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기획 | 표절 문제와 문학권력

 

한국문학의 ‘주니어 시스템’을 넘어

 

 

김대성 金大成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무한한 하나: 노동자들의 문서고」 「비평가의 시민권」 등이 있음. smellsound@empas.com

 

* 이 글은 지난 7월 15일 문화연대와 인문학협동조합이 공동으로 주최한 토론회 ‘신경숙 표절 사태와 한국문학의 미래’ 중 정문순의 「신경숙 표절 글쓰기, 누가 멍석을 깔아주었나」에 대해 쓴 토론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당시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고치고 더했다. 토론회의 발표 및 토론 전문은 『문화/과학』 뉴스레터 10호(http://cultural.jinbo.net/?p=1605)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평의 진지(陣地)

‘신경숙 표절 논란’이라는 ‘핫이슈’에 목소리를 더하기보다 이슈를 체감하는 발화 위치의 상이함에서 연유하는, 사태에 대한 온도 차이를 드러내며 다른 논의구조를 제안하는 데 집중해보고 싶다. ‘문학소녀’급 소설가를 향해 그간 한국문단이 행한 구애의 민낯을 밝히고 ‘상습적인 표절’이 신경숙 글쓰기에 내재한 태생적 한계라고 단호하게 규정하는 정문순의 발표문을 읽고 해당 논의에 대한 동의 여부에 앞서 ‘이 정도의 강도로 한 작가와 대면한 경험이 있는가’라는 자문을 하게 된다. 비평이 곧 매서운 비판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언제라도 싸움꾼(논객)의 자세로 전환 가능하다는 것이 ‘위험한 자리에 서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표지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평행위가 가까스로 유지될 수 있는 기본 태도라 바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신경숙 표절 사태와 한국문학의 미래’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얼마간 당혹스러웠던 것은 등단 이후 단 한번도 ‘논쟁의 현장’에 참여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간 적지 않은 글을 써왔다는 것은 내가 가진 입장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도 발언할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자리에 머물러왔음을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써온 글의 이력만으로는 ‘긴박하지 않은 비평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형편인 터라 ‘신경숙’이라는 익숙한 이름에 관해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신경숙 사태’라는 생소한 상황 속에서 긴박하게 무언가를 (걸고) 말해야 하는 일은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논쟁의 현장이 전쟁터와 다르지 않은 것은 죽고 죽이는 각축장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무엇을 지킬 것인가, 그러기 위해 무엇과 싸울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서만 비평의 진지가 성립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도리 없이 자문하게 된다. 신경숙 표절 논란에 대한 내 비평의 진지는 어디인가. 이 토론을 나는 이 물음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선고의 독점, 선고의 반복

내가 ‘신경숙 사태’에 대한 세간의 이례적이고 유별난 관심에 시큰둥해했던 것은 진작 터질 것이 기어이 터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태에 관한 비판의 목소리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과감하게 말해본다면 나는 이 논란에 대한 일련의 비판적인 목소리들이 동어반복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나 한국문학의 종말이나 해체에 관한 자성의 목소리는 십수년 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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