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로베르토 M. 웅거 『정치』, 창비 2015

초월적 주체로서의 인간 그리고 새로운 정치

 
 

염승준 廉勝竣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철학 kant@wku.ac.kr

 

 

정치-표1_fmt『정치: 운명을 거스르는 이론』(이하 『정치』)은 중국의 신좌파 이론가 추이 즈위안(崔之元)1997년 로베르토 망가베이라 웅거(Roberto Mangabeira Unger, 하버드대 로스쿨)의 사회과학 저술들의 일부를 발췌·편집한 것을 연세대 김정오(金正梧) 교수가 우리말로 옮긴 책이다. 폭넓은 학문적 관심과 참여의식으로 여러 저술작업은 물론 현실정치에도 깊이 관여해온 웅거는 이 책에서 사회학, 경제학, 법학, 심리학, 정치학, 철학 및 종교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섭렵하며 실제 역사적 상황의 ‘맥락’을 중심으로 지금의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왔고, 이후의 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할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엮은이 추이 즈위안은 서문에서 ‘맥락’을 중심으로 논의되는 웅거의 이론을 ‘구성적 사회이론’(constructive social theory)으로 설명한다. 구성적 사회이론은 실제 인간 혹은 인간집단이 경험하는 사회, 즉 특정한 맥락에서의 경험과 반성, 사유와 해석의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사회를 스스로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맥락-초월적 주체”인 인간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다.

웅거에 따르면 인간은 비록 사회적 위계질서 같은 맥락 안에서 살아가지만 이러한 위계질서 안에서 고착화될 수 없으며 기존의 질서와 관습을 넘어설 수 있는 ‘맥락-초월적 주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인간의 역량은 고착화된 구조와 제도를 부정하는 ‘부정의 능력’이며, 이를 통해 기존에 경계 지어진 ‘유한’을 넘어서는 인간의 무한성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맥락-초월적 주체’는 사회적 위계질서 같은 맥락을 떠날 수는 없지만 동시에 맥락을 초월할 수 있는 유한 너머의 무한을 인간 주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존재다.

웅거의 ‘맥락-초월적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기존 철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간의 ‘무한성’과 뜻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웅거의 ‘맥락-초월적 주체’는 인간 심성을 어떤 시공간의 감성적 조건에 제약되지 않는 ‘초월적 자아’로 보는 칸트의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과, 유한한 정신이 무한한 신성으로 고양되고 무한한 정신이 유한한 개체 안에서 실현된다는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과 화해를 주장하는헤겔의 종교철학적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인간이해는 현재 우리 사회의 구성과 변화에 있어서 시민 각 개인의 역량과 역할에 대한 신뢰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웅거는 정치와 사회의 개혁을 위해 사회적 위계질서와 권한을 부정하는 혁명을 지양하며 사회적 비용의 절감을 위한 ‘일상’에서의 개혁을 강조한다. 사회적 위계질서, 구조, 맥락은 ‘인공물로서의 사회’로 간주되고 ‘맥락-초월적 주체’의 역량으로 부정된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사회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는 평등, 사랑 같은 이념들이 일상에서의 실천을 통해 추상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화된다. 이러한 실현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형성적 맥락과 구조’이다. 이 개념은 구조의 해체를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의 차이점이자, 주체적이고 동시적이며 반성적이고 실천적인 사회를 구성하는 웅거 사회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웅거의 이러한 사회이론의 출발점으로 판단되는 ‘인간’과 ‘형성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습득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웅거는 최근 출판된 『미래의 종교』(The Religion of the Future, Harvard Univ. Press 2014)에서 “더 신과 같아짐으로써 더 인간적이게 되기”를 주장한다. 인간이 비록 현실 속에서 ‘오류의 시궁창’(빠스깔 『팡세』)이며 ‘쓰레기’보다 못한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으나 인간이 신과 같아지는 신성 회복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부정의 능력’이 기존의 사회적 관습과 편견 속에서 매몰되지 않고 ‘만들어진 인공물’로서의 사회적 맥락을 초월하는 능동적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웅거는 ‘인간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이다. 즉 ‘부정의 능력’은 초월적 주체의 특징이고, 인간이 초월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 신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는 지금까지의 한국사회를 반추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인문학적 이해와 실천적인 방법론을 찾아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나 실천가에게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인간의 신성화’ ‘초월’ ‘무한성’ 등의 개념이 이미 보수주의자로 돌아서버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열린 사회의 적들’로 평가받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기존의 정치·사회이론들에는 익숙하지만 동시에 회피하고 싶은 개념일 것이다.

웅거는 이러한 개념들이 단지 종교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된다면, 인간이나 사회 그리고 역사는 결국 지금의 체제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할 역량을 잃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초월’과 ‘신성화’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은 출발선상에서부터 할 수 없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것이기에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쉽게 인정하고 이론과 실천에서의 노력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웅거의 『정치』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인간이해가 왜 급진적이고, 이것이 변혁적인 구성주의 사회이론에 어떻게 관련되며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반대로 이러한 개념들에 익숙한 한국의 철학자 혹은 종교학자들에게는 웅거가 밝힌 개념들을 정치·사회철학과 관련하지 못한 실천적인 제약이 있어왔다. 웅거는 ‘부동심’과 ‘평정’을 우선시하는 ‘과거 종교’나 인문학을 “사회의 실천적 구조와의 대결을 회피하고, (…) 일상생활의 숨 막히는 구조에서 도피한 다음 (…) 구체적인 맥락에서 벗어나고, 정신을 결여한 일상과 반복의 세계를 각성시키려는 의향이나 능력 없이 그저 부유(浮遊)한다”(『주체의 각성』, 앨피 2012, 270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 종교와 철학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불행이 사회체제 및 정치적 부조리에서 비롯함에도 그러한 부조리를 자각하고 개혁하도록 일조하는 것이 아닌 ‘사탕발림’과 ‘자장가’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웅거는 ‘저자의 말’을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 ‘지적 식민주의’의 멍에를 벗어버리라고 권고한다. 이는 이미 만들어진 이론을 복사하여 사용하는 학계의 풍토와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교육, 복지, 의료 등 사회의 각 제도를 다른 나라에서 베껴 쓰는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이자 충고이다. 선진사회에서 확립된 이론과 제도는 그것을 기반으로 더 탐험을 시도해야 할 베이스캠프와 같으며, 한국사회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문제를 각성하고 해법을 찾아야 하는 ‘아직 탐험되지 않은 세계의 다른 영역’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초월적 주체로서의 ‘나’에 대한 주체의 각성과 우리 사회의 ‘맥락’의 구성과 변혁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일상에서의 실천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주었다. 특히 초월적 주체로서의 인간 이해가 정치의 근본을 이끄는 힘이라는 각성은 철학자로서 반가운 논의였다. 『정치』가 한국사회의 현재를 고민하며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다양한 학자, 정치인, 시민에게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는 장이 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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