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제18회 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수 金樹

1981년 서울 출생. lahaine77@hanmail.net

 

 

 

젠가의 시간

 

 

아이는 거침없이 조각 하나를 거두어들였다. 탑 가장자리에 삐죽 튀어나온 나무토막이 목표물이었다. 영감에 의지한 무명 화가의 붓끝처럼, 아이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그가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는 시간, 겨우 그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의 차례는 매번 빠르게 다가왔다. 아이는 대담했고, 충동에 가깝다시피 팔을 뻗었고, 탑을 건드리는 바람 따위는 사소하게 여겼으며, 그런 무모함과 무심함이 이따금 절묘한 조화를 이뤄 아이의 일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승부사의 기질이랄지, 그저 운이 좋을 따름이랄지, 그는 쉽게 결론짓지 못했지만, 쉰네개의 나무토막으로 이루어진 어설픈 구조물을 전체적으로 관조하는 그와 다르게, 아이는 흘낏 보았고 생각에 잠기는 법이 없었다.

“할아버지 순서예요.”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들이 젠가를 시작한 지도 어느새 삼십분이 지났다. 젠가라는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직육면체의 나무토막을 세개씩 엇갈려 탑을 쌓은 뒤, 두 사람이 번갈아 제거한다. 맨 윗줄을 제외한 어느 나무토막을 건드려도 상관없다. 제한시간도 없다. 패자는 탑을 무너뜨린 자다.

첫판은 아이가 재채기하며 탑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그의 승리로 끝났다. 아이는 ‘무효’라고 우기지 않았다. 대신 턱에 힘을 꽉 주고 무서운 기세로 두번째, 세번째 판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머쥐었다. 아이는 만족을 몰랐다.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아이가 두 팔을 들며 환호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몇번이나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몇번이라도 져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뜨겁게 움켜쥔 주먹과 얇은 티셔츠 아래에 숨어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앙증맞은 배꼽, 승리의 만족감으로 가득한 눈빛에 그는 얼마나 오래 시선을 빼앗겼는지. 그 잔상이 머릿속에서 회오리치는 순간마다 그는 다짐했다. 게임에만 몰두해야 한다고.

그는 아래서부터 탑을 훑었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졌는가. 오른쪽, 아니면 왼쪽. 골격만 앙상하게 남은 탑의 구멍 너머로 아이의 부분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 반바지. 허벅지에 얹은 자그마한 손. 아이는 초를 재듯 검지를 까딱거렸다. “빨리하세요.”

마침내 그의 거뭇거뭇하고 마른 오른손이 탑을 향해 다가갔다. 어느 조각이 안전하고 위험한지 더이상 판단할 수 없었다. 손끝이 나무토막을 건드리려는 찰나 낮은 중얼거림이 귀에 닿았다. 그를 불안으로 이끄는 예언 같은 한마디. “무너진다……”

 

그가 아이를 처음 만난 건 오월의 마지막 수요일이었다. 그날은 그의 예순다섯번째 생일이었다. 그는 아침밥을 거른 채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엑스레이와 MRI 촬영, 피 검사, 대장 내시경 등 각종 검사가 딸이 그에게 준 생일선물이었다.

작년 겨울, 그의 아내가 급성심근경색으로 수술 중에 죽자 딸은 노년의 질병에 관한 전문가가 되었다. 그때는 그도 그의 딸도 아내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두시간 동안 닫혀 있어야 했던 수술실 문은 고작 삼십분 만에 열렸다. 고개 들어 수술팀의 표정을 살피지 않아도 그는 열린 문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후로 딸은 아침저녁마다 전화를 걸어 그의 건강상태를 체크했다. 아빠, 어지럼증은 있나요? 암기력은 요즘 어떠세요? 또 휴대폰 대신 TV 리모컨을 들고 나가셨나요? 기린, 치타, 물소, 제비, 고래. 순서대로 말씀해보세요. 딸은 뉴스에서 독거노인의 죽음을 접하고서는 그의 집 열쇠를 복사해갔다. 그는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건강 취조가 끝난 직후에 마음이 가장 편안했다. 베란다로 나가 딸이 금지한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이면 노년의 외로움은 손에 들린 종이컵만큼이나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때때로 그는 여덟살의 딸아이를 그리워했다. 당돌한 목소리로, 숙녀의 방에 들어올 때 신사는 노크를 하는 법이에요!라고 말하던.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고작 여덟살짜리에게 무슨 들키기 싫은 비밀이 있단 말인가. 지금은 딸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예순다섯이나 먹은 노인에게 무슨 비밀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딸은 모든 걸 알아갔다. 그의 속옷 색깔과 식성을 꿰뚫었고, 이제는 그의 몸속, 간장과 췌장, 심장과 간, 핏줄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 속속들이 알고 싶어했다.

검사를 마치고 병원을 빠져나와 그는 빌딩이 늘어선 대로변을 걸었다. 비탈을 오르기 전에 습관적으로 길의 경사를 가늠한 뒤 숨을 내뱉었다. 반나절의 금식으로 위장은 텅 비어 있었고, 허기가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아무 식당에 들어가 배를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혀는 MRI실의 거대한 기계에 들어갔을 때부터 하나의 맛을 고집스레 요구했다. 그는 그 맛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육십이 넘으면 미각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어느 연구소의 발표를 그는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쓸데없는 연구였다. 어차피 나이가 저절로 확인시켜주는. 그것은 뇌가 아닌 혀에서 벌어지는 감각의 알츠하이머였다. 혀에 기쁨을 주지 못하는 음식이 늘어갔다. 그는 자신의 혀가 둔해지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혀는 집요해지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이 감각도 곧 사라지리라는 걸 아는 것처럼.

내리막 끝에 쉴 만한 장소가 나왔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 낀 아담한 공원이었다. 구색을 갖추려는 듯 라일락 몇그루가 심겨 있었는데, 죽어가는 중인지 껍질과 잎사귀에 생기가 없었다. 바람이 불자 꽃송이가 맥없이 떨어졌다. 서로 마주 보는 두 벤치가 아니었더라면 길목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늘이 드리운 벤치로 걸음을 옮겼다. 노란 블라우스에 반바지를 입은 여자아이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늘 밖으로 빠져나온 두 무릎에 햇살이 고르게 고여 있었다. 한껏 웅크린 자세 탓에 작고 마른 몸이 더 아담해 보였다. 뭉툭한 코끝과 살집이 남은 볼, 아홉살쯤 되었을까. 무언가 흥미로운 말을 건네서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가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사이, 아이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자리를 떠났다. 가벼운 발걸음이 빌딩의 모퉁이로 사라진 뒤, 그는 옆에 놓인 연보라색 손가방을 발견했다. 아이가 두고 간 것이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망설이듯 가방을 품었다.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가방 속에는 동일한 크기의 나무토막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나무 표면을 어루만지며 갯수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며칠 후 그는 검사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갔다가 다시 벤치를 찾았다. 기대에 보답하듯 라일락 그늘 아래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구두코를 가지런히 맞추고 골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였다. 검은색 에나멜 구두. 그의 시선은 구두를 지나 하얀 스타킹이 꽉 조인 가느다란 종아리와 치마 밑으로 보이는 허벅지에 머물렀다. 맨살이 스타킹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하다. 이름이 뭐니? 그가 물었다. 알아서 뭐하시려고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넌 친절하지 않은 아이구나. 모르는 사람한테 왜 친절해야 하나요? 아이가 쏘아붙였는데도 그는 이상하게 짜증이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에게 줄 선물이 있단다. 가방을 본 아이의 표정이 우호적으로 변했다. 아이의 검은 눈동자는 잘 익은 열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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