중요한 전환점으로 나오기는 하는데요, 실제 소설을 읽으면서 그 부분이 그렇게까지 강렬하거나 극적인 매듭으로 다가오진 않았어요. 생각해보면 무척 힘든 결정인데, 왜 특별히 그런 느낌으로 남지 않는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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